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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52화 (52/150)

52화

* * *

벨프리는 허둥지둥 회랑을 지나 아비의 뒤를 쫓아갔다.

“아드리안 전하와 토마스 자작이 동시에 연락을 했다고요?”

훌쩍 황성을 빠져나간 황태자는 저녁이 되어서야 왕자를 토마스 자작령에서 찾았다고 수신했다.

그냥 찾은 것도 아니고 칼 린드버그 왕자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토마스 자작령에서 하루를 더 머문 후 돌아오겠다며 통보를 해 둔 상태였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자작이 제 영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유감을 표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엄중 처벌 하겠다는 보고를 한 것이다.

그 덕에 황성에서 대기 중이던 헨드릭 부자는 저녁을 먹기 전에 공작저로 퇴근했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님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십니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어. 아드리안 전하의 얼굴이 그렇게 어둡지 않았던 걸로 봐서는 심각한 건 아닌 듯했지만.”

심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앓던 이 빠진 사람처럼 개운한 얼굴이었지.

“심각하지 않은데 영지에 눌러앉을 정도랍니까?”

고작 하루긴 하지만 황성이 이역만리도 아니고 모시고 오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닌지 벨프리는 덜컥 겁을 먹었다.

헨드릭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토마스 자작이 직접 사과를 할 정도니 작은 일은 아니겠다만, 하아, 알아서 하시겠지.”

“허어.”

“지금 유추할 수 있는 바로는 짐작 가는 건 한 가지뿐이야. 어떤 멍청한 작자가 왕자를 건드렸다는 것.”

벨프리가 그건 진짜 큰일 아니냐고 입을 떡 벌리며 손을 떨었다.

칼 린드버그를 건드리면 이제 막 사랑에 눈뜬 황태자가 미쳐 날뛸 텐데. 그의 표정이 후련해 보였다는 건 또 뭔가.

“큰일은 있었지만 아드리안 전하와 왕자님 사이에 있던 골은 메워졌다는 말이란다. 아들아.”

아버지의 따가운 눈총에 괜히 머쓱해진 벨프리가 왜 타박을 주시냐고 툴툴거렸다.

“아비는 말이다, 황태자 전하도 걱정이고, 왕자님은 더 걱정인데, 최고의 걱정은 너야.”

뜬금없는 공작의 말에 벨프리는 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걱정이시랍니까?”

공작이 아들을 흘겨보며 팔짱을 꼈다.

“태어났을 때도 미숙아로 태어나 아비 걱정을 시키더니 황태자 옆에서 딱 붙어 자랐지 않으냐.”

그 후로는 쭉 정치 영재 교육 외길 인생으로 연애 및 사교와는 담을 쌓은 녀석으로 지냈다.

게다가 황태자의 총애를 등에 업고 건방짐은 하늘을 찌르고 말이야.

유수의 알파를 쭉 옆에 두고 있었던 탓에 눈만 높아져서는 남자건 여자건, 형질자건 아니건 주변 사람 자체를 연애 상대로 보지 못하는, 이른바 연애 불감증이 되어 버렸다.

“그건 아버지의 정치적 야망이 아니셨습니까?”

공작의 눈초리가 더 흉흉해지자 벨프리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절 황성에 밀어 넣은 건 아버지셨는데요.”

“그건 인마, 네가 하필 대공과 공작 사이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있을 곳이 거기뿐이어서 그런 거고!”

결국 폭발한 헨드릭이 언성을 높였다.

“아드리안을 보자마자 저가 모실 분이라고 콕 집고는 떨어지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거 아니냐.”

벨프리가 머쓱해서 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건 뭐. 아버지라고 다르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매일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아버질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데도, 폐하 옆에서 떨어지질 않고…….”

이번에는 뜨끔한 공작이 시선을 떨궜다.

기세등등한 막내아들이 “대공 전하께서 상단이다 뭐다 매번 떠나 계시는 건 다 아버지 탓입니다.” 하고 일침을 놓았다.

두 아버지 중, 정자 제공자를 꼬박꼬박 대공 전하라 부르는 이유는 벨프리에게 마냥 어려운 분이기 때문이었다.

반한 것은 헨드릭 공작이 먼저였지만 집착은 대공이 훨씬 앞서 나갔다.

일찌감치 정치에서 손 다 떼고 자유롭게 살던 발베니 대공은 헨드릭과 짝이 된 이후로 두 아들과 벨프리가 태어날 때까지 공작저에 칩거했다.

반은 걱정이었고 반은 그놈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칩거라 쓰고 감금이라 읽는다.

그나마 벨프리에게는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는 대공이 알파인 두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알파로 발현하자마자 집에서 쫒아내 버렸으니 말 다했지 뭐.

멀쩡한 집 놔두고 기사들이랑 함께 먹고 자는 형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으니까 어쩔 수 없이 복직하는 걸 허락하시고, 형제에다 황제인 글렌 폐하에게까지 질투를 할 순 없어서 아예 보지 않기를 택하신 분입니다.”

공작이 알았으니 그만하라고 벨프리를 말렸다.

공작이라고 왜 남편과 함께 살고 싶지 않겠냐마는 황성에 매인 몸이라는 게 그랬다.

사건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터졌고 황제의 최측근인 공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일들은 더 많았다.

오메가이고 남편이기 이전에 충신인 헨드릭 공작은 정치에 참여를 못 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시위라도 하듯 매일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대공은 결국 공작을 묶어 두는 것 대신 자신이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것을 택했다.

〈네가 내 시야에 있으면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아랑곳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될 것 같아.〉

공작이 짝인 발베니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성미가 숱하게 그의 정인을 괴롭혔고, 앞으로도 괴롭힐 거라고 확신하듯 말한 발베니는 상단을 꾸려 대륙 곳곳을 누볐다.

헨드릭은 그를 사랑하고 비슷하게 집착했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그가 버겁고 두려웠다.

“대공 전하께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계신다고요. 아버지께선 은퇴를 미루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그나마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저놈이 진짜.

공작이 눈을 치켜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이겼다.

벨프리가 히죽 웃었다.

“어쨌든, 내 말은. 레아 공주와 너무 자주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게 좋겠어. 너는 베타지만 알파의 집착이 꼭 오메가를 향하지는 않으니까.”

“네에?”

어리둥절한 아들 앞에서 수심이 깊어진 헨드릭이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당분간은 고생 좀 해야겠구나. 너나 나나.”

상황을 보건대 토마스 자작령의 일이 마무리되면 뒤처리는 황성에서 해야 할 것 같고.

그 후에는 진짜 약혼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거기에다 린드버그를 공국으로 독립시킴과 동시에 파르만 왕국을 주시해야 했다.

벨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틈 사이로 한숨을 내쉬는 공작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 곧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그전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결해 둬야 아버지도 편하게 감금당하시겠지.

형질자들은 큰일이라며, 벨프리가 혀를 찼다.

* * *

맨정신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얼굴을 화악 붉히며 이불을 걷어찼다.

조금 돌아있긴 했지만 맨정신으로 물고 빨고 뒹군 건 처음이라 전보다 생생히 모든 과정을 기억했다.

물론 ‘진짜 처음’은 이런 데서 할 수 없다는 아드리안의 강경한 태도가 있어 완전한 거사는 치르지는 못했지만.

사실 칼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나다.

“아직은 추워.”

걷어찬 이불을 여미며 세상 달콤한 웃음을 머금는 남자가 예쁘게 보이니 제 눈이 어떻게 됐나 싶다.

부관이 저녁 드실 거냐고 물으며 문을 두드렸지만, 둘 다 대답할 정신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이내 돌아갔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어영부영 넘어간 첫날 밤 이후 맨정신으로 관계를 하면 세상이 뒤집힐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아, 결정적인 그때 뒤집히려나?

그날을 상상하던 칼이 다시 이불을 걷어찼지만 꿋꿋이 다시 이불을 덮어 주고 아예 꽁꽁 감싸 끌어안은 아드리안이 후우, 하고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감고 얼굴만 빼꼼 내민 칼의 눈동자는 다시 원래의 파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 마법을 써 본 소감은 어때?”

아드리안이 눈 아래를 더듬으며 물었다.

“다시 쓰라 그러면 쓸 수 없을 것 같아.”

만화 속 주인공처럼 위기의 순간에 터져 나온 힘은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황성에 돌아가 몇 번 연습을 하면 금방 자기 것처럼 사용하게 될 수 있다며 칼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찬 공기에 노출된 아드리안의 입술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제야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상기시킨 칼이 퍼뜩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맞아.”

“뭐가?”

이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었던 아드리안은 약간 못마땅해했지만, 그들은 대화를 끝마쳐야 했기에 참을성 있게 되물었다.

“마정석에 수식을 그릴 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그려?”

“아니, 나중에 보여 주겠지만 수식에는 어떤 법칙이 있어. 그걸 참고해서 그리지.”

“무슨 법칙?”

아드리안은 어떻게 설명해야 쉽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적절한 예를 들었다.

“수식을 배울 때 우리는 이만큼 두꺼운 책 한 권을 달달 읽어.”

아드리안이 엄지와 검지를 3센티미터 정도 띄우고 두께를 설명해 보였다.

“그 책에는 수식이 그려져 있고 수식별로 의미하는 바가 적혀 있지. 그걸 용도에 맞게 조합하는 거야.”

옳거니, 사전이구나.

칼 린드버그가 확 밝아진 얼굴을 했다.

“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도 있지?”

칼이 수식을 읽고 이해까지 한다는 걸 아는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수식이 복잡해지고, 그러려면 마정석의 크기가 점점 커져서. 휴대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잖아.”

글을 그림으로 그리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애매한 문장도 문제고.

신이 난 칼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정석에 용도에 맞는 정확한 수식을 입력하면서도 크기에 맞추는 방법.”

“정말이야?”

칼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뭐냐, 그 책이라는 거 황성에 돌아가자마자 보여 주면 한번 연구해 볼게.”

알몸인 건 개의치 않으면서 수식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구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두꺼운 콩깍지가 씐 아드리안에게는 그것도 사랑스러웠다.

이불로 칼을 끌어당기면서 “좋아.”, 하고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입꼬리도 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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