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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53화 (53/150)

53화

* * *

아침부터 줄줄이 포박을 당해 끌려 나온 장정이 넷, 그리고 말라빠져서 쓸데도 없을 것 같은 마정석 판매상 하나가 황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이미 자작이 심문을 마친 터라 황태자는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만 흝어보는 중이었다.

어차피 다 사형이었다.

꼭 칼 린드버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떼로 몰려다니며 동네 처자들을 희롱하고 다닌 것이 덤으로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들에게 불똥이 튀길까 걱정하며 너도나도 그들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황태자와 눈이 마주친 말레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는 오늘 너희들의 죗값에 대응하는 판결을 지켜보고 확정하기 위해 입회하였다.”

토마스 외의 알파는 처음 본 터라 다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흘끔흘끔 잘도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정석 판매상 포함 넷은 나이가 서른이 넘은, 가정까지 있는 놈들이었고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람이 이 말레라는 녀석이었다.

어수룩하고 어린 청년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 인생을 망쳤다.

아드리안은 감히 칼에게 상해를 입힌 녀석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물리적으로 얻어터진 기억만으로도 죽기 직전까지 고통받을 테니 아드리안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칼은 잠재된 마력을 끌어다 쓴 것으로도 모자라 주먹을 들었다.

들으면서 새삼 반했다.

그는 늘 자신이 별로 하는 게 없다고, 초라한 척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무모함과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방 안에서 푹신푹신 털이 달린 옷을 입고 제 일이 끝나길 기다릴 칼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물렁해졌다.

표정에 드러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의논 끝에 너희들의 처분 일체를 토마스 랭커스터 자작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놈들의 얼굴이 훤히 밝아졌다.

자작이 우리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우리 집안에게 입은 은혜가 몇인데.

어디 자작뿐이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잘못을 눈감은 이유는 그들도 다 저희 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고 눈치를 보다 보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될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아드리안은 그들의 속이 빤히 보여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계속 아드리안의 뒤에 서 있던 토마스가 걸어 나왔다.

아드리안은 자작의 굳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토마스 자작, 황실이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꼭 충심으로 보답해 주시길.”

토마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 재판은 약식으로 치러졌으나 지엄한 황실의 명과 제국법 아래에서 한 치의 거짓이나 위증 없이 판결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아드리안의 좌측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늙수그레한 사제가 걸어 나왔다.

“제국의 모태인 여신 앞에서 여러분들은 겸허히 판결을 받아들이시오.”

신도도 별로 없는 한가한 교회의 종치기쯤으로 앉아 있는 이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죄인들은 상황 파악을 하느라 웅성거렸지만 황태자는 그들에게 단 한마디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입술에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다물려 벌어지지 않았다.

토마스가 손에 들린 종이를 읽었다.

“앤서니, 데레제, 파룩. 말레, 위의 네 사람은, 첫째, 이웃의 아내를 희롱한 죄. 둘째, 도박을 일삼아 제국의 품위를 손상한 죄, 셋째. 객의 겁탈 미수죄.”

“읍, 으읍.”

죄목이 읊어짐에 따라 말로가 이미 결정되다시피 한 죄인들이 기를 쓰고 반론을 하려 몸을 비틀어 댔다.

토마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마지막 줄을 읽었다.

“마지막, 대 헤네켄 제국의 황태자비를 희롱하며 겁탈 시도한 죄.”

말레가 고꾸라졌다.

갑자기 분노가 치민 아드리안의 페로몬이 부지불식간에 덮쳐 내린 탓이었다.

토마스는 먹먹한 귀와 멀어지려는 정신을 붙들었다.

“……상기의 죄목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으라. 네 사람은 사형. 그중에도 단두형에 처한다.”

“으으읍!”

네 명의 남자들이 혼절이라도 할 것처럼 쓰러졌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노려봤지만 토마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바로 옆에 있는 아드리안 헤네켄의 태산과 같은 압박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끌고 가라. 집행 중 유족들의 입회는 불허한다.”

병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죄인들을 끌고 나갔다.

신관이 손을 덜덜 떨며 따라 나갔다.

흡사 자신도 함께 형벌을 받는 듯 안쓰러운 꼴이었다.

남아 있던 한 사람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그는 이곳의 마정석 판매사로 저렴한 마정석을 비싼 효과의 마정석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혐의가 있었다.

사기를 좀 치긴 했지만, 맹세컨대 저들과 어떤 유착 관계도 없었다.

토마스가 작게 혀를 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빈센트. 그대에게는 황태자께서 내리신 엄명이 있어 황성으로 이송한다, 그곳에서 황태자비 전하의 수족이 되어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하고, 묻는 말에는 소상히 답하여라.”

빈센트가 울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황성으로 가는 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일단 죽음을 피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있는 책, 없는 책. 다 잡혀서 더 큰 고초를 치르게 되는 건 아닐지 더럭 겁이 났다.

“비가 달리 할 일이 있어 그런다, 일체의 의문은 불허한다.”

황태자가 혼잣말을 하듯 명령하고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떴다.

그가 나간 후 병사를 불러 죄인을 황성으로 보내라 명한 뒤 토마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슬렀다.

* * *

“마르코랑 엘리자벳이 밥을 안 먹고 울기만 한다고? 그 얘기를 먼저 했어야지.”

재판의 참여를 원했지만 황태자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얌전히 기다렸던 칼은 마차에 올라타서 헤네켄 황성의 근황을 물었다.

마르코와 엘리자벳이 식음을 전폐했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머리를 감싸 쥔 칼에게 아드리안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때문인데?”

“당연히 나 때문이지.”

아이고 두야, 역시 데리고 왔어야 하나.

“뭐 그렇게 좋은 주인이라고 밥도 안 먹고 그러고 있대?” 하며 중얼거린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아드리안은 기분 좋게 어깨를 내 주고 칼의 코끝을 비틀었다.

“어제 하던 이야기의 연장이고 내 변명인데 말이야.”

칼은 아드리안에게 이제 웬만한 것은 숨기지 않기로 했다.

여기가 소설 속이고, 자신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은 가능한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각색을 하는 한이 있어도 이해가 가도록 알려 줄 생각이다.

“내가 기억을 잃으면서 사실 이전의 칼 린드버그는 사라진 셈이잖아.”

“그렇긴 하지.”

아드리안이 웃었다.

“만약, 내가 이전의 칼 린드버그. 그대로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칼의 질문에 아드리안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성심성의껏 대답하려 노력했다.

“글쎄, 국가 간 관계가 관계인지라 만나지 않고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피할 수 있다면 피했겠고. 너는 여전히 마력도, 히트 사이클도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었겠지.”

“그리고?”

아드리안은 그다음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는 변했고, 변한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의 이상형이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니까.

“그다음은 어땠을까?”

“……넌 키치너 재상이 바라는 대로 린드버그의 꼭두각시 오메가 왕자가 되어 악에 받친 채 살다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말은 여섯 마리의 말 중 가장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왕자의 상태와 날씨를 고려하여 나는 것은 포기했다.

“그다음은?”

칼 린드버그는, 원작의 실마리를 잡으려고 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원작대로 아드리안이 다른 사람과 행복해지는 것을 관찰하려는 게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불행의 싹을 잘라 내기 위함이었다.

그 속내는 몰랐지만 칼이 원하는 일이라 아드리안은 냉정히 상상하고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다가 나는 짝 없는 최초의 우성 알파 황제가 돼서 열성 오메가를 둘쯤 거느리거나. 달래지지 않는 러트를 다스리며 폭주한 끝에, 린드버그를 멸망시키고 예전의 칼 린드버그, 아니 린드버그의 씨도 말린 다음에 자멸했겠지.”

칼의 머릿속에는 없는 뜬금없는 새드 엔딩 때문에 입맛이 떨어진 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겠군.”

아드리안은 우리 의논할 것이 아주 많으니 이런 가정법은 관두자고 말했지만 칼은 꿋꿋했다.

“내 생각은 달라, 칼 린드버그가 변하지 않았다면 아드리안의 미래에 칼 린드버그는 망국의 성가신 왕자로만 여겨졌겠고, 여기까진 똑같은데 그다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너만을 위해 준비된 오메가가 나타나는 거야. 너는 금세 그에게 사랑에 빠지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지. 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거라고.

“그래서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나타나지 못할까 봐.”

이게 칼 린드버그가 떠난 진짜 이유였구나.

파르라니 떨리는 속눈썹 끝에, 미처 털어 내지 못한 눈송이가 매달렸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훔쳐 내며 말했다.

“이상하네, 그거 내가 아는 이야기 같다.”

“뭐?”

눈이 간지러운 듯 연신 깜빡이며 칼이 물었다.

“그건 우리 이야기잖아? 어느 날 나타난 오메가와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는 나, 말이야.”

아드리안이 확신에 찬 어조로 속삭였다.

그건 ‘우리’의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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