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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54화 (54/150)

54화

* * *

딱!

엉엉 울던 마르코도 우엉우엉 울던 엘리자벳도.

예비 처형에게 배우자의 무사 귀환을 알리려던 아드리안마저 얼어붙었다.

“어딜 가면 간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 말을 해야지. 네가 10살짜리 평민 꼬마냐? 정신 차렸다 했더니 아직도 멀었구나.”

칼이 소파에 착석하기가 무섭게 테이블 너머로 팔을 뻗어 딱밤을 날린 레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원래도 말이 없는 그녀의 시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며 차를 따랐다.

“누님.”

안 그래도 반가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던 차에 인사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날아오는 질책에 서운했던 칼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레아 린드버그.”

잠깐 얼이 빠졌던 아드리안이 레아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황태자가 공주의 호칭을 생략한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고, 아드리안에겐 칼의 이마가 볼록 솟는 게 더 큰일이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 줄은 알고? 결국 황태자 전하께서 황성을 비우며 널 찾는 바람에 성안의 제후들의 발이 묶였었다는 걸 말이야.”

레아는 들은 척 만 척 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레아의 분노와 성 내의 소란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들으니 부끄러워진 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레아 린드버그!”

결국 아드리안의 언성이 높아졌다.

찔끔할 만도 한데 레아가 되레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린드버그의 후계자이자 저희 남매의 문제입니다! ‘아직’ 남인 전하는 가만히 계십시오!”

“뭐라?”

남이라고?

이런 짓 저런 짓, 다 했고 황제께서 가족으로 삼겠다 말씀하셨는데 남이라고?

아드리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칼은 말리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고 레아에게 사죄를 하려고 슬슬 자세를 잡는데 레아의 매서운 시선이 푹 꽂혀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벌인 일이 있으면 응당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게 우리의 일말의 양심이야. 네 감정이 하찮단 말은 아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던 데다,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만들었잖아.”

아드리안이 다시 움찔거렸지만 칼은 아드리안의 허벅지를 잡으며 말렸다.

“글렌 폐하께서 우리의 무례도 그냥 넘어가시고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린드버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셨어.”

칼은 황송한 마음에 고개를 수그렸다.

레아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동생의 사과에 약간 누그러진 레아는 목이 타서 냉수를 들이켰다.

며칠을 사람 애를 태워 놓고 황태자와 시시덕거리며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레아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녀도 알았다.

제 동생이 괜히 떠난 건 아니라는 것을.

그만의 중차대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사이에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책임이 소실된 건 아닌지를 걱정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칼이 연거푸 사과했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아드리안은 홱 고개를 돌리면서 아직은 남이라 끼어들지 말라는 레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어 분노를 삭였다.

“국가를 받치는 기둥 중에 가장 큰 기둥이 왕족이야. 썩어도 문제고 기울어도 문제지.”

귀를 쫑긋 세운 칼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아드리안의 허벅지도 톡톡 두드렸다.

아드리안은 마지못해 레아를 쳐다보긴 했다.

그러나 이 뒤에 따라온 말로 앙금을 풀었다.

“두 사람이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자유지만. 평민이 아니기에 그 뒤로 책임이 따라온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저 페로몬에 취해 흥청거리는 것이 형질자의 연애 방식이 아닌 것처럼, 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책임을 반으로 나누어 짊어지는 형태의 사랑을 하길 바랍니다.”

과연, 내 자매.

칼이 속으로 박수를 쳤다.

원작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것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이 올곧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원작의 악역이었다가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위치를 바꾼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였다는 게.

아드리안은 작게 감탄했다.

그녀를 뒷방에서 썩게 한 키치너의 계략은 어찌 보면 현명한 것이다.

그녀는 제왕의 자질을 타고 났고, 사려가 깊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면 헤네켄이 움직일 필요도 없이 린드버그를 움켜쥐고 훨훨 날았을 텐데.

“조언 감사히 듣겠습니다.”

아드리안이 감사를 표하자 레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칼에게 좋은 누이는 아니었습니다. 자격이 없어 여태 말을 아껴 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겁니다. 필요하면 쓴소리도 하고 여차할 때 힘도 보탤 생각이니.”

그러니까.

레아는 칼에게 잔잔히 웃어 보였다.

“칼 린드버그, 내가 언제나 너의 선택을 응원하지만은 않을 거야.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

칼은 문득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레아 린드버그라는 캐릭터가, 진짜 제 누님이 된 것 같아서다.

의지할 사람 하나, 둘이 없어 고생했던 지난 생이 떠올라서다.

당초에 그가 칼 린드버그가 되었을 때 마음먹었던 것처럼 안온하고 잔잔한 삶을 살기에는 글렀다.

하지만 그 대신 열정을 퍼붓는 연인과, 조력자이며 지지하는 가족을 얻었다.

그것은 원작의 칼 린드버그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칼 린드버그의 것이었다.

“언제든 쓴소리 부탁드립니다.”

작은 울먹거림에 아드리안이 그의 손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이제야 진짜 인생이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마르코가 대뜸 딸꾹질을 시작했다.

* * *

“담금질을 적당히 해 줘야 강도가 세지는 검 같은 건가?”

며칠이 몇 년은 된 것 같다.

헤네켄의 황성, 외성에서 본성으로, 아드리안 헤네켄의 방 맞은편으로 거취를 옮긴 내가 엘리자벳의 털을 빗으며 말했다.

“뭐가요?”

마르코가 물었다.

“나랑, 나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 말이야.”

내 대답에 마르코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곤 흩날리는 엘리자벳의 털을 주웠다.

그리운 장면의 데자뷔다.

아드리안이 연구하는 수식에 훈수도 두어야 하고 키치너의 행방을 찾으며 그가 숨어 들어갔다는 파르만의 동태도 주시해야 하는 와중에 벨프리와 예언자 아가씨도 만나 봐야 했다.

진작 사과를 드린 글렌 폐하는 이게 다 담금질의 일종이라며 무던히 넘어가라고 하셨고, 헨드릭 공작은 이른 러트가 터진 발베니 공작의 귀환으로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다.

“왕자님은 진짜 이러시면 안 돼요. 혹시 다음에 또 도망가고 싶으면 절 꼭 데려가세요.”

평민으로 사는 삶은 왕자님보다 저가 더 잘 아니 생각보다 도움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용케 알아들은 엘리자벳이 끼잉끼잉 소리를 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요놈, 마른 것 보소.

나 없는 동안 누가 곁에만 다가가도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구는 통에 산책도 못 시키고 목욕도 못 시켜서 그런지 꼬순내가 폴폴 났다.

격한 빗질로 엘리자벳을 달래며 꼭 끌어안았다.

“걱정 마, 다신 나가지 않을 거야.”

마르코가 눈을 세모로 떴다.

세모로 뜨려고 했는데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 때문에 웃기기만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속을 썩여도요?”

걔가 나 속 썩일 일이 뭐 있겠냐?

“종류에 따라 다른데, 어떤 유의 속썩임을 말하는 거야?”

마르코는 음, 하고 잠시 고민하더니.

“여러 가지 있잖아요.”

이를 테면 바람이라든가, 하고 덧붙였다.

아드리안이 바람이라, 잘 상상은 안 가지만 말이야.

“아드리안 황태자 전하께서 바람을 피우시면, 여기서 나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시지.”

인상을 찡그리고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상상만으로도 불쾌했다.

멈칫하던 마르코는 “역시 왕자님이세요.” 하고 양쪽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양 엄지 끝을 보니 쪽팔림이 엄습했다.

이게 사랑이냐, 화학 반응이냐.

사랑도 화학 반응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아드리안을 밀어냈다가 붙잡혔다가 한 게 바로 엊그젠데.

벌써부터 바람 상상으로 질투를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다.

흠, 아니지.

사랑은 원래 유치한 거다.

제대로 해 본 적 없어 확신할 순 없지만 글로 배운 바에 의하면 그랬다.

“왕자님, 병이 더 깊어지신 것 같아요.”

혼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가 주저앉아서 얼굴을 가리는 날 보며 마르코가 또 울먹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고 등을 토닥이며 홀쭉하게 마른 배를 두드렸다.

“너,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밥 먹으라고 했지?”

눈을 부릅뜨자 아깐 분명 볼록했다며 변명을 했다.

영양실조 상태의 마르코는 전보다 더 자그마했다.

늠름한 맛이 있던 엘리자벳은 털이 버석버석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그래서 2시간에 한 번씩 미음을 밀어 넣으라고 말했건만.

순간 외갓집 할머니에 빙의한 사람처럼 마르코의 상의를 올리고 더듬으며 잔소리를 했다.

울퉁불퉁한 빗장뼈 사이로 심장이 뛰는 게 보일락 말락 한다.

“야, 이걸 내가 어떻게 찌워 놓은 건데.”

불쌍해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마르코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지만 난 제 처지를 망각하고 말았다.

“입맛이 없어도 식사는 거르지 말고 하루 다섯 번 꼭 지켜.”

“식사는 세 번 하는 건데…….”

“씁, 말 들어. 그래 봐야 미음인데 그거 소화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 내가 말 했잖아. 사는 데 꼭 필요한 영양소가…….”

덜컥,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드리안이 낯빛을 굳혔다.

“돌아오자마자 왜 이런 꼴을 봐야 하지.”

나는 마르코의 셔츠를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누가 창문을 열어 놨냐.

아드리안의 등장으로 온도가 1도 정도 낮아진 것 같았다.

이것도 데자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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