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 *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남을 만지는 데 거침이 없지.
가만 보면 예사로 남의 어깨를 두드리고 마르코처럼 어린 친구들 몸은 잘 더듬었다.
그 연장선으로 아드리안이 하는 스킨십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건지.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랬다.
쭈뼛거리고, 겁내면서도 아드리안의 뺨을 더듬고 어깨에 기대곤 했다.
입술을 붙이는 것도 그랬다.
자연스럽고…….
‘심지어 잘 했지.’
어디서 그런 걸 배웠을까.
칼을 불태울 것처럼 이글이글한 눈빛을 쏘아댔다.
아드리안이 들어왔을 때 머쓱하게 굴던 칼은 아드리안의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고, 갑작스러운 키스에 아드리안은 자신이 왜 기분이 상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맞은편에 주룩 앉아 있는 사람 둘과 개 한 마리 사이에 제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열을 내는 중이었다.
이전의 칼 린드버그와 결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았던 터라, 그가 연애 경험이 없고 사람 자체를 잘 만나지 않았다는 건 아드리안도 잘 알았다.
그러나 묘하게 노련한 행동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거란 말이냐고.
칼 린드버그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지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심각했지만, 정작 장본인은 수식 도감을 보면서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왕자의 하인이 바짝 붙어서 함께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거리고 오들오들 떨면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보였다.
개도 마찬가지였다.
힘의 우위에 민감한 짐승은 아드리안에게 차마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칼의 옆에 궁둥이를 딱 붙이고 앉아 아드리안을 흘끔거렸다.
아드리안은 팔짱을 끼고 버티고 앉아서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지.
외모와 지위를 빼고서도.
잡다하게 아는 것도 많고 붙임성도 좋아서 마냥 동경의 대상이 아닌 진짜 지인처럼 구는 놈들도 있었다.
“하.”
아드리안이 마른세수를 했다.
남매 사이이긴 하지만 레아처럼 근사한 알파를 가까이 두고 있는 것도.
묘하게 벨프리를 신경 써 주는 것도.
글렌 황제와 헨드릭 공작을 존경하는 마음까지 못마땅했다.
이제야 알파 노릇을 하려는 젊고 아직은 미숙한 아드리안에게는 별것도 아닌 게 다 정적처럼 보였다.
고새 자라난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며 꼼꼼히 책을 살피는 모습도 예뻐 죽겠다.
마디가 곧고 긴 손가락이며 늘 청결히 유지하는 손톱까지.
아드리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알이 크고 무거운 반지를 만들어야겠다.
원칙적으로 반지는 결혼식에서나 나누는 거지만 곧 약혼도 할 테고 결혼은 어차피 하게 될 건데 미리 반지를 끼지 말란 법은 없었다.
모추산의 마정석 채굴이 곧 시작될 테니 기념 삼아 거기서 가장 먼저 채굴된 마정석에 수식을 새기자.
누가 봐도 황태자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세공은 금과 그의 눈을 닮은 사파이어로.
가만 보자 어떤 종류의 수식이 좋을까.
칼은 수식을 읽을 줄 아니 어설프게 소유욕을 드러냈다가는 끼기 전부터 질려 버릴 터였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영원한〉, 〈나의〉, 〈접착〉, 〈인내〉 그리고 〈체념〉.
이럴 때 쓸 만한 수식을 기억을 더듬어 나열해 보았다.
너무 노골적인가.
잘못하면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귀속되어 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평생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의 곁에서 떠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아, 좋다.
아드리안은 점점 자신의 생각이 위험한 쪽으로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알은 작으니 긴 수식은 사용할 수 없는데.
조금 줄여서 〈영원한 나의 것〉.
거기에 아드리안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면.…….
“아드리안.”
아드리안은 느릿하게 저를 부르는 상대방을 응시했다.
저 눈도, 코도, 입술도, 목덜미도, 부드러운 몸도. 어쩌면 영혼까지도 모조리.
다 내 것이 되겠지.
아드리안의 홍채 색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확인한 칼 린드버그가 사색이 되었지만, 아드리안에겐 그것보다 반쯤 벌어진 입술이 먼저 들어왔다.
저 입술은 왜 이렇게 달콤할까.
아니, 달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
아드리안의 욕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알파가 오메가의 목 뒤를 세게 물면 맺어지는 각인은 몸과 페로몬을 묶는 거지. 마음까지는 장담 못 했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모든 걸 지배하고 소유하고 똑같이 칼 린드버그에게 지배당하고 싶었다.
모순적인 마음이었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서로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드리안!”
“……응?”
넘치는 상상과 구체화되는 욕망에서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한 아드리안이 느긋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였다.
칼 린드버그.
그 몸종은 왜 그렇게 끌어안고 있어?
그 애가 네게 나보다 소중해?
나는 네가 가장 소중한데.
네 속에는 뭐가 그렇게 많아서 매일 바쁘고 매일 다른 생각을 해?
아드리안이 손을 뻗었다.
당장 저 둘을 떼어 놓고 입술을 내 입술로 짓이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한편.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아드리안을 보고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칼은 벌벌 떠는 마르코를 끌어안았다.
눈이 돌았네, 돌았어.
아드리안은 천천히 일어나서 칼의 양어깨를 틀어쥐고 일으켰다.
“아드리안, 정신 차려. 지금은 밤도 아니고 여기는 방도 아니거든.”
업무용 책상과 티 테이블, 그리고 길쭉한 소파를 가져다 둔 접견실은 침실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긴 했지만 침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눈만 돈 게 아니라 귀도 닫았는지…….
“그게, 왜?”
……하고 묻곤 칼의 팔을 살짝 잡아 마르코를 털어 냈다.
안 그래도 못 먹어서 힘이 없는 마르코는 금방 밀려났다.
그러나 마르코에게 손을 내밀면 살짝 이상해진 아드리안이 마르코에게 해코지를 할까 두려워서 칼은 일부러 아드리안에 다가갔다.
테이블이 세로로 길고 가로로 짧아 넘어갈 만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드리안에게 덜렁 들려 침실로 들어갈 뻔했다.
“왜, 나만 봐 주지 않고.”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혼자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거야.
칼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며 아드리안의 양 뺨을 감쌌다.
“우리 오늘 마정석이랑 수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응?”
“그런데 날 한 번도 안 봐 줬어.”
아드리안이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칼이 작게 웃었다.
무섭긴 한데 귀엽기도 했다.
아드리안이 제 뺨에 닿은 칼의 양손을 쥐며 살짝 이를 드러냈다가 한 손으로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입술을 맞부딪혔다.
“으읍.”
더할 나위 없이 딱 붙어서 허리가 꺾어져라 키스를 하는 아드리안 때문에 칼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왕!”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엘리자벳이 큰 소리로 짖었고 마르코는 우리 왕자님이 잡아먹힌다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아수라장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칼 린드버그만 난감했다.
아드리안의 페로몬은 묘한 색이었다.
향이 아니라 색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칼 린드버그가 늘 그의 향을 맡으며 초록의 숲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빨리고 치열이 더듬어지는 가운데에도, 칼은 아드리안의 페로몬이 숲 같다 느꼈다.
향나무 안쪽 껍질, 그리고 각종 허브.
자연 그대로의 풀 냄새 같기도 한데 중독성이 있어 자꾸 맡다 보면 어느새 숲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헤매게 되는.
그런 울창하고 깊은 숲 같았다.
칼은 슬며시 아랫배를 문질렀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는 아드리안의 목을 감았다.
거칠고 노골적인 키스의 주도권을 빼앗아 부드럽고 섬세하게 혀를 얽으며 아드리안을 달랬다.
동갑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체급의 차이 때문에 당치도 않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좀 서글펐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지금 ‘돌아 있는’ 상태고 칼 린드버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알파들은 원래 이렇게 다 격정적이고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돌아가고 그러는 건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중에 레아에게 물어봐야지.
뾰족하게 심술이 올라온 아드리안은 자신을 달래고 나면 칼의 몸이 멀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으면서도 코끝을 간질이는 꽃항기에 어쩔 수 없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터뜨릴 것처럼 끌어안고 있던 아드리안의 팔이 점점 허리로 내려가 가볍게 안착하자 칼이 키스를 하다 말고 웃었다.
그제야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첫 키스라며.”
아드리안이 물었다.
분명히 저번에, 처음으로 입술을 마주 댄 날.
칼 린드버그는 말했다.
〈키스는 처음인데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네.〉
아드리안에게도 황홀한 첫 키스라 그날의 칼의 말과 행동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칼은 아드리안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아드리안과 마주 안았다.
“첫 키스 맞아.”
칼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를 꼭 끌어안았고 칼은 속으로 사과했다.
‘남자와 하는 키스’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잊혀진 마르코와 엘리자벳의 서러움이 뒤에서 폭발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순간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을 달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아드리안의 등을 한참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의 눈이 원래 색을 찾았을 때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원래 하려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