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56화 (56/150)

56화

* * *

“수식이 언어라고?”

“그래, 언어야.”

아드리안이 턱을 문지르며 펜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칼은 한글의 기본이 되는 자음과 모음을 쭉 나열해 적고 〈타오르는 장작〉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 쓰여 있는 수식은 ‘불타고 있는’, ‘장작’ 이야.”

칼 린드버그는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타오르는〉 과 〈장작〉을 나누어 적었다.

“타는 것이 뜨겁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래서 보온 마법을 쓸 때, ‘탄다’ 혹은 ‘뜨겁다’라는 상태를 붙이게 되는 거야.”

아드리안이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식이 언어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었으나 종류가 워낙 다양해 규칙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이를테면 고대 언어의 사전인 셈인데, 문제는 친절한 설명을 생략했다는 거야. 그러니 응용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

여기 사람들은 수식을 고대의 여신들이 내려 준 산물이라 여겼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신들이 수식으로 한글을 선택한 건, 단순히 이게 한국에서 생산된 소설 속 세상이라 그랬다.

칼 린드버그가 이곳을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토대가 소설이라는 것을 잊은 건 아니었다.

옥새나, 차원 문처럼 오래된 마법의 수식일수록 길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말하자면 수식은, 한글이고. 또 이들에게는 고대 문자이며 신들이 쓰는 언어나 다름없는 것이다.

수식을 만들 때마다 책을 뒤져 가며 그대로 그려 내는 아날로그적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이게 언어인지, 뭔지. 확인하고 연구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글의 기본은 이게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했다.

물론 그다음은 암기의 향연이었지만.

아드리안은 칼이 이런 걸 다 어디서 알아 왔을까 하는 의문보다, 어릴 때부터 마정석 세공과 수식을 연구하는 데 몸을 담았던 학자의 본능이 먼저 발동했다.

칼 린드버그가 자음과 모음을 묶었다.

그중에서 또 비슷한 모양의 것들을 따로 분류했다.

획을 추가하거나 점을 찍어 가며 적는 것은 수식을 입력할 때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언어라는 걸 이해하고 나니 훨씬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읽혀 내려갔다.

“이건 두 개 혹은 받침까지 세 개를 묶어서 만드는 언어야.”

칼이 ‘기역’과 ‘아’를 조합해 ‘가’를 만들고 “가”라고 발음했다.

“대륙 공용어도 소리나는 대로 쓰는 언어라 금방 배울 수 있어. 발음만 알면 되니까.”

아드리안은 신중히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이해를 하기 위해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가장 처음은 조합하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에 문장을 만드는 거야. 대륙 공용어 배울 때랑 똑같아.”

칼은 〈아드리안〉을 적고 “아드리안.”이라고 발음해 보였다.

아드리안은 수식으로 제 이름을 적을 수 있다는 것에, 그걸 또 칼 린드버그가 적어 줬다는 것에 감격해 종이를 가져가 착착 접어 품에 넣었다.

칼이 뭐가 우스운지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아드리안은 이 종이를 국보로 간직할 셈이었다.

“쓰는 방법을 익힌 다음엔 내가 아는 선에서 형용사와 명사를 구분해 줄게. 기본적인 단어들은 이 책에 나와 있으니 따로 알려 줄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음. 그래. 장작을 〈장작〉으로 쓸 수도 있지만 ‘마른나무’, 혹은 ‘잘 타는 나무’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하면 좀 더 마정석의 용도가 다양해질 거야.”

마치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처음부터 대륙 공용어를 읽고 쓸 수 있었던 칼 린드버그에게도 막상 설명하려니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타오르는 장작〉을 쓰면서 그야말로 타는듯한 더위를 느꼈거든. 우리가 원하는 보온은 그런 게 아니잖아? 그리고 황성에서 사용하는 보온 마법은 〈두 겹의 담요〉야. 활활 타는 장작 하고 포근한 두 겹의 담요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 안 그래?”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오자마자 그것부터 살폈지.”

칼이 자랑스레 말했다.

물론 한글 문장 한 줄만으로 수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을 직접 불어 넣은 마법사의 서명과도 같은 문장과, 수식을 꾸미는 기하학적인 문양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어 그것이 모두 한 마정석 안에 들어가 있어야 마법은 비로소 완성된다.

마정석은 자동차의 껍데기고, 마력은 기름이며, 문양은 엔진이다.

수식은 핸들 역할을 한다. 이러나저러나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핸들 조작을 잘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 마법사는 뭐냐고?

칼 린드버그 기준에 마법사는 제조 공장이다.

포뮬러 원 같은 대회의 레이싱 카를 제조하는 회사와 굴러가기만 하면 뭐든 만드는 제조사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

“수식은 그렇다 치고 오자마자 마정석 판매상을 쥐잡듯 잡더니, 이런 걸 알아내려고 그랬구나.”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씩 웃었다.

마정석 판매상.

사실 그는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는 상인이었고, 상인은 사업에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으니까.

그가 사기를 치면서도 그 마을에서 계속 마정석을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슷한 효과의 더 저렴한 마정석을 비싼 마정석과 같은 가격으로 팔았기 때문이었다.

영하로 떨어지는 한겨울에 〈타오르는 장작〉이나 〈두 겹의 담요〉나 따듯하기만 하면 그만인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고.

게다가 수식을 볼 줄도 모르는 서민들이 말이야.

방 안의 온도가 찜질방처럼 올라도 창문을 열어 놓고 살면 된다.

대신 열린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오는 걸 감내해야 했지만.

어쨌든 마정석 판매상은 영악했다.

마정석 판매상은 기본적으로 간단한 수식을 구분할 줄 알며 금액과 사용 방법을 익혀 놓는다.

토마스 자작의 영지에서 마정석을 판매하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만 오래 마정석을 취급했다.

그러니 학습된 구분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칼은 그에게 마정석을 어떻게 구분하여 팔았느냐, 금액의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아느냐를 소상히 물었고 판매상은 발발거리며 아는 대로 다 답했다.

그도 〈두 겹의 담요〉가 〈타오르는 장작〉보다 비싼 결정적인 이유가 수식을 연구하는 사람의 수고료 때문이라는 건 몰랐겠지만, 한쪽은 적당히 따듯해지고 한쪽은 적당히를 모른다는 건 구분했다.

이러나저러나 사기는 사기여서 감옥 생활을 청산할 순 없었다.

“내 생각에 마정석을 세공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단순한 수식에도 세심한 효과를 기대해야 한다는 점이야.”

아드리안도 늘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이게 기호라고 생각했을 땐 말이야, 조합하는 데 애를 먹었거든. 하나만 잘못 입력해도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나는 바람에.”

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먹만 한 돌에 〈이 마정석을 사용하면 두통, 치통, 요통이 낫는다〉 따위의 긴 글을 새기면 효과는 좋겠지만 새기는 과정에서 이미 문제가 수십 가지는 발생했을 거다.

받침 하나의 모양만 달라져도 통증이 ‘낫’는게 아니라 ‘낳’게 되니까.

아드리안은 칼의 종이를 가져가 ‘기역’과 ‘키읔’의 차이를 외웠다.

‘미음’과 ‘비읍’의 차이도.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선에서는 전부 알려 줄 건데…….”

칼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드리안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수식이 언어라는 사실은 요만한 단서만 있어도 누구나 알 수 있어.”

“그렇겠지. 마법사가 헤네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어떤 원리의 언어인지 연구하는 나라들도 있을 거야.”

아드리안이 동의하자 잠깐 눈을 깜빡이던 칼은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헤네켄에서 먼저 원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응용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다른 나라에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정말?”

“응.”

의외였다.

그가 마정석의 혜택이 누구에게나 다 공평히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는 글렌 황제의 의도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정이 많은 편이라 당장 마법사들을 모아 언어란 걸 공표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아드리안이 빤히 저를 쳐다보자 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글렌 폐하께서 마음이 넓은 분이란 건 잘 알지만 마법은 국력의 문제기도 해. 맞지?”

“그건 그렇지.”

마법을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빠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형질자에게 특권을 부여하며 권력을 쥐여 주지 않았던가.

“글렌 전하께서 내가 책임을 회피하고 떠났을 때조차 린드버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셨는데, 난 달리 약속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 그러니 이 수식 연구가 이왕이면, 가급적 오래 헤네켄이 번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칼 린드버그가 시작했으나 실질적인 문제는 헤네켄에서 다 해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인 것 같아.”

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드리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부황께선 네가 내 배우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약속이야. 네가 달리 보답을 할 필요는 없어.”

혹시 아직도 국혼에 대한 부담이 있는 건 아닌지 덜컥 염려된 아드리안이 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게다가 너는 모추산맥의 마정석을 지참금으로 가져왔어. 여기서 어떤 보답이 더 필요해?”

그의 불안을 눈치챈 칼이 설핏 웃으며 마주 잡은 손에 손가락을 얽었다.

“마정석으로는 부족하다며. 전에 그랬잖아.”

아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정석을 채굴하는 데 품이 많이 들어서 꼭 다른 보답을 받아야겠다며. 네가 말했잖아. 잊었어?”

제 발등을 제가 찍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아드리안에게 칼이 하하,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땐 몰랐지.

“그건 농담이고, 잘 키운 아들, 나한테 주셨으니까 보답은 해도 해도 부족하지. 안 그래?”

아아.

어디에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칼 린드버그는 매번 이렇게 아드리안의 뒤통수, 아니. 마음을 내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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