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오호라. 원리만 알면 의외로 편하게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렌은 두 아이를 제 앞에 앉혀 두고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왕자의 조막만 한 머리통을 쓰다듬고 싶어 간질거리는 손을 잠깐 들었다가 황태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내려놓았다.
어딜, 아비를 그런 불손한 눈으로 훑어봐.
“이걸 자음이라 하고, 이걸 모음이라고 하는데…….”
칼이 설명하는 동안 글렌은 속으로 계속 감탄했다.
황후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은 없지만, 황후 닮은 오메가였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저 아들은 크고 사나운데 요 아들은 비교적 작고 귀여웠다.
그냥 귀엽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쩔 땐 관록 있는 어엿한 사내 같고, 어쩔 땐 갑자기 돌변하여 눈웃음을 살살 치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모습에 아들의 혼이 쏙 빠질만 했다.
지금도 딱 달라붙어서 누가 제 오메가 잡아채 갈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꼴이라니.
아직 멀었다 멀었어.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업데이트, 아니 좀 손을 볼까 합니다.”
업, 뭐?
황제가 왕자에게 “응?” 하고 되물었다.
“여기 쓰여 있는 단어만으로는 수식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모아서 재정비하고, 추가로 설명을 달 수 있다면 달아 보려고요.”
거기에다 수식에 입력되는 빈도가 높은 단어와 그렇지 못한 단어를 나누어 정리하겠단다.
자신이 넘치는 칼의 모습에 아드리안이 또 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 달달 외워야 한다는 수식 도감.
그러나 책 한 권을 머리에 다 쑤셔 넣는 건 한계가 있는 데다, 마법사들이 거의 귀족인 탓에 달리 해야 할 일들도 많아 마정석에 수식을 입력할 땐 도감을 들쳐 보며 작업했다.
글렌이 턱을 쓰다듬었다.
칼 린드버그는 또 의견을 냈다.
“마력을 주입할 때 외에 수식을 입력하는 과정에 꼭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생활과 밀접하면서도 단순한 수식은 적절한 사람을 뽑아 넘겨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같은 종류의 마법은 수식을 통일해 버리는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글렌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렇게 되면 마정석을 판매하는 사람은 사기를 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일일이 묻는 수고를 덜겠지.
긍정적인 글렌의 대답에 칼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거. 저런 게 꼭 소년 같다니까.
저보다 한참 어른인 데다 지위도 높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기쁜 듯 웃으며 볼을 붉히는 모습에 아드리안이 웃다 말고 제 아비를 향해 정색을 했다.
쯧쯧. 글렌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일일이 질투하면 피곤할 텐데.
아직 어리다 어려.
테레자의 시중을 드는 시녀도 질투해서 제가 있을 땐 곁으로 잠깐도 못 오게 하며 직접 시중을 드는 황제가, 자신의 모습은 망각하고 저랑 똑같은 아들만 반푼이 보듯 노려보았다.
“일단 제후들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 두었네, 조만간 회합이 열리면 그들에게도 같은 설명을 해 주어라. 모두 입이 무거운 충신들이니 수식의 비밀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네.”
칼이 반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턱을 손바닥에 괴고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말을 돌렸다.
“린드버그에 대한 이야기야.”
방금 전까지 신났던 칼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진작 레아 공주가 린드버그로 넘어갔어야 하지만 그대가 사라졌던 일도 있고 해서, 아직은 우리가 뽑아 둔 임시 영주들이 나랏일을 돌보고 있어.”
“임시 영주라 하심은…….”
“아아, 갖가지 이유들로 뽑았네. 이전의 영주를 모시던 사람들 중 반골 기질이 강한 부관들이나 여기가 깨어 있는 사람들 위주로 세워 두었어.”
글렌이 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권한을 부여했다고 해 봤자, 그간 세금으로 거둬 들였던 작물을 나눈다거나 경작지를 재분배하고 헤네켄에서 조달한 약품을 나누는 일을 하고 있지.”
그들을 감시하는 건 각지에 흩어진 헤네켄의 병사들 중 가장 직책이 높은 이들이라고 덧붙였다.
칼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물건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 더 가지려고 다툰다거나.”
오래 가난과 싸웠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눈앞의 것을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큰 죄는 아니었다.
“린드버그의 백성들은 아주 잘 버텨 주었어. 그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만.”
“그게 뭔가요?”
“린드버그의 귀족 위주의 규제와 규율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 덕에 평민들이 더 끈끈해진 것 같아.”
글렌이 전해 준 이야기는 칼 린드버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창고가 열리면 일제히 뛰어가 아수라장을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뒤에서 굶어 죽고 있는데 눈 돌아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그러나 린드버그의 사람들은 대열을 정비했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자, 어린아이, 노쇠한 사람들에게 먼저 식량을 배분한 뒤, 부양하는 가족이 많은 집, 홀로 사는 사람에게 그다음이 돌아갔고 나머지를 비교적 건강하며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나눠 가졌다고 했다.
“창고 앞에 병사를 배치했지만 누구도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어. 참고로 성주의 개인 재산은 아직 처분하지 않았네, 그건 어디까지나 재판 이후 판결로써 처분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성문이 열린 후 귀중품 단 한 점도 도난당하지 않았어.”
의외의 말에 칼이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글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하던 사람들에게 귀중한 건 먹지도 못할 보석보다는 쌀 한 줌이지.”
“아…….”
“그렇다고 해서 그게 대단치 않다는 말은 아니야. 벌써부터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마을도 있으니. 린드버그의 사람들은 천성이 온화하고 무던했던 것 같아. 그러니 그 폭정 안에서도 견뎌 내고 있었겠지.”
과연 형제의 나라야, 하며 황제가 웃음을 머금자 칼 린드버그는 자신의 짧은 식견이 민망했다.
모두가 다 독기를 품고, 악에 받쳐 산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겐 침략으로 비쳤을 테니, 여파가 가라앉거든 레아 공주를 필두로 해서 귀족들의 처분과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네.”
칼이 마치 탁자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셔서 정말,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감사는 넣어 두라고 말했다.
쿨한 건 집안 내력이구나. 칼 린드버그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보다 말이야, 일단 약혼식을 서두르자.”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빠진 칼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예?”
이 시점에요?
“내 생각에는 돌아오는 주가 좋겠다.”
글렌이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밤 자고 나서.”
“농담이시죠?”
“황제는 농담 따위 하지 않는다.”
툭 하면 제후들이 모인 자리에서 농담하는 게 취미인 황제가 시침을 뚝 뗐다.
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혼이야 하기로 한 것이지만 상황이 이래서 최소 몇 개월은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심지어 다섯 밤 자고 나서라니?
“테레자의 배가 더 불러오면 참석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황태자의 약혼식에 어미가 빠지면 서운할 거 아니냐.”
글렌이 짓궂게 웃으며 아드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는 찬성합니다.”
아드리안은 짧게 한마디 했지만 글렌은 속으로는 춤을 추고 있을 아들을 간파했다.
“앗.”
아드리안이 넙죽 대답하는 바람에 더 놀란 칼이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오늘따라 황제를 말려 줄 공작이 없다.
칼이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저, 혹시 아주 약소하게 치를 예정이신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황태자의 탄신연도 아직이다. 겸사겸사해서 아주 성대하게 치러 보려고,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도 우리가 결합했다는 걸 알게 되도록.”
황제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칼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아드리안을 쳐다보았지만 아까 그렇게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쓰던 아드리안은 지금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일명 스․드․메를 다 끼고 패키지로 일사천리 끝내는 결혼식도 세세하게 살피다 보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무려 황태자의 생일 겸 약혼식이다.
비용이며 시간이며 엄청나게 소모될 일인데 그걸 고작 5일 안에 준비하겠다고?
아무리 평판이 좋은 황제라도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할지도 몰랐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폐하.”
결국 칼 린드버그가 정색을 하고 나서자 글렌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아, 그건 걱정 말게.”
뭐라는 거야.
황제가 명령하면 따르는 건 결국 신하들이다.
일정을 다 중단하고 참석해야 하는 제후들은 둘째치고 사용인들의 원성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시는지.
칼 린드버그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왕자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지만, 그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약혼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네.”
“예에?”
“그대가 린드버그에서 돌아올 시점부터 이미 약혼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어디 보자, 대사제 준비 끝났고, 귀족들에게 통보 끝났고, 경비병 배치도 완료되었네. 식재료는 전날 저녁 들어올 거고. 약혼 장소인 후원에는 그날 꽃이 만발할 예정이지.”
황제가 별걸 다 세세히 안다 싶었다.
한겨울에 꽃이 만발이라니, 동화입니까?
아니지, 여긴 판타지 소설 안이지. 참.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황제는 계속해서 준비 목록을 읊었다.
“테레자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발베니 대공도 그때쯤이면 러트가 끝날 테니 공작하고 참석하겠구먼.”
어디, 남은 건 예복뿐이군.
하하하.
글렌 황제가 웃었다.
아드리안은 저는 새하얀 예복을 입고 칼에겐 새카만 예복을 입히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어이가 사라진 칼 린드버그만 입을 떡 벌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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