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58화 (58/150)

58화

* * *

뭐어?

네가 정말 싫다고 하면 국혼은 강요 안 해?

칼 린드버그가 씩씩거렸다.

황제가 이미 저게 내 사위라고 점을 찍어 놓고 밑밥을 다 깔아 놨는데.

거기서 내가 진짜 어디 멀리 사라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히죽거리는 아드리안을 노려보던 칼이 팩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허리를 좀 더 펴셔요.”

“앗, 넵.”

칼의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황제의 추진력은 그야말로 불도저였다.

말이 나온 게 어젠데 오늘 아침에는 아드리안이 재단사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식사 직후에 치수를 재야 편안한 옷을 만든다는 게 황성 수석 디자이너의 철칙이라며 밥은 얼마나 먹었는지 식단이 뭐였는지도 묻고, 몸이 붓지 않았는지도 체크하는 모습이 완전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네가 피부가 희니까 검은 예복을 입고, 내가 흰 예복을 입으면 어때?”

린드버그 성에서처럼 수백 벌의 옷을 세워 놓고 입었다가 벗었다 할 줄 알아서 벌써 질리려던 참이었는데, 시종이 들고 들어온 것은 단 두 개의 마네킹이었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른 예복이 꽤 마음에 들어 칼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아래로 뚝 떨어지다가 허리 부분에 잘록하게 봉제선을 넣은 예복은 디자인에는 문외한인 칼이 봐도 맵시가 좋았다.

게다가 겨울 예복이라 그런지 두께가 있으면서도 가벼워 보였다.

“마정석 먹인 양이라도 키우는 건가. 소재가 엄청 좋네.”

“어떻게 알았어? 마정석을 먹인 건 아니지만 마정석이 나오는 곳에서 풀 뜯어먹고 자란 녀석들인데.”

진짭니까.

칼이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칼 린드버그는 그가 이 소설을 그저 그런 연애 소설로 보고 있던 게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소설 속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다양한 면면을 가지고 있었다.

헤네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는 걸 서쪽 영지에서의 일로 배웠고, 린드버그의 백성들이 불쌍해서 마냥 동정해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거기다가 주인공은.

“안쪽은 예복 색에 관계없이 흰 윙 카라 셔츠를 받칠 거야. 코르사지는 린드버그의 상징인 주황색 장미와 헤네켄의 상징인 은방울꽃을 조합할 예정이고. 아, 칼은 손목이 가느니까 이쪽을 좀 조여 줬으면 좋겠어. 펄럭거리면 바람 들어가니까.”

예복의 소매 디테일까지 줄줄 읊어 대는 황태자는 정말 들떠 보였다.

과연 부전자전이다.

둘 다 운동으로 중무장한 단단한 몸에 수컷 냄새 폴폴 풍기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데서 세심했다.

칼 린드버그는 타인에게 그 갭이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갈 거라고 확신했다.

어, 그래.

여자 친구의 생리 주기까지 기억해 가며 꽃을 선물하는 체육 계열 남학생. 딱, 그런 모습이다.

새삼스럽지만, 칼 린드버그는 제 무심한 태도에 상처받았을 전 여자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매사 데면데면하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밍한 연애를 이어 가면서 너를 신뢰해서 그런다는 말로 얕은 애정을 포장했던 자신을.

사소한 것도 질투하고 토라지면서도 작은 몸짓에 금방 풀리는 아드리안을 보면서, 반드시는 아니어도 애정의 깊이와 질투는 비례한다는 것도 배웠다.

아닌 말로 시녀가 아드리안의 허리 치수를 재며 얼굴을 붉히는 것도 거슬려하는 자신도 있었으니까.

말만 한 남성 때문에 여자앨 질투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냐는 말이다.

“최종 가봉은 전날 아침에 할 테니, 걱정 말고 마음껏 드세요. 왕자님.”

디자이너는 흐뭇하게 웃으며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을 번갈아 보았다.

연회가 드문 데다 1년에 두세 번, 옷을 맞출까 말까 하는 황제 부처 때문에 놀면서 월급 훔치는 것도 지겨웠다.

눈앞에 딱 잘 어울리는 젊은이들을 보니 영감이 샘솟았다.

디자이너의 안경알이 번뜩였다.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커프스랑 단추 문양을 전부 바꾸기로 결심했다.

산 정상에서 포효하는 늑대 두 마리.

오메가와 여자는 전부 꽃에나 비유하는 린드버그에선 모르겠지만 여기는 헤네켄이다.

두 사람은 한 쌍의 늑대 같았다.

매일 들판과 바위산을 오가며 뛰어놀고 아웅다웅하는 늑대들.

나이가 황제보다 많은 디자이너는 꼭 오래 살아서 저 사이에 나오는 아기 늑대의 옷도 만들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다.

주먹을 불끈 쥔 황실 전용 수석 테일러가 희희낙락 방을 나섰다.

아침 내내 시달린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철퍼덕 소파에 누웠다.

“기다리려고 했다며.”

앙금이 남은 칼이 아드리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드리안은 간지러운 척 몸을 물렸다. 그래도 손은 칼의 한쪽 손을 착실히 붙든 채였다.

“언제는 뭐, 싫으면 국혼 안 해도 된다며.”

입을 다문 아드리안에게 장난기가 치민 칼이 재차 물었다.

“나 못 찾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

혼인 빙자 사기죄로 수배 전단이라도 붙이려고 했냐고 묻자 정색하던 아드리안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 수배 전단 이미 온 성벽에 다 날아갔어.”

“어어?”

당황한 칼이 입을 뻐끔거리자 이번엔 아드리안이 짓궂게 말했다.

“황태자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발견하는 대로 압송하라고 했지.”

헉.

“진짜?”

“진짜.”

27년하고도 한 해를 성실과 신뢰로 중무장하고 살았던 칼 린드버그가 허옇게 질렸다.

“그거 지금 다 거둬들인 것 맞지?”

“아니.”

엄밀히 따지면 전단이 아니라 영상구였기 때문에 전달이 된 후에 바로 사라지는 거였지만 황태자는 왠지 순순히 알려 주기 싫었다.

“야! 아니, 아드리안 전하.”

칼 린드버그가 펄쩍 뛰었다.

그럼 동네방네 나 도망쳤다는 거 다 소문난 거야?

“전하, 그럼 저 이제 성벽을 지날 때마다 황태자에게 죄짓고 도망친 사람으로 검문에 걸리는 거 아닙니까?”

아드리안은 소파 등받이에 양팔을 올리고 다리를 꼬았다.

“그렇겠지, 검문뿐이겠어? 매번 황성으로 돌아와야 될지도 몰라.”

칼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비록 황태자 비가 될 몸이긴 했지만 나름의 인생 계획은 있었다.

황태자비에게도 휴가는 있을 테니 숨 돌리고 싶으면 여행을 다닐 수도 있고, 그때 반드시 아드리안이 동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럼 나 진짜 지명 수배범 된 거야? 그거 취소 못 해?”

당장 취소해 달라며 칼이 아드리안에게 매달렸다.

별것도 아닌데 순순히 속는 칼이 웃겨서 아드리안은 장난을 멈추기로 했다.

애타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지만 길어지면 별로 좋은 결과를 못 볼 것 같았으니까.

아드리안은 칼을 바짝 끌어안았다.

“글세, 네 죄질이 좀 나빠야지. 무려 황명으로 내려간 거라서.”

결국 칼 린드버그는 글렌 황제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도망 좀 쳤기로서니 평생 범죄 딱지를 달고 살 수는 없었다.

그전에, 이런 상태로 헤네켄의 황태자비가 되도 되는 거냐고.

“죄, 죄목이 뭔데?”

아드리안이 싱그럽게 웃었다. 칼이 아드리안의 얼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쪽 볼의 보조개가 옴폭 들어갔다.

“황태자의 마음에 불 지르고 도망친 죄.”

칼이 더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구겼다.

* * *

“놀고 있네, 진짜.”

겨우 집에서 나와 황성으로 출근했다가, 주군의 칠칠치 못한 모습을 목격한 벨프리는 그대로 발길을 되돌려 레아 공주에게 향했다.

“황태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벨프리가 황태자의 대사를 따라 하다가 오소소 돋은 소름을 문질렀다.

공주님한테 꼭 말씀드려야지.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황태자와 대적할 만한 알파시니까 복수해 주시지 않을까.

“아니지, 왕자님께서 지금쯤 코에 주먹을 날리셨을지도.”

왕자님이 서쪽 영지에서 고초를 당했고 그 범인의 머리를 마정석으로 깼다는 소식은 벨프리에게도 전해졌다.

대공과 공작이 나란히 침실에 틀어박힌 탓에 다른 집안일을 하느라 바로 달려오진 못했지만 벨프리도 걱정을 꽤 했다.

벨프리는 그 소식 이후 왕자를 달리 보았다.

순하고 맹탕인 줄 알았는데 주먹을 날리다니.

형제도 다 우성 알파고, 대공은, 진짜 알파의 본능만 모아 둔 데다 모시는 주군까지 알파였던지라, 강함을 동경하는 데는 이골이 난 터였다.

거기에 비밀을 덕지덕지 붙이고 나타난 칼 린드버그는 벨프리의 눈에는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 황태자의 짝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대차게 도망을 치며 황태자의 뒤통수를 친 것부터 시작해 서쪽 영지에서 그렇게 험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담담하게 제 일을 찾아 하는 모습도 새삼스러웠다.

황제 폐하의 말씀처럼 속에는 잡초처럼 강하고 끈질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벨프리가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그런 것들보다 벨프리의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건.

“오로지 제국을 위해서 수식을 연구하겠다니. 왕자님도 이제 헤네켄 제국의 차기 황후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걸까.”

황실 덕후 벨프리에게 왕자의 그 발언은 매우 함함한 것이었고. 이제 벨프리는 그분을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본성을 빠져나가는 벨프리는 누군가 후문 근처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언자?”

“……흑, 벨프리 님.”

까만 머리를 양쪽으로 올려 묵고 전에 없이 마르고 초췌한 모습의 예언자가 쭈그려 앉아 울음을 삼키다가, 벨프리를 보고는 더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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