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예언자를 만난 건 이번이 고작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발베니 대공이 주워 온 직후 공작저에서 만났고, 두 번째는 예언자가 황성으로 들어오며 만났고, 세 번째가 오늘이었다.
딱히 친분을 쌓을 만한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예언자의 쓸데없는 참견 때문에 아드리안이 화가 많이 났었기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벌려 놓고 있었다.
“왜 우느냐.”
예언자라고는 하지만 한참 어린 데다 신분도 평민이었기 때문에 벨프리는 자연스레 하대를 했다.
“우리 불쌍한 벨프리 님.”
벨프리가 제 귀를 후볐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무슨 소리냐.”
“많이 슬프시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실 테죠.”
예언자가 동정과 연민을 가득 담은 눈으로 벨프리를 더듬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게 서 있던 벨프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뒤돌았다.
“가지 마세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예언자 소녀가 소리쳤다.
벨프리는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제 자리에 섰다.
“저는 알아요.”
예언자 루루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벨프리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녀가 벨프리의 등에 손을 올리기 전에 벨프리는 휙 돌며 그녀를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했다.
“네가 무엇을 아는데?”
아래쪽으로 갈수록 확 퍼지는 형태의 드레스가 검은 피부와 어우러져 마치 해바라기 같았다.
두 해 정도만 지나도 뭇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외모였다.
벨프리는 평범한 베타 남성이었던 터라 자연스레 같은 베타 여성을 연애 상대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린아이는 취향이 아니었고, 오히려 칼 린드버그의 하얀 피부나 금사 같은 머리카락을 보며 제 이상형이 금발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용물이 아니라 외모만 보면 말이다.
“많이 슬프고 괴로우셔도, 저는 언제나 벨프리 님 편이에요.”
“그래? 그거 고맙구나.”
벨프리가 심드렁히 말했다.
전하 말씀이 맞았어. 예언자가 과대망상증이 있군.
“오래 묵혀 두셨던 마음이 보답도 받지 못한 채 꺼져 가는 걸 보는 건 끔찍한 일이죠.”
소녀는 손을 모았다.
벨프리는 재미있어서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내 마음 안에 뭐가 있는데?”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지만 벨프리의 마음속 선을 넘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공작에게 달려가 예언자의 거취를 옮겨야 한다고 알릴 예정이었다.
“저는 알아요, 벨프리 님께서 아드리안 전하의 등을 보며 흘린 한숨과 눈물을요.”
벨프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분 뒤에서 한숨을 좀 쉬긴 했지, 게다가 그분이 어릴 적에 얼마나 장난이 심했는지 매일 울었어.”
황태자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이 흥미를 자극하는 것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벨프리의 고민이었다.
칼 린드버그 왕자가 예전에 표독스럽고 멍청했다면 어린 시절의 아드리안은 방만과 무절제의 표본이었다.
넘치는 힘을 주체 못 해서 다 때려 부수고 만만한 벨프리한테 장난치고.
벨프리가 아드리안의 뒤에서, ‘아, 네가 황태자로 태어난 걸 감사히 여겨라’, 하면서 이를 갈던 때도 있었다.
예언자가 신통방통하긴 하구먼.
벨프리가 신기한 눈으로 저를 보자, 마침내 공감해 준 것이 감격스러운 듯 예언자 소녀가 다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흑, 하고 울었다.
“저 칼 린드버그 때문이에요. 왜 갑자기 나타나서 두 분을 방해해요? 아드리안 전하도 그래요. 어째서 한 걸음도 뒤돌아보지 않으시는 거예요? 저는 정말, 정말…….”
이게 무슨 소리야?
벨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이 뭘 어쨌다고?”
마녀가 답답하다는 듯 빽 소리를 질렀다.
“두 분이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서 아드리안 전하를 채 갔다고요!”
누가 누구랑 사랑을 확인하는데?
가만, 이 예언자. 지금 설마 벨프리와 아드리안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거야?
“이봐.”
당황한 벨프리가 루루를 불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아드리안 전하와 왕자는 짝을 맺지 않았으니.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게요.”
저만 믿으세요, 하고 예언자가 말했다.
“사랑하셨잖아요. 티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로는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고요.”
예언자의 눈꼬리가 위로 쭉 올라갔다.
“너, 너 뭘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착각이 아니에요! 벨프리 님은 깨달을 계기가 없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는 확신하듯 말했지만 벨프리는 점점 불쾌하기만 했다.
〈황태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죄.〉
〈황태자의 마음에 불을…….〉
그 끔직한 현장을 본 것이 방금 전이다.
벨프리는 트라우마가 온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드리안 전하의 진정한 짝은 벨프리 님뿐이에요. 저 왕자가 아니라고요!”
아이고, 두야.
“너 설마 그따위 이야길 왕자님이나 황태자 전하께 한 건 아니겠지?”
“…….”
했구나.
입을 다물어 버리는 예언자 때문에 벨프리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이 성을 떠난 건 너 때문이었어.”
“저 때문이 아니에요. 그는 인과율에 따른 것뿐이에요. 아드리안 전하께서 따라 나가실 줄은 몰랐지만. 다 되돌릴 수 있어요. 몇 개의 사건을 되돌리기만 하면…….”
그러면서 약혼이 별거냐고,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는 예언자는 정말 미친 여자 같았다.
아니, 벨프리는 예언자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벨프리에게 황태자는 주군이고, 형제였다.
그런 분을 상대로 사랑 같은 마음을 품는다?
상상만 해도 멀미가 났다.
그러나 소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건 무의미했다.
“입을 다물어 주겠니?”
벨프리는 다정하게 말했다.
“첫 번째, 나는 여신에게 맹세코 단 한 번도 황태자 전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상상만으로도 불쾌하니 망상을 멈추어라.”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 약혼식이 코앞이야. 이 약혼에 매달려 일하는 사람이 천이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주관하고 계시니 경을 칠 소리도 그만해. 황족의 약혼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소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걸 알면서도 벨프리는 그만두지 않았다.
“세 번째, 네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건 좋지만. 입 밖으로 꺼내어 분란을 일으키지 말거라. 칼 린드버그 전하는 마음이 여리셔, 네 말에 동요할 것이고. 아드리안 전하는 두 번은 용서해 주지 않을 테지.”
예언자는 혼란과 우울, 절망이 뒤섞인 얼굴로 벨프리를 응시했다.
“네가 예언을 할 때 우리가 들어 주는 건, 네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 정도는 확인할 시간과 인력이 있어서란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전혀 맞지 않고 있잖니.”
벨프리는 소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내일 당장 제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집을 구해 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녀에게 미리 말하렴.”
다정한 축객령이다.
분란의 싹은 애초에 제거해 두는 것이 좋았다.
눈치가 없는 에언자가 어디 가서 벨프리가 황태자를 좋아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흘리기라도 하면 아드리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불똥이 튈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칼 린드버그가 그걸 믿기라도 하면.
벨프리를 볼 때마다 얼마나 서먹하겠냔 말이다.
벨프리는 예언자의 손을 놓고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았다.
그리고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뒤를 돌았다.
등 뒤에서 예언자가 부스럭거리며 바닥으로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감히 아드리안 전하를 가져다 붙이냐.
그분은 연인으로 삼기에는 너무 욕심이 많고 커다란 데다 딱딱해서 싫었다.
벨프리의 이상형은 금발에 눈이 파랗고,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 * *
헤네켄이 아드리안 황태자와 칼 린드버그의 약혼 준비로 분주할 때, 그들의 예상대로 파르만에 숨어든 키치너 재상은 음흉한 꿈을 꾸고 있었다.
헤네켄에서 갑자기 왕자를 데려갔을 때 그가 계속 꿈꾸었던 이미 어그러졌다.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던 파르만에서 조용히 전령을 보낸 건 또 다른 기회의 서막이었다.
무조건 잡아야만 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키치너는, 저만치 위에 앉아 있는 파르만의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무지차 파르만 2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게 무장한 남자는 까마귀처럼 보였다.
그가 마정석 더미에 파묻힐 때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가 제 둥지를 튼 것 같았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듯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키치너가 오싹함을 숨기며 애써 웃어 보였다.
젊은 놈이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압박감은 헤네켄의 애송이나 무지차나 비등했지만 무지차에게서는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는 점이 달랐다.
파르만은 검으로 다스리는 나라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살아서는 나갈 수 없고 조금만 실수해도 목을 내어 줘야만 했다.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자급자족하는 터라 아주 요만할 때부터 국가의 일원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 정해진다.
거부해도 죽고 벗어나도 죽고 게을러도 죽는다.
진정한 공포 정치였다. 그에 비하면 린드버그의 폭정은 폭정도 아니었다.
피라미드 같은 먹이사슬 정점에 서 있는 무지차가 대륙에 검은 손을 펼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암요, 압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혈관이 다 비칠 듯 투명한 피부에 새빨간 입술이 양쪽으로 벌어지며 뱀 같은 혀가 드러났다.
크르릉.
한쪽 손은 집채만 한 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곰의 목에서 마정석이 박힌 목걸이가 번쩍번쩍 빛을 냈다.
“미바리 숲의 마수들을 전부 장악한 후 모추 산맥을 탈환한다. 그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
“헤네켄은 어쩔까요.”
“제국까지 한 번에 손을 뻗을 필요가 없다. 네가 원하는 건 린드버그 왕국의 통치권이고, 내가 원하는 건 모추 산맥의 마정석이니.”
어차피 그 마정석이 전부 손에 들어오면 헤네켄은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파르만은 강해질 테니까.
으흐흐흐흐.
뱀이 기어가듯 쇳소리를 내며 무지차가 웃자, 키치너가 무릎을 꿇고 앉았던 바닥 아래가 웅웅 진동하며 마수들이 울부짖었다.
키치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을 웃던 무지차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뻥 뚫린 천장에선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태양을 되찾을 거야.”
무지차가 작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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