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 *
예언자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칼 린드버그가 그녀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약혼식 하루 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언자를 한 번 만나 봐야 하는데.”
“움직이지 마세요.”
“아드리안이 예언자를 만나 본 것 같던데. 아직 성안에 있을까?”
마르코는 칼의 얼굴에 뭔가 치덕치덕 쌓아 올리며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있겠죠. 뭐. 그것보다 내일 있을 약혼 생각만 하세요.”
마르코는 오랜만에 칼을 꾸미는 중이었다.
예전의 칼은 그렇게 피부 관리며 몸단장, 옷 입는 것 하나하나에 다 신경을 썼는데, 이제는 얼굴에 검댕이 묻어도 모르고 돌아다닐 정도로 무던해졌다.
그런 칼을 챙기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이 된 마르코는 이번 약혼식을 위해 손끝에 없는 마력을 담아 왕자의 얼굴을 마사지했다.
“전 내일이 너무 기대돼요. 왕자님은 뭘 해도 아름다우시지만 꾸미면 더욱 아름다우시니까요. 내일 얼마나 많은 분들이 왕자님께 반할지.”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며 얼굴을 붉히는 마르코 때문에 어이가 없어진 칼이 피식 웃었다.
“약혼식에서 다른 사람을 꼬시면 아드리안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순간 아드리안의 번쩍이는 눈을 떠올린 마르코가 부르르 떨었다.
“꼬시다뇨, 저쪽이 멋대로 반하는 정도는 전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한두 사람 정도 죽을 만큼 괴로워지겠지만.
마르코가 중얼거리며 칼의 눈 위에 오이 두 조각을 올렸다.
“아흐, 시원하네.”
눈을 감고 아드리안을 떠올려 본다.
요 며칠 부쩍 질척이는 아드리안은 자는 시간 빼고는 전부 붙어 있으려고 했다.
사실 자는 시간에도 붙어 있으려 했지만 마르코와 엘리자벳의 열성적인 방해도 있는 데다, 칼 린드버그가 눈에 띄게 지쳐 있는 탓에 번번이 홀로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종에게 눈을 부라리고 기사들은 타박하면서, 칼에겐 하염없이 다정하게 굴었다.
매일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일이 질투하려면 피곤하지 않나, 하면서도 싫지 않은 걸 보면 칼 린드버그의 병도 깊어지는 중인 듯했다.
“사랑도 병은 병이지.”
중얼거리자 마르코는 사랑이 왜 병이냐고 물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많은 걸 가능하게 하니까 병이야.”
칼이 중얼거렸다.
남자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정돈되고 멋진 그의 모습보다 칠칠치 못하고 푼수 같은 모습이 더 좋은 것.
게다가 연애에서 멈추지 않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이 상황이 절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렵네요, 그럼 병에서 나으면 다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오?”
마르코의 의외로 허를 찌르는 말에 칼이 감탄했다.
맞네, 이별을 생각하고 연애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다음을 대비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황태자니까.
이혼은 못 하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이해해 줘야 하는 날이 오려나?
각인인지 뭔지를 하고 나면 서로밖에 안 보이게 된다는데, 사실일까.
“아드리안의 열렬한 저 태도도 언젠가는 차가워지겠지?”
중얼거리는 칼에게 마르코가 입술을 삐죽여 보았다.
“황제 폐하도 그렇고 발베니 대공도 그렇고 소문난 애처가셔요.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왕자님은 결혼 후에 테레자 황후 폐하처럼 방에 갇히지는 않을지를 걱정해야 한다고요.
마르코가 툴툴거리는 소리에 칼 린드버그가 웃었다.
그건 다행이다.
언제부터 감금과 결박이 다행으로 느껴졌는지는 모르겠다.
칼이 원하는 건 전부 다 해 줄 것처럼 구는 아드리안이 가끔 속으로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생각을 한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안다.
번번이 눈이 도는 데다 아주 탐나는 걸 보는 듯 침을 삼키곤 했으니까.
그때 잡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불안하면서도 기대할 때, 칼은 자신이 아드리안을 사랑한다고 느꼈다.
“하여간 약혼식은 연회 포함해서 딱 이틀 치러진대요.”
“그래?”
예상보다 짧았다.
“근데 그 이틀 동안 할 일이 많으시다니 각오하라고 헨드릭 소공자께서 전해 달라 하셨어요.”
각오까지 해야 하나.
약혼식, 피로연, 제후들과 회의, 연회.
바쁘기는 바쁠 거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테레자 황후 폐하도 뵙고, 소문만 무성한 발베니 대공까지 만날 테니.
조금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여태 해 왔던 것처럼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할 순 없다.
아드리안과 좋은 관계로 오래 지내고 싶으면 당연히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는 게 좋았으니까.
“마르코, 너의 모든 걸 걸고 예쁘게 부탁해.”
칼 린드버그의 비장한 부탁에 마르코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네!”
“……정정할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적당히.”
의욕이 충만한 마르코에게 덜컥 겁이 난 칼이 정정했다.
* * *
약혼식 당일에는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높은 하늘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치 가을을 연상케 했지만, 바람은 여전히 매서워서 귀빈들은 별도로 마련된 회장에서 따듯한 음료로 몸을 데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며 가며 사용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상당히 미남이시랍니다.”
“미남에 우성 오메가니까 린드버그에서 그렇게 꽁꽁 싸매고 밖으로 못 나가게 했겠지.”
“바보에 성격 더럽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만나 본 사람들 말로는 품위 있고 영민하시다는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 전하께서 짝을 얻으니 황실에서도 한시름 놓았겠구먼.”
자주 황성에 들어오는 제후들과 몇 명의 귀족들은 왕자의 얼굴을 진작 보았지만, 지방 귀족들은 왕자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온갖 소문의 중심에 있는 오메가 왕자와 알파 황태자의 결합은 헤네켄에게도 축복이었다.
“린드버그가 곧 공국으로 격하된다 하네.”
“새 출발이지. 헤네켄을 등에 업고 예전의 광영을 되찾을 예정이니.”
귀족들은 오랜 침체기였던 린드버그가 다시 활기를 띨 것을 축복했다.
누구도 린드버그가 헤네켄의 새 경쟁 국가로 도약할지도 모름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 쌓아 온 제국 황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헤네켄은 유례없이 풍족하고 평화로웠으니.
거기에 린드버그는 헤네켄의 속국이 될 거고 모추산의 마정석까지 헤네켄의 소유가 되었다.
참새가 날개를 달았다고 해서 매가 참새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새 공왕은 레아 린드버그 공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분도 아직 짝을 못 얻으셨지?”
귀족들은 일제히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겼다.
특히 미혼의 열성 오메가 자녀를 둔 몇 가문이 상기된 볼을 감추지 못했다.
“발베니 헤네켄 대공 전하, 앤더슨 헨드릭 공작 전하 듭시오!”
회장의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온 시종장이 쩌렁쩌렁 외쳤다.
“방랑벽의 발베니가 드디어 돌아왔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실 종친이니 참석해야지.”
“대공께서 어디 그런 걸 신경 쓰시는 분인가? 러트 사이클이 와서 급히 귀환했다고 하시던데.”
소곤거리던 귀족들이 히익, 소리를 내며 헤네켄 공작의 무운을 빌었다.
발베니의 발정기가 유별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배우자를 향한 집착이 남다르다는 것도.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사내가 비틀거리는 헨드릭 공작을 거의 감싸듯이 하며 척척 걸어 들어왔다.
저런, 곳곳에서 감탄과 더불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발베니 헤네켄.
어머니의 재혼으로 황제의 아들이 되어 대공이라는 작위와 헤네켄이라는 성도 하사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일찍부터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수십 개국의 나라를 돌아다니는 상단을 꾸린 황실의 이단아였다.
아직도 불꽃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흉흉한 눈빛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턱수염.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요동치는 근육이 멋있다 못해 위협적이었다.
다들 짠 것처럼 그의 품 안의 헨드릭 공작을 살폈다.
한창때 나라를 뒤흔들 정도였다는 미모는 여전했지만 달아오른 양 뺨과 초췌한 눈가가, 이번 러트도 녹록지 않았음을 짐작게 했다.
제복 위로도 선명히 드러나는 목덜미의 잇자국에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발베니가 이를 드러내며 공작을 감췄다.
누구도 뺏을 엄두를 안 내건만, 그는 여전히 배우자에 한해 양보가 없는 상태였다.
한 나라의 대공과 공작이다.
당연히 중앙에 서야 하는 두 사람인데 발베니는 일부러 가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의 정인의 몸에서 달콤한 향이 가시질 않고 있어 발베니도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이 향의 한 자락도 맡을 수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벽에 딱 붙어 망토로 헨드릭을 가렸다.
헨드릭이 뭐라 뭐라 대공에게 속삭이며 답답하다는 듯 바르작거렸지만 대공은 요만큼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벌써 스무 해가 넘었는데 아직도 저런다니.”
“발베니 대공에게 자식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쯤 자녀가 열아홉은 됐을 거요.”
귀족들이 작게 웃었다.
먼저 회장에 들어와 있던 아들들, 약혼식 경비 때문에 자리를 비운 주니퍼 헨드릭 외에, 황실 전속 의원인 제드 헨드릭과, 황태자의 최측근 벨프리 헨드릭은 두 아버지의 추태에 이를 악물었다.
‘저래서 차라리 참석을 마시라고 했건만.’
공작은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고 우기고 대공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차마 거절을 못 하고.
바로 하루 전까지 격렬한 사랑을 나눴던 사람들답지 않게 무언의 언쟁을 하더니, 결국 대공이 헨드릭 공작을 직접 에스코트하며 그의 품에서 세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기로 합의를 보고 온 것이다.
부모가 사이가 좋은 것이 나쁜 일은 아니나 좌중 앞에서 지나치게 적나라한 애정을 드러내는 건 자식 입장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구긴 두 아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입장한 황제 부처 때문에, 금방 얼굴을 폈다.
“글렌 헤네켄 황제 폐하, 테레자 칼바도스 황후 폐하 드십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잊고 숨을 참았다.
악단을 지휘하는 단장이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우아한 손짓으로 행진곡을 연주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실수였지만 벨프리는 똑똑히 알아챘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한 분들이 계셨지, 참.’
의기양양한 황제의 품에 동그란 공처럼 몸을 만 테레자 황후가 안겨 있었다.
모두가 바라보는 곳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벨프리와 제드, 두 형제가 눈을 마주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더 높으신 분들의 더 파격적인 등장이라 대공과 공작의 추태는 지금 모두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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