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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61)화 (61/150)

황제 부처의 충격적인 등장으로 숙연해진 장내는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글렌의 테레자를 향한 지긋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만큼, 귀족들은 그 상황을 그저 웃어 넘겼다.

금사로 수를 놓은 검은 예복 차림의 황제가 품 안의 황후를 푹신한 의자에 내려놓고 쪽 하고 볼에 입을 맞추자,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귀족들 앞에서 황제를 타박하진 않았다.

미리 회장에 들어와 샴페인을 홀짝이던 레아는, 자연스레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 두 사람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아드리안이 하는 행동을 보건대 글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주인공들의 준비가 끝나면 회장의 모든 사람들은 본성 후원으로 나가 착석을 하고 대사제의 입회 아래에서 서약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주인공들이 퇴장을 하면 다시 안으로 들어와 오늘 하루는 먹고 마시며 즐길 테지.

연회의 순서 자체는 린드버그 왕국과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귀빈들을 모시는 사용인들조차 한껏 꾸민 차림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경직되지 않은 편안한 공기도 그랬다.

그녀도 오랜만에 느긋하게 연회를 만끽해 볼 예정이었다.

약혼식이 끝나면 그녀는 린드버그로 돌아가야 했고, 돌아가면 산재해 있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연회 따위 열 겨를이 없을 테니까.

그녀는 악단이 연주하는 약간 빠른 음악을 들으면서 정박의 왈츠를 주로 연주하는 린드버그의 악단을 떠올렸다.

연주라고 해 봐야 아무도 춤 따윈 추지 않았었다.

음악은 다채로운 색으로 회장 안을 채웠다.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문화생활 부문에도 손을 대 봐야겠네.’

이후로 헤네켄의 귀족들이 레아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헤네켄만의 경사가 아니라 린드버그에도 경사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무시에 길들여진 레아에게는 새삼스러웠다.

레아는 자신을 둘러싸고 사담을 나누는 귀족들을 보면서 속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순서를 매기는 중이었다.

국법을 바로잡고, 세율을 낮추며, 형질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작위를 주고, 토지 정비는 그들에게 일임한 뒤 감사를 나가는 식으로.

“공주님, 시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면서요?”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누군가 물위로 단박에 끌어 올렸다.

책을 잡으려는 건가.

난생처음 입는 나풀거리는 드레스에 주름이라도 갈까 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제니스가 바로 옆에 있는데, 대놓고 그녀의 흠을 지적하다니.

“그렇습니다만?”

레아의 눈초리가 더할 나위 없이 사나워지자 제니스는 쓰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벙어리라 욕 듣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녀가 애정으로 보듬는 주인의 명예에 누가 될까 걱정스러웠던 탓이다.

헤네켄의 지방 소도시를 다스리는 자작이 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아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레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먼저 말을 꺼냈던 그녀는 살짝 음성을 낮추고 다소곳이 손을 모았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어떻게 담소를 나누고 계신지요?”

그녀의 정중한 말투에 레아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내 시녀는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듣습니다. 담소 같은 경우에는 필담을 사용합니다.”

“그러시군요. 다름이 아니라 수어에 대해 아시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수어요?”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자작의 아내가 부채를 내려놓더니, 제니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의 손동작을 해 보였다.

영문을 모른다는 제니스의 얼굴에 자작과 그의 아내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희 아이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손동작을 이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죠.”

자작의 말에 레아가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 아이는 말도 못 하고 귀도 안 들려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수어를 가르쳤고 부모인 저희도 당연히 배웠습니다.”

그중 몇 가지는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이라 시녀도 눈치로 알아챌 거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등에 검지와 중지 끝을 대고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낸 후, 한쪽 손으로 잔을 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제니스는 종종걸음으로 음료 테이블로 갔다.

레아는 제니스가 비록 말은 못 해도 듣는 것은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시범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말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공주님께서 가장 아끼는 시녀라 하여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어쩐지 동병상련의 기분이 들어서, 꼭 한번 대화를 나눠 봐야지, 하고 생각했답니다.”

자작 부인은 약간 볼을 붉히며 말했다.

레아보다 두 배의 인생을 더 산 자작 부부는 집에서 말보다 수어로 더 많은 대화를 한다고 했다.

그때 제니스가 과일 향이 나는 음료 세 잔을 들고 돌아왔고 자작 부인은 “고맙네.” 하며, 손동작으로도 감사를 표했다.

제니스는 금방 고맙다는 뜻의 수어 한 가지를 배웠다.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본 레아의 마음이 요동쳤다.

“간단하지요?”

“배우면 누구든 금방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제니스와 필담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종이와 펜을 둘 공간이 없으면 치마가 지저분해져도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기 때문에 레아는 남 앞에서는 제니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여타의 사람들처럼 대화할 수 있답니다.”

어머니처럼, 때론 큰 언니처럼 레아를 돌보아 온 그녀와 아무 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그건 레아가 정말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어떻게 배우나요?”

레아가 묻자 자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헤네켄에는 아카데미가 따로 있습니다만, 공주님께서는 곧 린드버그로 돌아가셔야 하고 시녀를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희 아이를 데리고 린드버그로 가시면 어떨지 여쭙니다.”

“동작은 직접 쓰며 익히고 의미는 필담으로 가르치면 되니까요.”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말하자, 주변에 서서 듣고만 있던 다른 귀족들도 괜찮은 생각이라 맞장구를 쳤다.

“린드버그로요? 하지만…….”

그곳은…….

레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귀족의 자제를 엉망인 린드버그로 데려가도 될지 걱정됐다. 레아가 고민하고 있으니 자작이 그 고민을 불식시켜 주었다.

“물론 폐하의 허락이 먼저 떨어져야겠지만, 폐하께서는 흔쾌히 보내 주실 겁니다.”

자기들끼리 결정하기 전에 당사자의 의사를 먼저 묻고 싶었다며 자작 부인이 제니스의 손을 살짝 쥐었다.

일개 사용인에게도 스스럼없이 접촉하는 모습에 레아도 제니스도 크게 놀라고 말았다.

레아는 아직도 황후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부른 배를 쓰다듬는 글렌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주책맞은 모습이었고, 린드버그에서였다면 품위가 없다며 대번 구설수에 오를 태도였다. 하지만 당사자는 당당했고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레아가 작게 한숨을 쉬고 자작에게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부족한 게 많아 제대로 대우해 드리지도 못할 테니 차라리 시일이 좀 흐른 후에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아직 어떤 식으로 내정 간섭이 이루어질지 정확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후들 없이 홀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있는 레아로서는 헤네켄에서 넘어오는 귀족 자제까지 챙길 여력이 없을 것 같았다.

자작은 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대우라니요? 성 한편에 아무 방이나 내어 주시면 되는걸요. 린드버그 공주님의 최측근, 그리고 그 스승이 되는 것은 영광이니 그것으로도 족합니다.”

자작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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