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린 곳엔 아드리안이 살 떨릴 만큼 멋있는 차림새로 서 있었다.
큰 키와 멋진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흰 예복에 똑같은 코르사주를 달고 서 있던 아드리안이 등장한 칼을 보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칼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 멋진데?”
칼이 먼저 감상을 말했다.
아드리안은 작게 웃으며 “네가 더.” 하고 대답했다.
몸이 옷걸이고 얼굴이 날개로구나, 생각하며 칼 린드버그는 간지러운 손등을 살짝 긁었다.
칼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중압감은 아드리안을 보며 그의 체취를 맡는 순간에 절반이 날아갔다.
페로몬 효과라는 거 정말 대단하다.
칼이 생각하며 킁킁 냄새를 맡자 아드리안이 좀 더 크게 웃었다.
후원으로 연결된 작은 창으로 정말 꽃이 만발한 정원이 보였다.
겨울에 꽃을 틔운다기에 후원에 커다란 온실이라도 만드나 싶었더니, 마법으로 일부의 꽃들만 개화시킨 모양이었다. 그래서 귀빈들은 차가운 공기를 견디기 위해 코트며 망토 따위를 걸치고 있었다.
“식순을 다 까먹었어.”
다들 한가락 하시는 분들인데 이 엄동설한에 밖에 세워 둬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칼의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아. 시종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아드리안이 눈을 찡긋하자 시종이 옆에서 “맞습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하니 잘 걷고 잘 대답하시면 됩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실수할까 봐 걱정하는 겁니다만……..”
가다가 넘어지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어들어 가는 칼의 말에 회랑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참았다.
식순 일체를 담당하는 의전 대신과 아드리안을 보필하는 두 명의 시녀, 그리고 시종들. 경호를 위해 붙어 있는 경비병들까지.
마르코만 빼고 모두 왕자의 어리숙함을 귀엽다 느꼈다.
물론 황태자가 알면 불필요한 견제를 받아야 하니 기를 쓰고 티 내지 않았다.
“여차하면 내가 안고 들어갈까?”
“그건 더 별로다.”
아드리안의 사심 듬뿍 담긴 권유에 왕자가 칼같이 기각을 외쳤다.
국내외 귀빈들이 모이는 자리에 안겨 들어가는 예비 황태자비로 소문나긴 싫었다.
이미 황제가 황후를 안고 참석하며 한바탕 뒤집어 놨다는 걸 모르는 두 사람이었기에, 아드리안은 아쉬운 마음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때 의전 대신이 밖을 살폈다.
귀빈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 밖으로 이동한 악단이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 두 분 손을 잡으시고, 문이 열리면 천천히 대사제 앞으로 가시는 겁니다.”
꿀꺽.
타는 목구멍에 침을 바르는 칼과 이때다 싶어 덥석 손을 잡는 아드리안이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어, 얼만큼 가다가 멈추면 되죠?”
아.
칼 린드버그의 난제 중 하나다.
대사제의 코앞까지 가서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멈춰야 하는가.
“크흠, 음악이 멈출 때 같이 멈추시면 됩니다.”
의전 대신의 말에 칼이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모두가 이를 꽉 깨물었다.
황제의 결혼식, 그리고 황태자 즉위식 이후 처음 있는 큰 행사였다.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황제 때문에 1년에 한 번 바빠질까 말까 하던 차에 이루어진 약혼이라, 의전을 담당하는 관원들도 모두 힘이 바짝 들어갔었다.
그런데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별것을 다 궁금해하는 왕자 때문에 오히려 긴장이 풀린 것이다.
보통 약혼식을 한다고 하면 머리부터 발끝, 꽃 장식에서부터 테이블 배치까지 관여하는 당사자들 때문에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소박한 성품의 테레자 황후도 그렇고 칼 린드버그 왕자도 그런 면에서는 무던하여 주군을 잘 만났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다 오히려 주군이 무던하니 저희끼리라도 합심해서 제국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는 행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불태우며 모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대로 칼 린드버그는 눈을 부릅뜨고 열리기 직전의 문을 노려보았다.
‘제국에 하나뿐인 황태자의 약혼인데, 엎어져서 망신당하면 린드버그도 우습게 보이겠지.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엎어지는 것뿐인가, 말도 더듬지 않아야 하고 황태자에게 걸맞은 배우자로서의 자세도 보여야 했다.
칼이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왕자님, 힘내세요.”
마르코가 뒤에서 작게 말했다.
창을 내다보던 시종이 문을 살짝 열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 천천히 입장하시면 됩니다.”
칼과 아드리안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손을 꼭 잡았다.
밖에서 식순을 관리하는 사람이 쩌렁쩌렁 외쳤다.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 전하, 칼 린드버그 왕자 전하 드십니다!”
문이 활짝 열리고 두 사람이 걸어 나갔다.
* * *
아드리안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칼 린드버그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왼발, 왼손, 오른발, 오른손을 동시에 움직이며 뚝딱뚝딱 걷는 칼의 옆에서 웃음을 삼켰다.
귀족들 사이에서 작게 미소가 번졌고 저만치 서 있던 레아 공주가 이마를 짚었지만 칼은 보이지 않는 듯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찬바람에 살짝 얼어 홍조를 띠는 양 뺨이 사랑스러웠다.
“긴장 풀어, 약혼식일 뿐인데.”
아드리안이 칼의 귓가에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어떻게 그래.”
칼은 아드리안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온통 새하얀 신관이 있는 곳만 보면서 입술 사이로 복화술을 하듯 대답했다.
“여기에서 네가 잘 보일 사람은 나 하난데도?”
네가 여기서 앞 구르기를 하며 들어와도 책 잡을 사람은 없다고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의 실없는 소리에 칼이 피식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황가의 체면이 있지.”
저한테만 잘 보이면 된다니, 그야말로 어이없는 소리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약간 풀렸다.
저 앞까지 거리가 10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코끝이 딱 시릴 때쯤에 사제 앞에 당도한 칼은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신성한 대사제의 얼굴을 보며, 이 소설의 작가가 탐미주의 성향이 강하단 걸 깨달았다.
‘지나치게 잘생겼네.’
위로 높은 모자를 쓰고 하얀 성의를 걸친 대사제는 흰 나리꽃처럼 아름다웠다.
황성까지 불려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기에 호호 할아버지를 생각한 자신이 송구할 지경이다.
아드리안의 얼굴이야 백번을 봐도 안 질릴 외모가 확실했지만 그건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라 생각했는데.
이야기 진행 중 한두 번 등장 할까 말까 하는 사람까지 이렇게 잘생길 수가 있나.
“두 분, 손을 이리 내미시지요.”
음악이 멈추고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사제가 들고 있는 성서에 올렸다.
대사제가 그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리자, 잠시 뒤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꽃과 허브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곳곳에서 작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칼 린드버그도 처음으로 제 페로몬 냄새를 맡았다.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향기를 매일 풍기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이렇게 상성이 좋은 페로몬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군요.”
대사제가 환하게 웃자 칼 린드버그는 저도 모르게 빙긋 따라 웃었고 그 탓에 아드리안의 봄꽃 같던 시선이 금방 서리처럼 바뀌었다.
한 층 위의 테라스에서 두꺼운 겉옷을 걸친 황후와 함께 앉아 있던 글렌이 픽, 하고 웃었다.
테레자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남편을 흘겼다.
“웃음이 나와?”
소중한 아들의 약혼식.
테레자에게 말도 없이 약혼을 진행시킨 것도 모자라 귀족들 앞에서 기어이 망신을 준 앙금이 남아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뺨에 입을 맞춘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잖아?”
깃털처럼 내려앉는 키스에 기분이 풀린 테레자는 글렌의 어깨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뭐가 재밌냐고 되물었다.
“당신이 처음 대사제를 봤을 때 지었던 표정, 왕자가 똑같이 짓고 있어.”
그리고 아드리안은 그때 내가 지었던 표정을 똑같이 짓고 있지.
불퉁한 아드리안과 헤벌어지려는 칼의 얼굴을 번갈아 본 테레자는 코끝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저분이 100년 가까이 살아온 분이라는 걸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