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연회 이틀째.
약혼식에 이어 황태자의 늦은 탄신연이 한창이었다.
더불어 황도 중앙의 시내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활짝 열리는 황성의 창고에서 다양한 품목이 갖가지 명목으로 하달됐다.
평민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사품을 두고 경연을 벌이는 등 황성 못지않게 활기찬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규모가 얼마나 큰지 황성에서도 어렴풋이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작지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성벽을 타고 넘어오기도 했다.
줄곧 위쪽을 바라보던 아일라는 유모가 저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근사한 차림새의 황태자와 왕자는 오늘도 황제 내외와 나란히 앉아 무희들의 춤사위를 관람했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어려운 동작을 척척 해내는 사람들을 본 칼 왕자가 연신 박수를 치며 감탄해 댔다.
그러다가도 황후가 배를 감싸고 움직이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가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글렌이나 아드리안보다 먼저 신경을 쓰는 모양새가 꼭 자기 어미를 챙기는 것처럼 지긋했다.
“공주님, 공주님.”
그것이 부러웠다.
배우자인 글렌과 아들인 아드리안도 모자라 칼 린드버그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는 황후가 부러운 건지, 아니면 멋진 약혼자를 얻으며 헤네켄 제국의 차기 황후가 될 칼 린드버그가 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일라 공주님!”
“응?”
“몇 번을 불러야 저를 쳐다보시겠어요. 원래도 그러셨지만 여기 온 뒤로 부쩍 멍해지셨군요.”
유모는 신경질이 난 듯 공주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파, 유모.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것 좀 그만해.”
아일라가 꼬집힌 부분을 문질렀다.
“나이에 걸맞게 걱정을 시키질 마시던가요. 오늘은 무조건 귀족 자제들과 면을 트셔야 한다고요. 어제도 벽에 딱 붙어서는, 쯧.”
정예의 귀족들만 참석하는 약혼식과 달리 황태자의 탄신연이라 그런지 젊은이들이 어제보다 많이 모였다.
유모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혼신을 다해 공주를 연꽃의 정령처럼 꾸몄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하얀 드레스와 머리에 얹은 화관은 유모가 레바의 국왕을 조르고 졸라 얻어낸 것이었다.
“이번에 소득 없이 돌아가시면 다음 기회는 결혼식뿐이에요. 결혼식에는 미어터질 만큼 많은 나라들이 미혼의 오메가를 보낼 텐데, 몸매 빼고는 볼 게 없는 공주님이 어디 손수건 한번 흔들어 볼 수 있겠어요?”
거침이 없는 유모의 말은 아일라의 자존심을 긁었다.
“극우성에 가까운 우성 오메가인 칼 린드버그를 본 알파들이 열성에 나이가 반 오십에 가까운 공주님과 뭔갈 해 보려고 먼저 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당연히 공주님께서 먼저 나서셔야죠. 페로몬도 살짝 흘리고. 떨어뜨린 손수건 줍는 척 가슴골도 모아 주고.”
부채로 입을 가린 유모가 아일라에게 보일 정도로만 가슴을 흔들어 보였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천박한 언행에 아일라는 제 속에 있던 무언가를 놓았다.
“날 결혼시키면 아버지가 한 재산 챙겨 주기로 하셨나 봐.”
유모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 유모는 오로지 공주님의 행복을 위해서.”
슬프게도 아일라는 유모의 말에서 아일라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 한 자락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일라는 입을 다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칼 린드버그가 테레자의 배를 조심히 만지며 놀라워하는 동안 아드리안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동이라도 느끼는 거겠지.
촌스러워. 그까짓 임신. 오메가와 알파가 발정기에 짝을 맺으면 그냥 되는 거. 뭐가 저렇게 신기하다고.
아일라가 이를 악물었다.
“공주님 무희들이 춤을 그쳤어요. 곧 자유롭게 교류하는 장이 되니 공주님도 어서 움직이세요.”
오래 묵은 물건을 헐값에 넘기듯 등을 떠미는 유모가 미워서 한소리 뱉어 주려는 찰나, 누군가 유모의 손목을 잡았다.
박하 향이 알싸하게 아일라의 코끝을 스쳤다.
“듣자 듣자 하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모르겠구나.”
일렁이는 푸른색, 그리고 금발이 물결쳤다.
* * *
레아는 정원에 위치한 작은 돔 형태의 온실까지 아일라를 데리고 와서야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요? 그대가 곤란해 보여서.”
아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유모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는 것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제 모습을 들킨 것이 서글퍼서 땅만 봤다.
“동생을 따라 해 봤어요. 그 애는 남이 곤란한 걸 참아 넘기기 힘들어하는 체질이라.”
드레스 대신 기사들이 입는 모직의 바지 정장 차림의 레아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멋지더군요.”
아일라는 차마 레아의 옆에 앉지 못하고 서서 중얼거렸다.
“뭐가요?”
“덕분에 황태자 전하의 젖형제가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약혼식인데도 불구하고. 환자를 위해 나섰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죠.”
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애는 매사 충동적이에요. 신중한 척하지만 어수룩한 구석이 많고. 그래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점 만큼은 칭찬할 만해요.”
그러게요. 부러워요. 전부.
아일라가 속으로 대답할 때 어느새 일어난 레아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입구에 서 있으면 춥잖아요. 이리 들어와요.”
엉겁결에 레아의 옆에 딱 붙어 앉은 아일라는 이러면 안 되지하고 생각하면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름이?”
레아가 목을 죄는 망토의 고정 줄을 풀며 물었다.
“아일라 레바.”
“아아, 레바 왕국의 장녀.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소문보다 아름다우시군요.”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머리를 올려 묶은 레아는 칭찬을 하면서도 아일라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아일라는 맥빠진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그만두세요. 저도 제 외모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부풀려 졌는지 아니까.”
유모의 태도와 자신감 없는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난 터라,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은 아일라는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뒤로 털썩 누웠다.
석양이 지는 하늘에 회색 구름 몇 조각이 떠내려갔다.
“이 주황색 머리카락 때문에, 한때는 극락조라 소문내고 자기들 마음대로 피었다느니 졌다느니, 하더니 지금은 떨어지기 직전의 오렌지처럼 영글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소문의 출처가 타국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우스웠다.
아일라가 푸훗 하고 자조적으로 웃자 레아는 뭐가 웃기냐고 말하며 정색을 했다.
무안해진 아일라는 발등을 조이는 겨울용 부츠를 벗어 던지려 애를 썼다.
유모는 자신을 찾을 거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버지는 난리를 치겠지만 어쩐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끈이 길고 장식이 많은 부츠는 쉽게 벗겨지지도 않았다.
되는 게 없는 인생이라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일라를 유심히 보던 레아가 손을 뻗었다.
부츠 끈을 느슨히 풀며 레아가 말했다.
“공주님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요. 저 하늘색과 똑같은 머리색이에요. 지금.”
아일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금은 얼굴도 노을빛이군요.”
작게 웃어 보인 레아는 부츠를 벗기며 레이스 양말에 감싸인 아일라의 발을 주물러 주었다.
작고, 말랑한 발. 단련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아기 분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공주를 꽃이나 새에 비유하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질 마세요.”
레아는 단호하게 말했고 아일라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러려면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을 끊어야 하는걸요.”
부모님, 유모, 가신들까지요.
레아가 누워 있는 아일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 끊고 갈 데 없으면, 린드버그로 와요. 공주님이 오신다면 그전에 번다한 일들을 모두 정리할게요.”
뜻밖의 말에 아일라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그거 프러포즈예요?”
일국의 공주가 타국으로 거취를 옮길 땐 결혼밖에 없었으니까 그녀의 질문은 타당했다.
레아는 고개를 저었고 아일라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약간 실망했다.
“초면에 프러포즈는 너무 무겁지 않아요? 물론 그런 것 신경 쓰지 않는 어떤 사람도 있습니다만.”
황성 안에서 입이 귀에 걸려 있을 아드리안 헤네켄을 떠올린 레아는 칼이 결혼 전에는 어떻게든 근사한 프러포즈를 받기를 바랐다.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불퉁해진 아일라가 묻자 레아가 빙글 웃었다.
보는 사람이 다 시원해지는 미소였다.
”내가 린드버그에서 빠져나올 구멍은 칼이 만들어 줬거든요. 동생은 보답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니, 대신 아일라 공주에게 숨구멍 하나 열어 주고 싶어서요. 어느 날 문득 모든 게 지긋지긋해서 다 관두고 싶다면 절 찾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