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
“너도. 좋은 밤 되길.”
두 사람이 손을 꼭 붙들고 방문 앞에서 인사를 했다.
오래 나와 있기 힘든 테레자와 글렌이 먼저 떠나고 아드리안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칼 린드버그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곤 헨드릭 형제와 다른 젊은 귀족들에게 적당히 즐기고 파할 것을 명령했다.
경비병들이며 시종들이 줄줄이 따라오는데도 구태여 손을 붙들고 방 앞까지 바래다준건 둘만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 들어가서 같이 잘까?”
아드리안의 대범한 말에 칼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안 돼.”
“왜?”
“그, 민망해서 안 돼.”
아드리안은 칼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약혼도 했고 히트 사이클도 같이 보냈는데, 한방에서 자는 게 뭐가 민망해?”
대놓고 서운한 티를 내는 아드리안이 귀엽긴 했지만 칼은 져 줄 수가 없었다.
진도를 쭉쭉 빼긴 했으나 둘은 현재 미혼의 약혼자 신분이었고, 그의 부모님이 한 지붕 아래 있는데 노골적으로 둘이 동침을 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 민망했다.
전에는 민망할 새도 없었거니와 ‘황제, 황후’의 지위를 가진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글렌’ 그리고 ‘테레자’라는 개인을 만나 시간을 보낸 터라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이 복잡한 심경을 설명하긴 어려웠던 칼 린드버그는 대신 불퉁한 입술에 입을 맞추길 택했다.
누가 보는 데서 입을 맞추는 것은 드문 일이라 아드리안은 금방 마음이 풀렸다.
“때가 되면 질리도록 살 붙이고 살아야 하는데, 그, 원래 이렇게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연애도 재밌다고 들었어. 머지않아 초대할 테니까 기다려.”
속삭이는 소리도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오물거리는 입술도 모두 아드리안의 취향을 저격했다.
“알았어.”
아드리안은 순순히,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눈으로 칼을 들여보내고 돌아섰다.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
빈말을 안 하는 남자니까 기대해도 되는 건가.
아드리안은 속으로 러트가 돌아오는 날을 가늠해 보았다.
서로에게 어려울 첫 경험을 러트 사이클처럼 이성을 잃은 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적어도 서로 이성이 있을 때 두세 번 정도의 경험을 쌓고, 그다음 러트부터 무조건 칼 린드버그와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분간은 서로 번다한 일이 많겠지만, 그 후로는 느긋하게 붙어서 저 사랑스러운 볼을 양껏 깨물고 밤새 지친 칼을 달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결혼식이 잡히면 그전에는 각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서로가 죽어서야 끊어지는 관계가 마침내 되는 거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죽어서도 못 끊어 내게 하고 싶었다.
행복해.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고작 약혼자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무게가 좋았다.
칼 린드버그는 의외로 묵직한 남자라, 책임감 때문에라도 약혼을 물릴 수 없겠지.
그리고 칼 린드버그는 분명 ‘연애’라 말했다.
두 사람이 이끌려 서로 좋아하고 사귀는 것.
아드리안이 칼을 좋아하는 마음에야 못 미치겠지만 다행히 칼도 아드리안을 좋아하니, 그 마음을 좀 더 단단히 다져 나가면 결국 깊게 사랑하게 될 테니까.
칼 린드버그와 함께라면 매일이 기대될 것 같았다.
희희낙락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주군을 보며 모두가 훈훈한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 * *
아, 길었다.
이틀이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칼 린드버그의 품으로 개가 파고들었다.
“왕!”
“미안해, 엘리자벳, 혼자서 많이 심심했지?”
“왕! 왕!”
실내에서 큰 소리로 짖는 법이 없는 엘리자벳은 오늘은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 내리 산책도 연병장에서 한 데다가 칼이 종일 제 곁을 떠났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예식에 반려견을 들이지 말라는 제국법은 없었지만 귀빈들 중 대형견을 무서워하거나 털 알레르기가 심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정원에서 함께 놀자.”
양 볼을 만지작거리며 칼이 하는 소리에 엘리자벳은 끙, 소리를 내곤 엉덩이를 붙이고 함께 침대에 누웠다.
“왜 이런 모습이 아드리안이랑 닮아 보이는 지 모르겠네.”
칼이 작게 웃었다.
그 와중에도 아드리안이랑 닮았다는 말이 싫은 건지 엘리자벳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마르코는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
가기 싫다고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걸 겨우 떼서 내보낸 참이었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으면 해서다.
하루쯤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퍽 좋을 터였다.
톡톡 단추를 풀어내며 쓰러지던 벨프리를 떠올렸다.
벨프리는 왜 쓰러진 걸까.
혹시 충격이 너무 컸던 건 아닌가.
토마스 자작의 영지에서 돌아온 뒤 벨프리를 마주치지 못했다.
약혼식 전에 한번은 제대로 의중을 파악하고 싶었는데.
심지어 벨프리는 연회 내내 아드리안이나 칼에게 제대로 된 축하도 건네지 못할 정도로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각을 못 했을 뿐 사실은 아드리안을 향한 연심이 자라고 있었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아, 예언자.
그녀에게도 묻고 싶은 게 산더미인데.
옷을 훌훌 벗어 차곡차곡 개어 놓은 칼은 욕실로 향했다.
아무리 피로해도 목욕은 포기할 수 없었다.
칼 린드버그가 돌아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따듯한 물을 채우는 정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욕실로 들어가다 말고 칼이 멈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엘리자벳도 딱 멈췄다.
“흐음?”
칼 린드버그의 눈을 잡아 끄는 초록색 병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 병을 들어 라벨을 보니 맛있어 보이는 내추럴 와인이었다.
이 방을 관리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오늘 아드리안과 칼이 이 방에서 분위기를 잡길 원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칼 린드버그의 몸으로 음주는 처음인데.”
생각이 많아 잠도 쉽게 올 것 같지 않은데 한번 마셔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알몸으로 방을 활보하다가 선반에서 장식용 잔을 꺼내고 널찍한 트레이도 발견했다.
평소에는 마르코가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있기 때문에 헐벗고 돌아다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묘한 자유마저 느껴졌다.
“좋았어, 호캉스다.”
칼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엘리자벳을 보며 물었다.
“엘리자벳, 같이 씻을까?”
“헥헥, 왕!”
엘리자벳이 신이 나서 껑중껑중 뛰었다.
“내가 목욕을 좋아하는 개를 키우게 되다니, 재영이가 알면 기절하겠다.”
칼 린드버그는 싱긋 웃으며 엘리자벳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 * *
기다려가 잘 되지 않았던 늑대 한 마리는 사용인들을 다 물린 채 다시 칼 린드버그의 방으로 향했다.
아드리안은 조금 전 자신의 방에 도착하기 무섭게 글렌에게 호출당했다. 밤늦게 테레자의 곁을 떠나는 일이 드문 글렌이었기에 아드리안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파르만에서 어떤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우리가 약혼이다 뭐다 바쁜 틈을 일부러 노린 듯 해. 레아 린드버그 혼자 린드버그로 향하게 하면 칼 그 아이가 상심할 것 같아. 그러니 네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칼과 함께 레아 린드버그를 도와라.〉
아드리안으로서는 칼이 제가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가만히 있기를 바랐으나 그런 것은 칼이 원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함께 가서 칼을 지키는 것이 나았다.
다음 날 일찍 알리라고 하긴 했지만, 아드리안은 핑계 겸 칼 린드버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잠자리에 들기로 결정했다.
똑똑.
“칼, 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침실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말에 따르면 방금 전까지도 기척이 있다고 했는데.
그새 잠들었나.
똑똑.
아드리안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아쉽지만 다음 날 만나야 했다.
“칼 린드버그.”
역시 대답이 없다, 자는 모양이다.
피곤할 만도 하지.
아드리안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돌리는 그때, 칼의 방문에서 박박 긁히는 소리가 났다.
“끼이잉,”
“엘리자벳?”
칼 왕자의 개가 박박 문을 긁으며 문틈 사이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