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70)화 (70/150)

“칼!”

아드리안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엘리자벳이 물에 흠뻑 젖은 채 끼잉 끼이잉, 하고 울었다.

“네 주인 어디 있어?”

“왕!”

엘리자벳은 호들갑을 떨다 욕실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아드리안은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욕실로 따라 들어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욕조가 피범벅이었다.

아드리안의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넘어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붉게 물든 욕조 한가운데 칼이 동동 떠 있었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 하고 소리치며 욕조로 들어갔다.

“칼!”

“왕!”

다행인 건 얼굴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거지만 반대로 몸은 축 처져 있다.

아드리안은 물 온도를 가늠해 보았다.

물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떨어져 있던 건 고작 1시간 남짓인데, 그사이에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행복하다고 느낀 게 아득할 정도로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어 아드리안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으응?”

아드리안이 뭐든 하려고 폼을 잡는 데 칼이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였다.

“아이고, 우리 황태자 전하 아니세요? 여긴 어쩐 일로.”

“너!”

느릿하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칼 린드버그가 물었고 아드리안은 속에서 왈칵 올라오는 무언가 때문에 소리를 질렀다.

욕실이 쩌렁 울리자 밖에서 경비병들이 들어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은 커다란 타월로 급히 왕자의 알몸을 가린 뒤 밖을 향해 소리쳤다.

“괜찮아, 나가도 좋다. 하나 혹시 모르니 의원을 대기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엥, 의원? 누가 아파여? 아프면 내가.”

꿈지럭거리며 벗어나려는 칼을 꼭 붙들고 주변을 살핀 아드리안은 욕조에 떠 있는 와인 병을 발견했다. 그제야 칼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크게 한숨을 쉰 아드리안이 칼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끼이잉.”

“너도 몸을 닦아야지.”

아드리안은 설렁줄을 당겼다.

침실 담당 시녀인 에이레네는 커다란 수건을 여러 장 들고 오라는 황태자의 명령에, 드디어 깊은 밤을 보내시려나 하고 들어왔다가 엉망이 된 욕실을 보며 기함했다.

“어맛.”

욕조에 담긴 붉은 물은 둘째치고 그 물방울이 사방에 튀어서 살인 사건의 현장 같기도 했다.

“와인을 쏟아 그렇다.”

“아, 와인이어요? 다행입니다.”

에이레네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욕실을 정리하고 나갔다.

아드리안은 연신 몸을 털어 대는 엘리자벳에게 수건을 던져 주고 칼의 몸을 꼼꼼히 닦아 내기 시작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칼이 눈을 부릅뜨려고 노력하며 말했고 그 때문에 쌍꺼풀이 짙게 생겼다.

“무슨 소리야?”

아드리안이 입을 내밀었다.

이렇게 걱정을 시키다니. 다신 술을 먹게 하지 않을 거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 몸을 다까, 아니 따까. 닦아 주시니 황송하지요.”

말이 제 마음대로 안 나와 심통이 난 듯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칼의 입술이 물기에 오글오글 부르텄다.

“갑자기 왜 술을 마셨어? 같이 마시든가.”

“아아니, 드러왔는데, 와인이 딱 있자나? 제가요. 원래 그르케 술이 약하지 않그던여?”

칼이 갑자기 버둥거리며 일어났다.

어찌나 거센지 아드리안도 밀려나고 수건도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서?”

달빛에 하얀 나신이 반사되는 걸 보며 침을 꼴깍 삼킨 아드리안은 〈두 겹의 담요〉가 제대로 발동하는지 확인하며 내버려 두기로 했다.

칼은 척척 테이블로 다가가 양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술이 있자나?”

“지금은 없어.”

“아,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술 취한 칼의 화법은 어딘가 이상했다.

“하여간 있었는데, 딱 봐도 비싸 보이잖아. 그래서 기분도 낼 겸 반신욕을 하면서어 마시기로 결정했쥐.”

반신욕이 아니라 전신욕을 하셨다.

그것도 온몸으로 와인을 마시면서.

칼의 황금색 머리카락의 끝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알았으니 이리 와, 마저 닦게.”

칼은 냉큼 아드리안의 무릎에 앉았다.

“그래서 술을 마시려고 하는데, 망할. 이 몸이 술이 너무, 너어어무 약한 거야.”

당연하지 처음이니까.

칼 린드버그가 왕국에 있을 때도 술을 마셨다는 보고는 없었다.

아드리안은 그게 무슨 말이든 그냥 넘기려고 했다.

“다시는 마시지 마, 아니. 나 있는 데서만 마셔. 욕실에서 마시는 것도 금지야.”

머리에 수건을 덮고 문지르자 가는 모가 금방 복슬복슬 올라왔다.

“떽! 어디 형아가 말하는데. 내가 소싯적엔 소주를 두세 병을 마셔도 괜찮았다고!”

칼이 검지를 아드리안의 입술에 대고 꾹 눌렀다.

확 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아드리안은 “소주가 뭔데?” 하고 물었다.

린드버그의 전통주가 그런 이름이었던가.

“아아니, 있어. 너랑 똑같은 초록 병.”

내가 초록 병이라고?

근본 없는 비유에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헤벌리자 칼이 돌연 입을 맞췄다.

키스가 아니라 쪼는 듯한 입맞춤이다.

“어이구, 잘생긴 우리 황태자 전하.”

그리 말하며 코에도 입을 맞춘다.

“하아.”

아드리안은 눈치도 없이 달아오르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부드러운 칼의 살결을 만끽했다.

“잘생기고 완벽한 내 최애.”

이번에는 이마에 쪽쪽 하고 입을 맞췄다.

“‘최애’는 뭔데?”

생소한 단어에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칼이 이마를 꾹꾹 눌러 주름을 폈다.

“최애 몰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내가 네 ‘최애’야?”

아드리안은 흐뭇하게 웃다가 칼을 와락 끌어안았지만, 이내 칼이 읇조리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어, 원래 재영이 최애였는데, 지금은 내 최애가 됐어.”

“‘재영’이가 누군데? 원래 그 사람이 네 ‘최애’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칼이 아드리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아니면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술 냄새와 페로몬 향기가 범벅된 달콤한 숨이 아드리안의 목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재영’이 누구야?

아드리안은 묻고 싶었지만 천천히 감기는 칼의 눈꺼풀을 보고는 그냥 그를 고쳐 안을 뿐이었다.

잠시 뒤, 색색 소리를 내기에 칼이 잠들었다고 생각해서 그를 조심스레 내려놓는데 칼의 입술이 열렸다.

“재영이, 내 동생. 불쌍한, 내 여동생. 엄마 아빠 얼굴도 모르고 아프면 병원 데려갈 줄도 몰랐던 어린 오빠 밑에서 고생만 더럽게 하다가, 죽어 버린, 내 유일한 가족.”

아드리안은 숨을 멈췄다.

칼은 아드리안의 옷깃을 꾹 잡고 놓지 않았다.

“흐으윽, 재영아.”

방 안이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칼의 눈꼬리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가 베갯잇을 적시며 떨어져 내렸다.

“재영아, 미안해…….”

형체도 없는 누군가에게 연신 사과하면서도 아드리안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모습이다.

한참을 같은 자세로 멈춰 있던 아드리안은 칼의 흐느낌이 조금씩 멎을 때쯤 움직였다.

한쪽 팔을 칼의 목 아래 밀어 넣고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잠든 칼의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를 덧그리며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그게 네가 감추고 있는 진실인가.”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대답하듯 입술을 오물거렸고 아드리안은 그 입술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드리안은 지금까지 일부러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 줄 일이고, 알려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골을 만드는 것보다 가까워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벨프리의 의심처럼,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아드리안을 만났든 간에 모두 불식시킬 자신이 있어서였다.

“엘리자벳, 너는 진작 들었나?”

침대에 올라오고 싶어서인지 앞발을 걸친 엘리자벳이 작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함구해. 다른 녀석들은 절대 알 수 없도록.”

왕, 하고 작게 짖은 엘리자벳은 침대에 올라오는 대신 그 아래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어찌 된 일인진 묻지 않을 테니, 네 비밀을 공유한 내게 좀 더 가까이 와 줬으면.”

아드리안이 중얼거리면서 칼의 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 위로 한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빈틈없이 엉겨 붙은 둘은 추울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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