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다음 날 오후에 레아 린드버그, 칼 린드버그, 아드리안 헤네켄, 그리고 벨프리 헨드릭을 전부 불렀다.
“린드버그로 다 같이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아드리안을 제외하고 모두 놀랐다.
특히 칼 린드버그가 가장 놀랐다.
레아를 홀로 린드버그의 공왕으로 앉히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글렌이 먼저 따라가서 도우라고 명령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거기다 황태자랑 그 측근까지 끼워서 말이다.
“뭐가 이상해? 린드버그는 이제 국제적으로도 헤네켄의 속국이 되었다. 공국으로 독립을 한다곤 하지만 누구도 린드버그와 헤네켄을 나누어 생각할 수 없게 되었지.”
글렌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어제 파르만에서 이상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헤네켄의 국경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무엇인가 린드버그로 넘어간 것 같아. 문제는 그게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 신경이 쓰이는구나.”
“사람이 아니라뇨?”
벨프리가 물었다.
귀신이라도 넘어갔다는 말인가, 하고 칼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글렌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지도를 열었다.
“사람이 아니라 한 무리의 짐승이 미바리 숲으로 들어간 걸로 추정된다.”
“짐승이라면, 마수 말입니까?”
레아가 묻자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바리 숲은 원래도 마물의 이동이 잦은 곳입니다만.”
현대 마법의 근간이 되는 마정석, 순도 높은 마정석이 많은 곳은 필연적으로 마물의 숫자도 많았다.
칼 린드버그도 그것까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마수란 신에게 버림받아 생태계에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군집을 이루나 마력과 비슷한 코어를 지니고 있어 인간이 다루기 어려운 생물을 일컬었다.
짐승의 사체와 자연스러운 지각변동이 석유를 만들어 내듯, 마수의 사체는 자연의 원소들과 융합하여 마정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모두가 마수를 위험한 존재라 인식하면서도 섣불리 개체 수를 줄이지 않는 이유였다.
필요 불가결의 존재랄까.
레아의 말대로 모추산맥을 빙 둘러 있는 대륙에서 가장 큰 숲은 마수들이 많이 서식하기로 유명하고 그 때문에 모추산맥은 양질의 마정석을 대량 품을 수 있었다.
모추산맥은 지리적으로 린드버그에 쏠려 있어 태곳적부터 린드버그의 영토로 잠정적 인정되어 왔지만 사실은 꽤 많은 나라들이 국경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아드리안이 말했듯, 마정석을 채굴하려면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특히 가장 많은 마정석이 매장되어 있는 산맥의 머리 부분이 린드버그에 있으니, 아무리 순도 높다고 해도 마정석 몇 덩이 얻겠다고 고급장비와 고급인력을 투자하기는 힘들었다.
“파르만은 유일하게 모추산맥이 줄기를 뻗지 않고 있는 곳이야. 그런 파르만에서 대량의 마력이 한 번에 움직였다면 그건 일부러 보냈다는 뜻이지.”
글렌이 손을 뻗어 지도에 마력을 흘려 보내자 파르만에서 린드버그 북쪽을 지나 미바리 숲까지 파란 점들이 궤적을 그리며 흘러 들어갔다.
“파르만이 마수를 길들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벨프리가 입을 떡 벌렸다.
마수는 인간을 증오한다, 원래 생겨 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런 마수를 길들이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을 텐데.
“파르만이 국경을 닫은 것이 벌써 수백 년이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중요한 건 조금이긴 해도 어쨌든 움직였다는 것이다.”
글렌이 주먹을 쥐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던 지도가 사라지고 금방 그냥 유리 테이블로 바뀌었다.
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 단 한 번 써 보긴 했지만 아직도 그는 미숙하고, 수식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응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마법 문외한이라 도통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어째서 직접 린드버그로 병사를 보내는 대신 마수를 옮겼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턱을 괸 글렌은 레아에게 말했다.
“레아 린드버그, 공주의 짐이 무겁겠소.”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요.”
레아의 비장한 눈빛에 칼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뭘, 뭘 하면 좋겠습니까? 혜안이 있다면 감히 나눠 달라 청하고 싶습니다.”
글렌은 아드리안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레아 린드버그, 자네는 공왕으로서의 자질은 이미 보유하고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지, 그렇지 않소?”
글렌의 말에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질이,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맞습니다.”
“그거면 됐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한 각 분야의 전문학사들을 추려 딸려 보낼 예정이니 잘 배우고, 잘 듣되. 린드버그의 현 상황과 퍽 어울리지 않거든 언제든 의논하길 바라.”
뜻밖의 선물과도 같은 글렌의 호의에 레아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내부를 정비하는 동안, 칼 린드버그 왕자. 그대는 수식을 계속 연구해 주게, 벨프리가 그 점에서는 도움이 될 거야. 마력은 없지만 해박하니.”
벨프리가 화들짝 놀라고 아드리안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이상하게 벨프리를 신경 쓰는 칼이 못마땅한데 아비가 작정하고 벨프리를 붙여 놓으려고 하니.
그러나 불만은 말하기도 전에 글렌에게 눈빛으로 묵살당했다.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 너는 가서 외부의 적을 처단해라.”
“예? 그건 곤란합니다.”
반론을 제기한 건 아드리안이 아니라 칼 린드버그였다.
칼이 저도 모르게 나간 말에 입을 합, 다물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글렌도, 레아도, 아드리안도 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뭐가 곤란하지?”
“아, 저. 제국의 황태자를 직접 전투에 내모는 것은…….”
외부의 적을 처단하라는 건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뛰라는 소리였다.
칼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황태자를 공국의 검으로 쓰라니?
“황태자를 얕잡아 보지 말거라, 칼 린드버그. 마법도 검술도 이 제국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실력자야.”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깨무는 칼에게 글렌이 엄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드리안이 거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왜, 대 헤네켄 제국에 누가 될까 그러느냐?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황태자가 다쳐도 린드버그의 명예를 실추시키진 않을 테니.”
글렌 황제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벨프리는 황제가 하는 말이 어폐가 있다 생각했다. 황태자가 다치면 명예가 실추되는 건 린드버그가 아니라 헤네켄이었다. 황태자 개인에게는 패배자의 꼬리표가 붙을 거고 이는 그를 린드버그로 내몬 황실 명예의 실추였는데.
왜 저런 소리를 하시는지.
아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칼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멍석을 깔아 주는 것이 고마웠다.
파르만이 무슨 일을 꾸미든, 린드버그에 해가 간다면 그건 칼 린드버그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고 아드리안은 그 때문에라도 직접 나서고 싶었다.
칼을 괴롭히는 번다한 것들은 전부 제거하고 결혼을 할 무렵엔 아드리안과 칼 사이에는 거칠 것이 없도록 말이다.
레아 린드버그가 무사히 공왕이 되고 린드버그가 비로소 공국으로 안정을 찾을 때야 칼 린드버그도 오롯이 아드리안에게만 집중해 줄 것이다.
그러나 칼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