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왕자는 그럼 어떻게 하고 싶으냐.”
“……차라리 제가 나서겠습니다. 혹시 싸울 일이 있다면.”
뜻밖의 말에 글렌이 오호라 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드리안의 눈초리는 대번에 뾰족해졌다.
칼은 한쪽 팔로 반대쪽 팔을 쓰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군대도 다녀왔으니 전술에 대해 아주 무지하지도 않았다.
죽기 직전엔 생사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구급대원이었으니 체력만 어찌어찌 길러 놓으면 아주 쓸모없는 인재는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다.
“가능하면 전쟁은 없어야 하겠지만, 해야 한다면 그 선봉에 서는 것은 아드리안보다 제가 낫지 않습니까?”
“네가? 마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면서?”
글렌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 일축했지만 내심 칼이 더 졸라 주길 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이 벌컥 성을 내려던 걸 칼이 저지했다.
“경험이 없는 것은 아드리안이나 저나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단 한 번뿐이긴 했지만 마법을 쓰는 건 요령을 익히면 될 문제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흐응, 콧소리를 내며 글렌이 턱을 받치고 계속해 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어차피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잖아요.”
칼이 이를 악물었다.
아드리안은 스물한 살 팔팔한 청년이었고 이 세상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를 끌어들여 원작을 망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칼 린드버그가 움직여서 생겨난 일. 그러니 마무리도 자신이 지어야만 했다.
아드리안과 결혼 약속을 하면서 제 역할이 끝나는 것은 싫었다.
모든 것을 레아와 아드리안에게 미룬 주제에 뒤에서 홀로 죽음을 피했다고 좋아할 만큼 염치없는 인물로 남아 있기도 싫었다.
게다가 더 큰 이유는…….
“린드버그의 명예와 상관없이, 저는 아드리안이 다치는 것이 싫습니다.”
이거다.
아드리안이 지금껏 칼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칼 린드버그에게도 아드리안이 없는 인생 전개는 이제 있을 수 없는데, 그를 전장으로 내몰고 나면 그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 그래서 이제 막 약혼한 아드리안을 두고 대신 전쟁에 뛰어들겠다?”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칼이 비장하게 말했고 글렌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드리안은 칼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다치는 것이 싫으면 아드리안은 칼이 다치는 걸 두고 보라는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 무모한지.
경험이 없는 것이 똑같다고?
매일 검을 휘두르는 저와 체력단련으로 고작 달리기 따위를 하는 그가 같단 말인가.
“안 됩니다. 폐하.”
벨프리가 황급히 글렌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는 분노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칼 린드버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글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빙글거리며 웃고만 있어 불안해진 벨프리가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섰다.
머리를 굴려서, 좀 더 조리 있게 상황을 정리해 칼 린드버그를 설득해야 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 다른 사람을…….”
“그건 당연한 거고.”
간신히 쥐어 짜낸 벨프리의 말을 글렌이 싹둑 잘랐다.
“예?”
아드리안도, 칼도, 벨프리도, 레아까지 맹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글렌이 긴장을 풀라는 듯 테이블을 두드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너희가 지금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성년이 되었다 뿐이지 어른이라기에는 미숙한 존재이다. 정치와 쟁투에는 더욱 미숙하지. 설마하니 내가 아드리안을 선봉으로 내세울까.”
“예에?”
‘아까는 외부의 적을 처단하라고 하셨잖아요.’
칼이 큰 소리로 어리둥절함을 표했고 벨프리는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전하의 지위가 지위인데…….”
글렌은 아이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얘들아…….”
아주 어릴 때나 들었던 친근한 부름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을 구태여 이 시기에 린드버그로 보내는 건, 앞으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야.”
“해결이 아니라 발판입니까?”
아드리안이 묻자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해결, 그리고 그것을 통한 배움으로 앞으로 나아갈 발판으로 삼으라는 게지.”
글렌은 레아 린드버그를 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제자리에 못이 박힌 채로 서 있었다.
“레아 린드버그, 그대는 장차 한 나라의 지도자로 지위를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건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야. 누구에게나 공정한 심판을 내리며 나라를 위한 일이 뭔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 봐야 하지. 하지만 고작 책으로 배운 지식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다음으로는 칼 린드버그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과의 약혼이 곧 이 제국의 황후가 되는 길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지, 최근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한 수레인 자네니까, 린드버그에서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 차근히 배우며 마법 수식을 연구해 보거라. 그것은 헤네켄뿐만 아니라 린드버그에도 좋은 발전을 가져다줄 거야. 그리고 새 공왕을 도와 린드버그가 더 이상 헤네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곳으로 만들어 봐. 레아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린드버그를 외면할 베짱이 네게는 없으니까.”
칼이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속을 간파당하는 글렌의 혜안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벨프리 헨드릭, 헤네켄을 떠나 다양한 경험을 쌓아라. 너도 황족의 자제들 못지않은 온실 속 화초이니, 그 빈약한 경험으로는 사고의 폭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주군의 시야가 좁아도 간언하는 신하의 시야는 넓어야 하느니.”
글렌도 아드리안과 마찬가지로 태평성대에 태어나 황성을 벗어나질 못했다.
그런 글렌의 옆을 보좌하는 버번 백작이나, 헨드릭 공작. 그리고 동생인 발베니 대공의 넓은 식견은 늘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황제는 그런 자리라고 글렌은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아드리안 헤네켄, 너도 마찬가지야. 황태자로서 견문을 넓히고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경험을 해 보거라. 그리고, 자신의 반려를 지키는 법도 터득하고. 그게 무턱대고 목숨을 걸라는 것이 아니다. 칼 린드버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보라는 말이야.”
그제야 아드리안은 아비의 의중을 파악했다.
글렌은 손바닥을 짝 쳤다.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는 황제는 아이들이 안심하길 바랐다.
“유수의 인재들이 함께할 것이다. 다들 노련하고 신임이 두터운 자들이며 신의를 아는 사람들이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빠르게 상담하거라. 이 아비는 여기서 너희들이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올지 기대하며 기다릴 테니.”
글렌은 특히 칼 린드버그를 보며 덧붙였다.
“또 헤네켄의 도움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거라, 너희들의 미래는 전부 여기 저당 잡혀 있어. 나는 좋은 투자를 한 셈이야.”
“……감사합니다.”
레아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칼도 따라 넙죽 인사를 했다.
칼은 글렌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황제 같았다.
동시에 존경스러웠다.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존재만으로도 강한 황제. 그를 닮은 군주가 되고 싶었다.
벨프리는 헨드릭 공작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궁금했고 아드리안은 어쩐지 벅차는 마음에 칼의 손을 잡았다.
둘이 함께 성장하는 것. 아드리안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발군의 인재들이면 뭐 하냐? 아직도 어른들 앞에서는 삑삑 우는 병아리 같은걸. 어디서 걸출한 노장들 두고 저들끼리 나서려고 해.”
코끝을 긁적인 글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아, 병아리 같은 내 황후 보러 가야겠다. 내일부턴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어 두어라.”
진짜 이상하고 멋있는 아저씨.
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드리안이 아니라 글렌 헤네켄이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멋있었다.
그리고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드리안을 보며 글렌을 꼭 닮은 그가 나중에 어떤 황제가 될지 심히 궁금했다.
폭풍 전야 같은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