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없는 황제의 집무실에 더 머물러 있을 순 없었다.
반쯤 떠밀리듯 집무실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긴장으로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서 이만…….”
레아가 먼저 떠나고 우물쭈물하던 벨프리는 할 일이 산더미라며 종종걸음으로 함께 사라졌다.
칼은 황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너희 아버지, 진짜 멋진 사람이다.”
아드리안은 가감 없이 솔직한 감상을 뱉어내는 칼의 손을 꼭 쥐었다.
“두고 봐, 내가 아버지 나이쯤 되면 더 멋있어질 테니까.”
“완전 기대되는데?”
황제가 건재하여 아드리안이 황제가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칼은 아드리안이 그 자리에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앗차, 나 어제 뭐 실수하지 않았어?”
나란히 회랑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칼이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실수? 무슨 실수?”
멈칫하는 아드리안을 보며 칼은 ‘내가 진짜 뭔가 저질렀구나!’ 하고 생각했다.
칼 린드버그가 기억하는 어젯밤은 몸을 데우며 두 번째 와인 잔을 채우는 것이 마지막으로, 눈을 뜨니 자신을 이불로 감싸고 통째로 끌어안고 잠든 아드리안을 본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분명 문 앞에서 잘 배웅했는데 무슨 영문으로 그가 방에 돌아왔는지를 모르겠다.
사방에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남아 있고 아드리안은 잠에서 깬 뒤 별말 없이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마르코가 ‘에이레네 누나한테 들었는데, 왕자님 어제 욕조에 술을 다 쏟아 놓으셨다면서요.’ 하면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칼이 떨어뜨린 포크를 주워 주며 마르코는 ‘때맞춰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왕자님은 욕조에 빠져 죽은 최초의 예비 황태자비가 될 뻔했다’고 덧붙였다.
“내가 원래 분위기를 좀 타서 어젠 술이 마시고 싶더라고, 많이는 안 마셨어. 그냥 포도주 한 잔? 아니 두 잔 정도 마셨을 뿐인데 그런 큰 실수를 하게 될 줄 몰랐어. 미안.”
아침처럼 아드리안이 말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만 보자 제 발 저린 칼 린드버그가 황급히 사과부터 꺼냈다.
에이레네의 말에 따르면 욕실이 술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칼은 눈을 질근 감았다.
내 평생에 주사로 누군가에게 사과를 다 하게 될 줄이야.
“혹시 엄청 꼴사나운 모습 보여준 거 아닌가 몰라.”
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다시는 네가 나 없는 곳에서 술을 먹지 않기를 바랐지.”
“헉, 그 정도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칼은 제 뇌를 탈탈 털어 어제의 기억을 뱉어 내라고 하고 싶었다.
아드리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으면 칼이 울던 것이 생각나 가슴이 지끈거렸다.
〈재영아.〉
〈보고 싶어.〉
〈불쌍한 내 동생.〉
얼굴도 모르는 ‘진짜’ 칼 린드버그의 여동생을 질투하고 세상 모르게 잠든 칼의 가슴을 도닥이며 시린 가슴을 달랬다.
“어쨌는데? 제대로 말해 줘.”
술김이라 해도 저 국보급 얼굴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테니, 코를 골았나. 이를 갈았나. 혹시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나. 하며 칼 린드버그는 무릎을 꿇을 각오를 다졌다.
안 그래도 칼 린드버그의 일거수일투족, 말 하나에 신경을 쓰는 아드리안이 이 정도로 말을 아끼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척척척 앞으로 간 아드리안은 자신의 연구실 앞에 도착하자 빙글 돌아 칼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게, 사실은.”
꿀꺽, 칼이 침을 삼켰다.
좀처럼 머뭇거리는 법이 없는 아드리안이 이렇게까지 말을 아끼다니.
“그게…….”
“뜨, 뜸 들이지 말고.”
칼에게 고개를 바짝 들이댄 아드리안은 칼의 양손을 잡아 제 뺨에 댔다.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 가 아니고.”
“아드리안, 네가 너무 좋아서 힘들어.”
“뭐?”
갑자기 자화자찬을 하는 아드리안을 보며 칼이 질겁하며 손을 뺐다.
그러나 단단히 잡힌 손은 빠지지 않았다.
“네가 어제 취해서 그러더라.”
뭐?
당황한 칼이 아드리안의 눈을 피했다.
“나처럼 완벽한 남자랑 약혼을 하게 돼서 행복하다고 알몸으로 춤을 추고 그러더라고.”
“……진짜?”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 린드버그의 얼굴이 팔팔 끓는 물 주전자처럼 변했다.
분명 술 마시기 직전까지 아드리안이 생각보다 더 괜찮은 남자라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주접을 떨었다니.
“그게 다야. 남 앞에서 보여 주기는 민망한 꼴이지?”
마치 어젯밤을 다시 상기시키듯 히죽 웃은 아드리안은 칼의 손을 놓고 문을 열었다.
아주 민망하네.
최악이야, 고백도 제대로 안 하고 끌려가듯 약혼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그런.
“진짜 당황스러웠겠다.”
“엄청 당황스러웠어, 그러니까 칼 린드버그, 당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술 마시지 마.”
칼이 그럴 리 없다고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히 그랬을 거라 인정하는 모습에 아드리안은 기뻐하려는 마음을 숨겼다.
“알았어?”
“어, 알았어. 내가 또 그렇게 취하면 사람 아니고 엘리자벳 할게.”
확답을 요구하는 아드리안에게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당분간 어제 칼의 모습은 묻어 두기로 했다.
칼 린드버그의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었지만, 당사자가 마음이 동해서 직접 알려 준다면 모를까 아드리안이 캐낼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다 털어 내고 칼 린드버그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볼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만 바랐다.
* * *
“린드버그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마르코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푹신한 러그에 배를 대고 엎드려 마법 수식 도감 제본판에 잔뜩 무언가를 적어 가던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지, 뭐. 돌 고르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척박한 땅인데 레아, 아니 누님 혼자 보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
마법 수식을 정리하는 것은 의외로 오래 걸렸다. 아는 단어를 전부 끄집어내어 가나다순에 맞춰 정리하고, 품사를 분류하여 대륙 공용어로 다시 번역해야 했다.
“언제 떠나야 하는데요?”
“내일모레.”
“모레요? 헤네켄 제국은 뭐든 번갯불에 땅콩 튀겨 먹듯 하네요.”
5일 만에 약혼식을 준비하질 않나, 이제는 3일 만에 또 린드버그로 돌아가라니. 글렌 황제의 성격이 급해도 너무 급하다고 마르코가 툴툴거렸다.
“오래 지체할수록 좋지 않아서 그래. 빨리 가서 귀족들을 정리하고 누님이 자리를 잡아야 백성들도 편해지지.”
파르만이 린드버그를 기습할지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린 마르코에게 불안만 안겨 줄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마르코는 혈혈단신 헤네켄으로 넘어 올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준비를 해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따듯한, 뜨거운, 뜨끈한, 더운, 온화한. 따위의 단어들을 읊조리던 칼이 제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외국인의 마음이 이럴까.
도감을 뒤적이며 알게 된 것인데, 고대로 향할수록 오히려 수식은 현대 국어와 비슷한 문장이 되었다.
이를테면 ‘아드리안의 방과 연결되는 문’처럼 자연스레 쓰이는 한글은 고대의 것이고 ‘연결하다 문’처럼 어색한 문장은 후대의 사람들이 도감을 보며 수식을 조합한 것이라는 거다.
다행히도 칼 린드버그는 현대 국어에 대해 해박했고 요령만 익힌다면 세상을 망하게 할 마정석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
마치 램프의 요정이 된 것처럼, ‘로또 당첨 확률 백 퍼센트’ 같은 마정석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욕심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칼은 직관적인 수식이 가능한 한 쓰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헤네켄은 선구자일 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많은 국가에서 수식의 비밀을 알게 될 테니까.
수식이 정교할수록 보안에 문제가 생긴다면 연구를 하나 마나다.
“으으…….”
머리를 감싸고 끙끙 앓던 칼 린드버그는 롤 플레잉 기반의 판타지 게임을 떠올렸다.
그 안에 신기하고 기발한 주문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이내 몸을 둥글게 말고 중얼거렸다.
“아니, 게임을 해 봤어야지.”
지독하게 재미없고, 창의적이지 못했던 전생이 이렇게 발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