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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74)화 (74/150)

헨드릭 가는 때 아닌 초상집 분위기에 휩싸였다.

금쪽같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막내아들이, 갑자기 린드버그의 척사-拓士-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상집 분위기를 내는 건 두 형들 뿐이고 공작이나 대공은 별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말이다.

“아버지께서 폐하께 말씀 올려 주시면 안 됩니까?”

동생이 린드버그로 가야 한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주니퍼가 헨드릭 공작에게 말했다.

“검도 못 쓰는 애가, 전시나 다름없는 곳에 간다니요.”

제드도 아비를 졸랐다.

알파로 태어나 기골도 정신력도 남다른 형들 아래, 집안의 유일한 베타인 벨프리는 언제나 과보호의 대상이었다.

‘형아, 형아.’ 하는 어렸던 막냇동생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가능하면 결혼하기 전까지 끌어안고 살 예정이기도 했다.

발베니 대공을 불편해해서 그가 돌아와 있을 때는 본가에 얼씬도 하지 않던 아들들이 벨프리의 출국 소식에 득달같이 돌아오는 걸 보며 혀를 찬 헨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정 난 부분이고 본인도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해,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린드버그가 안정을 찾는 대로 돌아올 테니 유난 떨지 말거라.”

“아버지.”

장남 주니퍼가 비협조적인 아비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당분간이라 해도 안 될 말이었다.

“벨프리가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레아 린드버그나, 칼 린드버그는 자국의 일이니 나서고 아드리안 전하는 약혼자시니 좀 도울 수도 있다 치지만, 그 애가 무슨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니퍼의 말에 제드는 공감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밥이 없으면 염소처럼 책을 뜯어 먹고 살 것 같은 벨프리가 누가 봐도 육식파인 아드리안 옆에서 스무 해 가까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못마땅한데, 게다가 레아 린드버그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늘하늘한 외모에 속으면 곤란할 만큼 강한 알파였다. 그쪽도 방심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말려야 한다고 앞다퉈 말하는 아들들에게 한 소리 하려던 헨드릭을 막아선 것은 발베니 대공이었다.

“아비를 괴롭히지 마. 그리고 벨프리를 우습게 보지도 말고.”

똑같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동색의 눈을 가진 아들들 중에서도 특별히 헨드릭 공작과 닮은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발베니 대공은 푹신한 소파 위에 앉은 헨드릭 공작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폐하께서 다 뜻이 있으니 가라고 하신 거다. 그렇게 졸라도 네 아비의 주름만 깊어진다. 아비라고 어디 마음이 편한 줄 아느냐?”

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어이 헨드릭 공작의 손에 뜨거운 차를 쥐여 준 발베니 대공은 아들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밖에 나가면 앞다퉈 데려가려는 일등 신랑감인데 대공 앞에서만 작아지는 장남과 차남은 입술을 삐죽이며 공작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딱히 괴롭힌 것도 아닌데…….”

헨드릭이 작게 항변하다 발베니에게 입술이 막혔다.

주니퍼와 제드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발베니는 신경 쓰지 않고 헨드릭의 입술을 탐했다.

한참을 쪽쪽 거리고 나서야 헨드릭을 놓아준 발베니는 헨드릭을 꼭 끌어안았다.

대공은 황제랑 피도 안 섞인, 따지자면 남인데 어쩜 저렇게 똑같은지. 우성이 다 그런 건지. 두 형제는 칼 린드버그의 미래에 미리 명복을 빌었다.

발베니가 헨드릭을 끌어안은 채로 아들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 아비를 넘어설 책사가 되어야 할 벨프리에겐 새로운 경험이 필요해. 황제 폐하께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번 린드버그행을 결정하셨다. 그 뜻을 벨프리도 잘 아니 별말 없이 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게지.”

“하지만 꿍꿍이가 있는 파르만의 행보가 심히 걱정됩니다.”

황제의 등을 지키는 제1 기사단의 젊은 단장인 주니퍼 헨드릭에게도 마수 한 무리가 파르만에서 미바리숲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은 들렸다.

“아마 마정석 때문일 거야.”

“마정석이요?”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파르만에서는 자체적으로 마정석을 생산해 내고 있었을 거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외부와 거래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해진 거야. 그러니 키치너와 결탁해서 그의 반란을 돕는 대신 모추산맥의 마정석을 먹어 치울 셈이겠지.”

발베니의 말에 아들들이 놀라움을 감추질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 병사가 아닌 마수를 보냈을까요? 공식적으로 왕위가 비어 있는 지금이 린드버그를 치기 좋은 상태 아닙니까?”

제드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수가 아니라 기수-騎手-를 보냈을 거야.”

“기수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는 제드 대신 주니퍼의 언성이 높아졌다.

“설마, 마물을 길들여 타고 다닌다는 말씀입니까?”

발베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를 길들이는 일은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엄청난 힘이 되지, 파르만은 오래 그 일에 매달렸을 거고 아마도 매개체는 마정석일 거다. 이제 쓸 만해지니 더 많은 마정석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야.”

헨드릭 공작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인 듯 주니퍼에게 설명을 더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입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발베니의 추론은 늘 사실에 가까웠다.

발베니 상단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대륙에도 대륙 밖에도 파르만 왕국밖에 없었다.

“파르만에서 기다리는 건 레아 린드버그의 복위다. 이미 채굴권이 제국에 들어와 있는 이상 지금 린드버그를 쳐 봐야 껍데기만 가져가는 꼴이니.”

“국제적으로 반발이 심할 텐데요?”

헨드릭의 말에 주니퍼가 묻자 발베니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디 전쟁광께서 그런 것을 신경이나 쓰겠냐? 자신이 있으니 과시하려는 셈이겠지, 레아 린드버그가 죽고 난 뒤에는 옥새의 행방과 더불어 헤네켄이 마정석 채굴권을 가져간 경위를 문제 삼을지도 몰라. 그때쯤 되면 모추산맥을 노리는 다른 국가들도 제국을 물고 뜯으려고 하겠지. 파르만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할 테고.”

생각보다 더 커지는 문제에 제드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저희가 먼저 파르만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과 대공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러기엔 명분이 부족해서 말이야. 황제 폐하께서 직접 덫을 놓을 생각이셔.”

“예?”

어리둥절한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헨드릭이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키치너와 파르만이 합작해 놓은 덫에 달콤한 치즈를 올려 둘 생각이시지.”

답답해진 아들들은 자세히 설명해 달라 아우성을 쳤지만 발베니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이후로는 아직도 논의 중이니 너희들에게 알릴 만한 일은 아니다.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때가 되면 가장 먼저 차출될 테니까.”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암시에 두 아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애들은 걱정이 너무 많아. 다 잘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제국이 괜히 제국인 줄 아느냐? 그렇지 않소? 내 사랑.”

심각해진 아들들을 두고도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운 발베니는 헨드릭에게 입을 맞추며 담요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스물 몇 해 전에 만들어 둔 잇자국을 더듬었다.

“애들 앞에서 이런 것 좀 그만해.”

나잇살 먹어 주책이라 욕먹는다고 헨드릭이 속삭이자 발베니는 삐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나이를 먹는다고 사랑이 바랩니까? 혹시 그대는 그렇소?”

“아니, 누가 사랑이 바랬다고.”

발베니에 대한 사랑이 식은 적 없는 헨드릭은 작게 혀를 찼다.

결국 한숨을 푹 쉰 주니퍼가 아버지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한두 번도 아니고 두 분이 여전하니 보기 좋습니다.”

“더, 더 하십시오.”

이쯤에서 대공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줘야 헨드릭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될 거다.

눈치 빠른 아들들에게 헨드릭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여하간,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너희들은 벨프리에게 떠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 그래야 그 애도 마음 편히 떠날 테니.”

두 아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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