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75)화 (75/150)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람과 돈이다.

사람을 모으는 것은 신전에서 도맡아 했다.

단 이틀 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원했다.

애초에 린드버그와 헤네켄이 한 여신을 같이 섬기기도 했고, 그 때문에 신심이 깊은 사람들 중에서는 린드버그에 호의적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괜찮은 인재를 추리는 것은 황성에서 이루어졌다.

황성과 제후들을 중심으로 논의 중인 정치와 국방을 제외하고, 건축, 교육, 문화 각 부문에서 인재가 선발되었다. 차후 필요한 인력은 린드버그의 백성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며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황제는 제후들과 협의하여 예비 예산의 백분의 일 정도를 린드버그 공국에 할당하기로 결정했다.

발베니 대상단에서도 상당히 많은 금액을 출자했으며 추후 인력의 제공과 통행세의 감면으로 돌려받겠다고 말해 레아 린드버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린드버그 공국 재건하기 프로젝트에서 ‘마법 수식 연구’를 맡은 칼 린드버그는 쥐가 나는 머리를 정리할 겸 엘리자벳과 황성의 겨울 정원을 만끽하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왕!”

모처럼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엘리자벳이 신이 났는지 칼 린드버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펄쩍거리다 저만치 달려 나갔다.

칼은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꼬리를 바라보다 씩 웃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와 단 하루도 마음이 진정됐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지금 그의 두근거림은 결이 다른 것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그 반의반도 하지 못할 것들이다.

어젯밤에는 문득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주인공들에게 중요한 사건은 다 떠넘기고 빵집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그의 오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칼 린드버그가 악역을 내려놓고 아드리안과 접촉한 시점에 벨프리와 아드리안의 연결고리 하나가 사라졌다.

만약 아드리안이 칼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칼은 애먼 곳에서 애먼 놈에게 애먼 일을 당하고, 아드리안은 짝 없는 알파로 인생을 마감했겠지.

키치너가 몸을 숨기면서 파르만과의 전쟁이 유발되는 것도 그 나비효과일지 몰랐다.

서걱거리며 흩어지는 흙을 밟아 엘리자벳의 뒤를 따르며 칼 린드버그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애초에 소설 내용도 잘 모르는 주제에, 소설 밖에서 온 사람이라 어찌어찌 잘 풀리겠지 하고 대충 안일하게 생각한 것부터 오만의 끝판왕이다.

시점을 달리하면 누구에게나 그만의 서사가 있다.

주인공들의 연애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사소한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 어찌나 무책임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아드리안도, 조리장도, 마르코도 다 잘했다고 말하지만 칼 린드버그 스스로는 때로 이불을 걷어찰 만큼 부끄러웠다.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라더니,”

글렌 황제의 말처럼 스물한 살의 칼 린드버그나 스물여덟의 전우영이나 똑같은 애송이었다. 아직도 더 알아 가야 할 것이 많았다.

특히, 아드리안과의 관계는 더욱 그랬다.

아드리안과 칼은 연인이고, 약혼자고, 후에는 부부가 될 테지만. 어쩐지 밋밋한 제 마음 상태가 걸렸다.

아드리안이 잘해 주는 것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스킨십에 응해 주고 가만히 그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걸론 부족한 느낌인데.

아드리안이 칼을 잡아먹고 싶다는 눈으로 볼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달래느라 의연한 척했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을 인간적인 애정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미래가 상상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집념이나 애정에 비하면 제 마음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라고 칼은 생각했다.

자신이 어느새 정원을 넘어 황성 부지 내의 작은 숲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몰두한 칼 린드버그는 조용히 화끈거리는 볼을 잡았다.

‘아주 연애고자 다 됐어.’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사랑, 그거 이렇게 하면 된다, 하고.

전재영이 있었다면 뭐라고 조언했을까.

그 애가 어리긴 해도 남자끼리 연애에, 결혼에, 임신까지 하는 소설을 읽을 정도니 이 분야에선 나보다 박식할 텐데.

‘사랑을 어떻게 하냐고? 너 바보냐? 그냥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진 않을까? 전재영은 나보다 쿨한 데가 있었으니까.

전매특허인 뾰로통한 얼굴도, 날 선 목소리까지 그립다.

칼 린드버그가 차가워진 손바닥을 비비며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보고 싶구나.”

“여기서 뭐 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칼의 상념을 비집고 들어왔다.

* * *

퉁명스러운 말투에 고개를 드니 까무잡잡한 피부에 노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가 저만치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 예언자.”

칼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낮에도 햇빛을 모두 가릴 정도로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 꽤 깔끔하고 작은 집이 하나 뜬금없이 서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 달린 두툼한 겉옷을 입은 예언자 소녀가 그 앞 벤치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칼을 향해 다가왔다.

일찌감치 그곳에서 집 주변 냄새를 맡고 있던 엘리자벳이 루루가 일어나자 칼의 옆으로 득달같이 뛰어왔다.

“쟤는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경계하는 거야?”

서러운 듯 볼을 부풀리는 것도 그날과 똑같았다.

황성에 있어야 할 소녀가 왜 이 으슥한 곳에 홀로 나와 있는 건지.

“혼자야? 그, 시녀는 어딨어?”

말하고 나서 시녀의 이름이 나타샤였다는 것을 기억해 낸 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뭐래, 아무도 안 알려 줬어? 나 성에서 쫓겨났어.”

의외로 담담한 루루의 말에 놀란 건 오히려 칼 린드버그였다.

“뭐? 왜?”

어안이 벙벙한 칼의 얼굴에 루루가 대놓고 비웃었다.

“왜겠어. 너한테 쓸데없는 이야기 했다고 쫓겨났지.”

루루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칼은 자신보다 한 뼘은 작고 여린 소녀의 추위로 물든 뺨을 보며 혀를 찼다.

아드리안이 이 엄동설한에 여자아이를 홀로 쫓아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그 이유가 다야? 네가 나한테 무슨 쓸데없는 이야길 했다고 쫓겨나냐.”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예언자의 입장에서 그녀가 칼 린드버그에게 너는 발목 잡는 존재라고 말한 것은 타당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훌렁 떠나 버린 건 온전히 칼의 잘못이었다.

“동정은 필요 없어.”

루루가 샐쭉하게 말했고 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정이 아니거든?”

칼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루루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애초에 황실 사람도 아니고 잡일 하는 시녀도 아니면서 황성에 사는 게 웃긴 일이야. 원래는 외곽에 집을 구해 준다고 하는 거, 그나마 여기 머무르고 싶다는 고집을 들어준 게 인정을 베푼 셈이지.”

“그렇다고 이렇게 외진 데에다가 너같이 어린 애를 혼자 둔다고? 아드리안 그렇게 안 봤는데.”

불타는 칼의 눈을 본 루루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원래 그런 점이 아드리안 황태자 전하의 매력이거든. 자기 사람 아니면 칼같이 구는 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루루의 얼굴에선 한 점 원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대단한 아드리안 광신도 납셨네.

“그리고 몸이 이래서 그렇지. 어린애 아니야. 매일 나타샤가 왕래하면서 물건도 갖다주고 사는 게 불편한 건 없는지 살펴 줘. 이만하면 호강이지 네가 뭔데 열을 내?”

“쪼끄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야, 추워. 들어가.”

칼 린드버그는 루루의 등을 떠밀었다. 루루는 싫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왜. 밀지 마.”

“감기 걸려. 열이라도 나면 여기서 혼자 어쩌려고 그래?”

루루는 의외로 힘이 세서 두 다리로 버텼다.

“심심해. 종일 집에 있다가 개 짖는 소리에 나와 본 거야.”

그러면서 자기도 개 좋아하는데, 쟤가 날 싫어해서 그렇지. 구경이라도 좀 하겠단다.

“그럼 안에서 구경하든가. 내가 같이 들어갈게.”

루루가 칼의 팔을 탁 뿌리쳤다.

“미쳤어? 네가 아직도 아드리안 전하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너랑 같은 집에 있었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난 그날로 죽어. 그분이 얼마나 질투가 심한지 알아?”

그제야 칼은 멈칫하며 루루의 등에서 손을 거뒀다.

확실히 아드리안은 질투심이 강했다.

아직까지는 그 수위가 상식적인 범위 내라 칼 린드버그는 필사적으로 모른 체했을 뿐이다.

“넌 정말 아드리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구나.”

결국 다시 벤치에 앉은 루루의 옆에 털썩 앉은 칼이 엘리자벳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루루가 그 모습을 몹시도 부러워해 칼은 루루의 손을 붙들어 엘리자벳의 머리에 얹었다.

엘리자벳은 처음에 당황했지만 이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드럽지만 약간 축축한 털을 쓰다듬으며 마음이 풀린 루루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잘 알게 되잖아.”

그런가, 칼 린드버그는 자신이 아드리안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는지 가늠했다.

그는 우성 알파고, 소설 속 주인공이며, 황태자이다.

마력이 넘치고 대체로 다정하며 잘생겼다. 꽤 괜찮은 부모 밑에서 자라 구김도 없었다.

선택적 모태솔로이고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남을 시험하거나 의중을 떠보려는 언행을 하지 않는 것은 칼 린드버그의 연애관과 일치했다.

손가락을 꼽아 가던 칼 린드버그를 물끄러미 보던 루루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최근의 아드리안 전하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

칼 린드버그는 그 때문이라 확신해서 조금 미안해졌다. 

변화하는 미래까지 예지하는 능력까진 없어 보이는 어린 예언자에게 칼 린드버그의 등장은 그녀의 눈을 가리는 안대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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