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아주 복덩이일세, 폐하께서도 얼마나 흡족해하시는지 몰라. 자네도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테니 깍듯이 받들어 모시게. 의외로 자격지심이 있으셔. 자기 자신의 기량을 과소평가하시는 분이니까.〉
버번 백작의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인에다가 극우성에 가까운 오메가라며, 왕자로 린드버그에서 어화둥둥 자란 분이 자격지심은 다 무슨 말인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팔팔하고 영민한 백작도 슬슬 감이 떨어지는 건가 하는 불충한 생각을 하던 제임스는 그다음 다음 날, 마주친 칼 린드버그를 보며 금방 납득했다.
“아, 호가든. 아니 호거든 소백작님.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마수에게서 채취한 마정석을 한 아름 싸 짊어지고 도착한 린드버그 왕성에서 제임스가 뒤통수에 쏘아지는 아드리안 황태자의 눈빛에 땀을 뻘뻘 흘렸다.
불안한 듯 알현실을 어슬렁거리던 칼 린드버그가 제임스가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뛰어와 덥석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직접 해도 모자란 일들인데, 부끄럽게도 맡겨 놓고는 한번 들여다보지도 못했네요.”
헤헤 웃는 칼 린드버그를 따라 웃던 제임스가 다시 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벨프리가 끙, 하고 이마를 짚었으며 아드리안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맞잡은 손을 응시했다.
“한겨울에 땀이 이렇게, 역시 미바리 숲을 경비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제가 마물이나 마수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에 가까운 상태로 일을 벌여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칼 린드버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내밀어 제임스의 이마의 땀을 직접 닦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얼어 있는데, 정작 가장 눈치를 봐야 할 예비 황태자비는 눈치를 팔아먹었다.
거기에는 칼 린드버그의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자신이 따듯한 황성에서 좋은 옷을 입고 연애 놀음을 하는 동안 린드버그 변방에서 한겨울에 고생을 하는 병사들을 잠시 잊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니, 저기, 그것이.”
예비 황태자비의 손을 먼저 뿌리치는 행동을 차마 할 수 없어 망부석처럼 서 있던 제임스는 입꼬리에 경련이 나도록 웃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레아 린드버그나 벨프리 헨드릭은 이미 수십 번 겪은 일이라 익숙하게 무시했고 아드리안은 치솟는 질투심을 누르며 좋은 약혼자를 연기하느라 이를 앙다물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만인에게 호인인 칼 린드버그의 성격도 모두 품을 만큼 마음이 넓은 약혼자로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페로몬은 차마 감출 수 없어서 몇몇 형질자 기사들은 추위에 언 코를 녹이는 척 코를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날카로운 페로몬에 코점막이 다 헐어 버릴지도 몰랐다.
결국 제임스가 급히 손을 거둬 가며 “헤네켄의 기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인걸요.”라고 말했고 칼 린드버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수들이 아주 드세다지요. 그것도 모자라 파르만의 행보까지 주시해야 하니 얼마나 부담스러우셨겠습니까.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알려 주세요.”
칼 린드버그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지원 규모를 설명했다.
“기사가 열둘, 병사가 백 명입니다. 저희는 마법진을 타고 이동했지만 그분들은 직접 국경을 넘어야 해서 내일모레쯤 도착한다고 하고요. 아, 혹시 지내시는 곳이 불편하지는 않을지. 미바리 숲 근방의 마을들을 정비하는 예산이 다른 어떤 예산보다 많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위협을 많이 받을 곳이니까요. 오는 길에 보니, 사람들 표정도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더군요. 이게 다 기사님들 덕입니다. 거기에 기꺼이 자녀를 보내 주신 가족분들께도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본인이 상당히 흥분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가 보면 열렬한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 것이다.
물론 칼 린드버그는 대뜸 파병 길에 올라 가족과 떨어진 병사들의 심정을 헤아려서 더욱 그런 것이었다. 천애 고아라 당연히 면제될 줄 알았던 군대를 삼촌의 일방적인 입양 절차 때문에 갑자기 가게 되었을 때, 어린 재영이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가 말이다.
기사도 병사도 스물 언저리의 젊은이들이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 아무것도 없는 린드버그의 변방에서 직접 피를 보며 견뎌야 하는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당연히 그 사정을 모르는 기사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고된 직무이긴 하지만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까지 안타까워하진 않을 텐데.’
유지니 해협만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사람을 살살 녹이는 것이, 몇 명의 기사들은 벌써 거기에 감동한 듯 눈가가 촉촉해졌다.
“가족분들껜 제가 따로 감사를 표하고, 상황이 안정되면 돌아가며 휴가를 쓰는 것으로 그간의 노고를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는 말에 어린 기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땅바닥에서 지푸라기를 깔고 자는 것도 익숙하지만 대부분 자기 집의 푹신한 침대를 그리워하던 참이었다.
예비 황태자비의 외모가 화려한 탓인지 수수한 차림을 한 그의 털털한 몸짓에도 기사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다 보였다.
레아 린드버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리 영주들의 근황을 보고받는 중이었고 벨프리는 그 옆에 붙어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다가도 가끔 칼 린드버그를 힐금거렸다.
제임스가 작게 혀를 찼다. 여전히 웃고 있는 아드리안 헤네켄의 눈가가 싸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어린 기사들의 첫사랑이 되려 하시는 건지.
제임스가 짝이 있는 알파라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벌써 린드버그 왕성의 출입이 엄금되었을 테니까.
“병사들의 식사는 제때 잘 보급되고 있습니까? 사소해 보이는 영양의 불균형이 작지 않은 부상을 일으키니까요.”
‘영양의 불균형?’
아까부터 어머니 같은 말을 하는 왕자에게 놀란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줄줄 불만을 토했다.
“처음 당도했을 때는 자체적으로 식자재를 공급받을 수 없어서 헤네켄에서 조달한 마른 식량으로 해결 보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식량의 질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게다가 모든 식자재와 물품들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와는 떨어진 곳이어서 더 부족했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럴 것 같아서 지원병들 편으로 마른 채소를 보급했습니다.”
“마른 채소요?”
제임스의 되물음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쉽게 시들지 않는 생채소 몇 가지도 넘기긴 했지만, 그걸론 고작 하루 이틀이면 전부 소모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심한 일인데 미네랄이 부족해지면 큰일입니다.”
“미네랄이요?”
바보처럼 왕자의 말만 되풀이하는 제임스에게 칼 린드버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한국형 소설이라 기후와 생태계가 엇비슷한 린드버그와 헤네켄은, 아이러니하게도 식생활이 서양 쪽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어렵게 말하면 모순이고 쉽게 말하면 설정의 오류였다.
당장 황성 내부의 뜰이나 숲만 돌아다녀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마치 잡초처럼 취급되는 걸 보곤 했다.
잘 말려진 ‘나물’들이 으슥하고 건조한 곳에서 여물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본 칼 린드버그는 손뼉을 쳤다.
그것들을 병사들에게 지급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손톱이 까매지도록 마른 풀을 고르는 칼 린드버그에게 두 손을 들어 주고 말았다. 그 뒤에는 칼 린드버그가 개 사료를 줘도 맛있게 먹을지도 모르는 아드리안 헤네켄의 전폭적인 지지가 깔려 있었다.
칼 린드버그가 시범으로 주방을 빌려 그것을 요리했을 땐 글렌 황제조차 ‘왕자의 광증이 다시 도진 것은 아닐까?’라고 했다.
물론 맛을 본 다음엔 반론은 쏙 들어갔지만.
칼은 이것을 린드버그에 있을 때 알았다면 식량난을 좀 더 효과적으로 개선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입을 떡 벌리자 왕자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 미네랄이라는 건, 급하진 않아도 부족하면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 각종 영양분들을 뜻합니다. 빵과 고기만 섭취해서는 당장 사는 데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죠. 모든 채소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말렸을 때 부족해지는 수분 대신, 각종 영양소들이 응축되는 채소들이 몇 가지 있어요. 보기에는 이게 먹어도 되는 것 맞나, 싶겠지만 적절히 소금 간을 해 놓으면 꽤 먹을 만합니다.”
기름 없이 팬에 볶거나 삶으라고 조리법까지 알려 준다.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아드리안 황태자를 넘겨다 보았다.
‘전하, 이분이 왕자가 아니라 사실 린드버그 왕궁 약제사였다거나, 조리장입니까?’
용케 알아들은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랍지? 내 배우자가 이런 사람이다.’
자랑스러움이 담뿍 담긴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여 제임스는 휴, 한숨을 뱉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연한 것을요.”
“참 놀랍습니다. 별걸 다 아시는군요.”
결국 긴장이 풀린 제임스가 껄껄껄 웃자 레아도 벨프리도 한 걸음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도 저래도 칼 린드버그가 좋아 죽는 아드리안만 칼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칼이 좀 그런 면이 있소. 좋아하는 것도 많고 잘하는 것도 많습니다.”
뒤늦게 민망해진 칼 린드버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것저것 관심사가 많이 생겨서 알아보다 보니까 말입니다.”
“관심사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모쪼록 앞으로도 린드버그와 저희 헤네켄을 위해 애써 주십시오.”
“그럼요. 그래야지요.”
어영부영 웃음으로 무마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칼은 참, 이 경계선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어디까지 칼 린드버그 속에 있는 진짜 자신을 내보여도 되는 건지를 말이다.
칼 린드버그가 물끄러미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한 점 의심 없이, 아니. 처음에는 조금 의심했지만 가까워질수록 한결같이 저를 믿어 주는 아드리안이 없었다면. 칼 린드버그는 소설 속에 떨어진 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