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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78)화 (78/150)

“말린 채소도 좋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도 좋지만 본론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뒤에서 쳐다만 보던 벨프리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에 칼 린드버그가 먼저 헛, 하고 정신을 차렸고. 아드리안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보다 더 중한 것이 있었나.”하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칼의 손끝이 차다고 조몰락조몰락하며 한쪽 손을 주물렀고 칼은 그제야 상기된 제 볼을 더듬으며 민망함을 가라앉혔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리고 벨프리는 그 사실이 갑자기 없는 상처를 후빈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그래. 아마 골이 아파서 그런 거다.

자각 없이 아무나 홀려 대는 왕자도 그렇고 주변 사람을 개의치 않으며 연심을 표출하는 황태자도 그렇고. 가뜩이나 사이좋은 두 분 폐하와 부모님만으로도 고단한 벨프리의 인생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고단해질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욱신거리던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감히 황태자비를 대상으로 짝사랑 같은 성가신 것을 시작했을 리 없다.

“예상하신 대로 모두 마정석으로 조종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이상한 수식이라 당황스럽지만요.”

제임스가 기사가 한 아름 짊어지고 온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뭔가 알아내시면 헤네켄 황성으로 연락을 취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 린드버그가 주머니를 챙겼다.

그가 수식을 읽을 수 있다 한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후루룩 읽는 모습을 보여 주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어 나중에 홀로 살펴볼 생각이었다.

“바로 변경으로 돌아가십니까?”

칼의 물음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에서 지체하기에는 아직 변경의 일들이 많습니다.”

제임스는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게다가 이곳은 곧 소란스러워지지 않습니까? 제가 끼어들 일도 아니고 하니 저는 돌아가서 제 본분을 지키겠습니다.”

레아 린드버그가 각 영지의 현황이 적힌 보고서를 꼼꼼히 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칼 린드버그가 답답해지는 가슴을 문질렀다.

파르만과의 일 이전에 레아에게는 큰일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왕과 왕비를 포함한 린드버그의 관료들을 심문하고 처분을 논의하는 일 말이다.

주로 영지에서 거둬들인 어마어마한 세율의 세금을 어디다 융통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영주 개인의 권한을 휘둘러 선량한 평민이 피해를 보는 일들도 적잖이 있어 심문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다 비슷한 병폐라고는 하지만 경중은 있을 테니 그것을 따져 볼 참이었다.

가해자는 처벌을 받고 피해자에겐 보상이 돌아간다.

단순한 일 같지만 대부분을 왕성에서 보낸 레아에게는 그 규모를 따지는 일만으로도 벅찰지 몰랐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왕과 왕비가 친부모라 심적으로 고통받지 않을지, 그것도 칼 린드버그의 우려 중 하나였다.

칼이 저를 보는 시선을 눈치챈 레아가 고개를 들었고 레아는 칼을 보며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입술을 오물거리는 칼에게 레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웃어 보였다.

다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미소에 칼이 더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두 남매를 의미심장하게 보던 제임스가 다시 운을 뗐다.

“한 가지 말씀을 올리자면, 의외로 변방의 평민들은 왕정에 대한 불만이 없었습니다. ”

“그래요?”

칼 린드버그가 고개를 갸우뚱했고 레아는 이쪽을 향해 관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불만이 없었다기보다는 잘 몰라서,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지켜본 바로는 오히려 왕도 가까이 사는 다른 백성들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레아와 칼이 동시에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변방인 데다 마수의 출몰이 잦았던 터라 영주의 입김이 세지도 않았고 거의 자치구처럼 취급되곤 했던 모양입니다. 영주가 경비를 세우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훈련이 잘된 사람들을 배치하는 실상이었고. 저희가 찾아갔을 땐 꽤 환대받기도 했습니다. 마치 작은 축제 같았어요.”

아드리안은 제 턱을 문질렀다.

“무관심이 오히려 그들의 삶의 질을 올렸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맞습니까? 호거든 소백작.”

제임스가 “네.” 하고 대답했다.

“워낙 척박한 땅이라 가난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것들은 오히려 왕도나 큰 영지의 영주민보다 나아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칼 린드버그는 제임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물보다 진한 것이 피라고, 혹여 흔들릴지 모르는 린드버그 남매의 마음을 다잡아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여기서 지내며 느낀 것이, 상수도가 맑아야 하수도 맑다는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같다는 겁니다.”

뜬금없는 비유에 아드리안과 칼, 레아와 벨프리까지 귀를 쫑긋 세웠다.

평균 나이 스물한 살 반의 어린 상관들이 묘하게 귀여워 제임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으레 윗물 같은 귀족들은 고인 채 썩어 가도 아랫물에 있는 평민들은 썩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린드버그의 백성들에겐 가능성이 많아요. 당장 나라가 혼란한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선 모두가 동감했다.

나라의 상징인 왕과 왕비가 사실상 왕위를 내려놓고 귀족들이 줄줄이 구금되며 재건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의 병사들이 활보하는 가운데, 백성들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매일 경계선을 넘으려는 사람들로 혼란스러웠던 국경 지역이 잠잠한 것만 봐도 그랬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돕고 있다는 소식은 헤네켄에 있을 때도 익히 들었다.

칼 린드버그는 사뭇 달랐던 이번 린드버그행을 떠올렸다.

아무렇게나 놓은 불로 황폐해진 땅과 생기 없이 누워 있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다들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했다.

허물어지는 벽을 넘어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는 대신 흙으로 빚은 벽돌을 쌓아 보수하고 지붕을 얹는 사람들이 흘리는 땀에서 여느 때보다도 풍부한 생기가 느껴졌다.

칼 린드버그 일행이 탄 말을 향해 웃어 보이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칼과 레아의 마음에서 뾰족한 가시 하나가 뽑혀 나갔다.

세피아 효과를 덧씌워 놓은 듯했던 영상이 생동감 넘치는 컬러로 탈바꿈하는 것을 처음 목격하는 사람처럼 칼 린드버그가 감격에 젖었다.

헤네켄으로 처음 넘어올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무척 감동하는 것을 진동하는 페로몬으로 알아챈 아드리안은 그가 알 수 없는 과거의 칼 린드버그가 혹시 빈민 출신의 누군가는 아니었을지 상상하기도 했다.

“누구 하나 흔들림 없이 이 땅을 지탱하고 있는 백성들을 보면 린드버그의 미래가 무척 밝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임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꼭 하고 싶은 한마디가 혹시 선을 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되었다.

레아 린드버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임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다음은 뭡니까? 꼭 듣고 싶으니 주저하지 마시고 말해 주세요.”

조언해 주는 사람 없이 독학으로 제왕학을 마친 레아는 갈증이 나는 것처럼 안달했다.

그 갈급함에 제임스의 머뭇거림도 사라졌다.

“썩은 물이 둑을 넘을 정도로 차고 넘치면 제아무리 아랫물을 맑게 유지하려 노력해도, 결국 오염되지 않겠습니까?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저는 잘못 살아도 한참 잘못 살고 있던 귀족들이 어떤 형태로건 이 땅에 간섭하지 못하길 바랍니다.”

그 말인즉슨 죽이거나, 영원히 연금되거나, 아주 멀리 추방을 하라는 말이었다.

호거든 소백작 뒤에 서 있던 젊은 기사들이 숨을 참았다.

타국 사람인 제임스 호거든이 차기 왕이 될 레아 린드버그에게 하기에는 정말 주제넘은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레아 린드버그가 속내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차가운 표정이 되었지만 제임스는 이왕 엎어진 물이라 생각하며 어깨에 힘을 뺐다.

다만 몇 개월이지만 변방에서 린드버그의 백성들과 함께 구르며 지낸 세월이 있어 제임스는 진심으로 린드버그의 백성들이 더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다.

레아 린드버그가 어떤 성격인지는 모르지만 무른 처분을 내리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귀족 쭉정이들이 다시금 백성들 위에 군림하기라도 하면…….

“모든 것을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얻을 순 없습니다. 마땅히 철퇴를 내려야 할 때엔 확실하게 내려쳐야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게 되겠지요.”

제임스의 단호한 어조에 아드리안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 린드버그의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모든 것을 평화롭게.’

칼 린드버그가 가장 바라는 것이지만,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특히 이런 시기에는 더더욱.

사실 천성이 마냥 유하지만은 않은 아드리안은 제임스의 말에 무척 공감했다. 린드버그의 귀족들을 싹 죽여 없애고 파르만도 밀어 버리고 칼 린드버그만 덥석 들어 안아다가 다시 헤네켄으로 돌아가면 간단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인 글렌 황제가 아드리안에게 바라는 황태자로서의 덕목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칼 린드버그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칼 린드버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모양새를 보니, 나중에 아드리안의 위로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불편한 침묵이 임시로 세워진 집무실 겸 회의실을 맴돌았다.

모두가 레아 린드버그를 주시했다.

벨프리는 레아 린드버그의 움켜쥔 주먹이 제임스를 향해 날아가면 몸을 던져 막을 셈으로 자리를 살폈다.

제임스의 말은 옳았지만 이건 레아의 자존심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꼴깍,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과연.”

레아 린드버그가 작게 읊조렸다.

과연, 뭘까. 비꼬려는 걸까.

벨프리가 슬금슬금 제임스와 레아의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칼 린드버그는 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레아 린드버그가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과연 현명하시군요.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 변방의 그 어려운 일들을 맡겼는지 알 것 같아요.”

아드리안만 빼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레아 린드버그가 진심으로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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