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가 떠난 뒤에 레아 린드버그는 유례없이 홀가분해 보였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레아 린드버그가 귀족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
당분간 린드버그 왕성에서 피 냄새가 진동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칼을 달래고 안심시키는 것이 아드리안의 할 일이었다. 다만 그때 칼의 귀와 눈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열어 놓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천천히 이해시키는 것이 좋을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레아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던 칼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마르코와 함께 제 방으로 향했고 벨프리와 아드리안은 레아 린드버그와 함께 착석했다.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지는 않으시겠지만,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칼 린드버그와 마찬가지로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벨프리가 레아에게 물었다.
“글쎄요. 어쩔까요.”
레아는 과장되게 골치 아파 죽겠다는 시선을 보냈고 벨프리는 칼 린드버그와 소름 돋게 닮은 얼굴이 전혀 다른 종류처럼 보이는 것이 모순으로 느껴져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떤 느낌이냐면 똑같은 얼굴인데, 한쪽은 깡깡 우는 고양이 같고 한쪽은 곧 우리를 부수고 나올 재규어 같았다.
물론 성격적으로 보자면 칼 린드버그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 같았지만, 이거나 저거나 무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드리안을 보며 자라서 알파의 사나운 본성은 이골이 날 만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레아가 불쑥불쑥 보여 주는 알파의 면모는 아드리안과 또 결이 달랐다. 아비 말처럼 벨프리는 아직 한참 멀었나 보다.
레아가 벨프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다가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헤네켄에서는 권력자가 횡포를 저지르면 어떻게 처분하나요?”
아드리안은 제국법을 들춰 볼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횡포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제국법에 명시되어 있는 범죄의 종류에 따라 평민과 동일한 수준의 처벌을 받습니다. 면책 특권은 같은 지위의 사람과 갈등을 빚었을 때나 발휘되죠. 다만, 귀족들이 대부분 형질자라는 것을 감안하여 재판 시 참작을 해 주기는 하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중한 죄를 저지르면 상응하는 처벌이 돌아갑니다. 죽은 사람의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고 마찬가지로 죽어 버린 사람의 마음도 때로는 회복시키기 어려우니까요.”
“아하.”
그래서 우성에 가까울수록, 짝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구나.
레아 린드버그는 아드리안 헤네켄이 칼 린드버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베타가 이성 반 본능 반으로 사는 존재라면 알파나 오메가는 본능이 7할 5푼 정도로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대대로 우성인 헤네켄의 황족과 고관대작들은 그것을 누르기 위해 아주 어릴 때부터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우선으로 하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엄격한 제국법 아래에서 이런저런 처벌들로 남은 귀족이 없었겠지.
아드리안도 칼을 만나기 전까지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에 사람을 두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 짝을 만났는데 심지어 형질자라 내내 눌려 있던 무언가를 쏟아부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애정이든 정욕이든 둘 다이든. 받는 쪽은 숨이 막힐 정도일 테다.
보이는 만큼 여리지 않은 녀석이니 큰 걱정이 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불안한 구석은 있었다.
레아 린드버그는 흠, 하고 아드리안을 뜯어보았다.
아드리안이 목에 차고 있는 자줏빛 마정석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이 와중에도 홀로 방으로 향한 칼 린드버그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칼 린드버그가 자신의 고삐를 잡아 주기를 바랄 터였다. 그 방면에서 어수룩한 동생은 쥐고 가만히 있다가 되레 끌려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칼 린드버그가 끌려가는 것이 먼저일까 아드리안이 끌려가는 것이 먼저일까.
아, 어쩌면 평생 서로의 속도를 배려하면서 나란히 걸어갈지 모르지.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아드리안과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칼 린드버그는 퍽 잘 만났다.
알파가 제 짝을 첫눈에 알아본다는 말을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믿었다. 작은 우연이 반복되어 스며들듯 내 사람이 되는 행운.
레아 린드버그의 인생에도 있으면 좋으련만.
“공주님?”
벨프리가 생각에 빠진 레아를 불렀다.
선명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염려를 가득 담고 있었다.
레아를 불편해하는 게 다 보이고, 칼 린드버그에게는 엉뚱한 감정을 품은 주제에 레아 린드버그의 주변을 맴도는 베타, 남성.
형질에 대해 무지하지만 오메가의 몸을 가진 칼 린드버그보다 높은 장벽이다.
레아 린드버그의 호승심에 살짝 불이 붙었다.
그녀가 눈가를 접으며 웃어 보이자 벨프리가 몸을 당겨 아드리안의 옆으로 가까이 앉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듯 보였다.
“결정했습니다. 이왕 헤네켄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 제국법을 모방하여 국법을 새로 만들어 보기로 하죠. 먼저 기틀을 정한 뒤 거기에 맞추어 귀족들의 처분을 내리고 세부 사항은 나중에 추가합시다. 벨프리 헨드릭. 도와주시겠어요?”
뜬금없는 레아의 말에 벨프리가 에엑, 하는 소리를 냈다.
“헨드릭 공작님도 매해 제국법을 손보는 데 앞장서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래서 배워 온 소공작이니 내게도 그 지식 좀 나누어 달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벨프리가 아드리안의 곁으로 조금 더 붙었다.
왜 아드리안보다 작은 레아가 더 무서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벨프리의 편을 들어주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씩 웃었다.
“그거 잘됐네. 벨프리. 늘 내 일을 도맡아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잖아. 마법이나 군법이 네가 사는 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툴툴거리기도 했고.”
그거야 자신이 마력이라곤 한 개도 없는 베타고 군법엔 취미가 없어서 그렇지, 하고 벨프리가 소리 없이 아우성을 쳤다.
“폐하께서도 네게 그런 것을 배워 오라 하셨잖나. 이참에 다른 주군을 섬겨 보는 것도 좋겠다. 잠시라면 불충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 잘해 봐.”
아드리안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벨프리가 허무하게 손을 뻗었다가 레아 린드버그의 말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날 돕는 대가로 왕성의 모든 곳을 활보하게 해 주겠습니다.”
고작 그런 걸? 이라고 하기엔 황족 및 역사 애호가이며 그중에서도 성에 관심이 지대한 벨프리의 고개가 삐거덕거리며 돌아갔다.
속으로 작게 웃은 레아는 낚싯대를 드리웠다.
“헤네켄 제국 성만큼이나 린드버그 왕성도 역사가 유구한 것, 알고 계시죠? 장식 하나에도 상징이 있었다는데 나는 그런 것 잘 몰라서요. 벨프리가 마음껏 연구해 보면 어때요?”
연구.
벨프리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레아는 쐐기를 박았다.
“여차하면 성의 개보수까지 맡길 수 있다면 참 좋겠군요.”
“……!”
안 그래도 린드와이어 제국 시절부터 내려왔다는 성이 가지고 있는 고풍스러운 외관이 지나치게 낡아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이 성이 품고 있는 장식품들은 왕국의 위엄을 보여야 하는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조잡한 것들뿐이었다.
그 조잡한 물건들을 제 아버지가 팔았다는 것은 잠시 망각한 벨프리가 레아 린드버그의 옆으로 스윽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될까요?”
어느새 목에 걸어 두었던 모노클을 착용하며 벨프리가 펜에 잉크를 적시기 시작했다.
* * *
칼 린드버그의 방은 변한 것이 없었다.
급할 때 도움을 준 ‘조각 미남’이 사라진 자리에 뽀얗게 먼지가 앉을 정도로 방치된 탓에 마르코가 종일 쓸고 닦느라 애를 먹었다.
주인을 잃은 왕성의 구석에는 단순히 건물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헤네켄의 병사들이 지어 놓은 임시 거처가 있었다.
레아 린드버그가 복위할 때까지 가능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놔두라는 글렌의 지시가 있어서였다.
키치너가 세워 뒀던 용병단은 공중분해된 지 오래였고 왕비는 그녀가 칼을 마주쳤던 탑에 갇혔다가 왕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며 왕의 방에 함께 감금되었다.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안에서 착취당하던 하인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급여를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짐을 쌌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방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의욕 넘치는 모습이던 칼이 방으로 돌아올 때는 흐느적거리자 마르코가 물었다.
“결국 레아가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나 싶어서.”
“피를요?”
마르코가 화들짝 놀랐다.
“귀족들이 해 놓은 나쁜 일이 워낙 많아서 아마 대부분 죽지 싶어.”
칼이 설명하자 마르코가 휴, 한숨을 내쉬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전 또 뭐라고. 그건 당연한 거죠.”
“당연한 거라고?”
“네. 귀족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에 수십, 수백, 수천의 백성들이 죽었어요. 오히려 본인들 목숨으로 그 빚을 갚으면 싸게 먹히는 거고. 그런 것 아닙니까?”
설마하니 갱생이라도 될까 생각하신 거냐고 마르코가 혀를 차자 칼은 고개를 저었다.
“갱생은 기대도 안 했고 영원히 가둬 놓기도 어렵긴 하지.”
“그럼요?”
마르코가 되묻자 칼은 어느새 제 품에 자리 잡은 엘리자벳의 귀밑을 긁으며 대답했다.
“레아가 나중에 죄책감을 느끼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워서. 일족을 멸할 것도 아닌데 유족들이 레아를 원망하거나 저주하면 어떡하냐.”
그놈들이야 죽어 마땅할 놈들이지만 레아가 주축이 되어 살인을 하는 게 거북했다.
칼 린드버그의 생각은 그랬다. 애초에 귀족이라는 직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라 적당히 겁주고 벌준 뒤에 작위를 박탈하면 되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하던 칼은 멀뚱히 저를 보는 마르코에게 말했다.
“내가 너무 물러 터졌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왕자님이 원하시는 건, 처벌을 레아 공주님이 직접 하지 않는 것뿐인가요?”
마르코가 묻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적이지만 그래.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알아서 사라져 주면 안 되나.”
그럴 순 없겠지만.
칼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하고 말했다.
“횡포가 보통이 아니라 원한도 많이 쌓였을 텐데. 지금 당장 광장에 내다 놓기만 해도 돌 맞아 죽을걸요. 그런 건 공주님이 했다고 할 수 없지 않나. 아, 미바리 숲에는 그런 곳이 많대요. 인간이 발 한 짝만 들여도 생사가 희미해지는 곳이요. 이건 사고지요?”
태연하게 말하는 마르코 때문에 칼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뇌 한구석에 깜박깜박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마르코. 일단 오늘의 이야기는 가슴에 잠시 묻어 둬.”
레아를 염려해서 살인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사고는 괜찮지 않나 하는 스스로의 윤리관에 자괴감이 든 칼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을 가려 보았다.
“흐, 마정석이나 들여다봐야지.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더 있냐.”
비척대며 주머니를 뒤지는 칼에게 마르코가 물었다.
“근데, 왕자님. 예언자 소녀는 왜 굳이 데리고 오셨어요?”
아드리안 전하께서 상당히 싫어하시던데. 하고 마르코가 말하자 칼 린드버그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