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80)화 (80/150)

여동생인 재영이와의 추억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마냥 예뻤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자신도 정신없이 어른들에게 휩쓸려 다니느라 그때 재영이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슨 일을 함께했는지 거의 기억이 없었다.

삼촌의 집에서 의탁하게 될 무렵엔 불편해서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교 후 주유소에서 기름 냄새 맡으며 잡일을 하고, 주말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삼촌 내외와 그 집 아들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떠들고 있을 때 나는 재영이와 함께 쓰는 방에 처박혔다.

잠든 재영이 옆에 트럭에서 산 새 양말을 꺼내 두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가, 문득 재영이의 숨소리가 약해지는 날에는 밤새 걱정에 잠을 못 이뤘다.

어느 날부터 재영이는 지독하게 조용한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한창 예민한 이차 성징기의 여자애가 오빠와 한방을 쓰는 것부터 불편한 일이었지 싶다.

그러나 재영인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수학여행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오빠가 왜, 학교 안 가냐고 물어도 학교가 쉰다는 소리만 했고, 혼자였던 초등학교 졸업식엔 졸업앨범을 그 애만 못 받았다는 것도 몰랐다.

공장에서 숙식해 가며 돈을 버는 데 몰두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재영이를 보러 갔을 때, 그 애가 울며 ‘오빠, 나 삼촌이랑 살기 싫어!’ 하고 외쳤던 게 처음으로 그 애의 속내를 들었던 때다.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생리대를 어떻게 쓰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는 무심한 어른들과 사사건건 시비 걸다 결국 몹쓸 짓을 시도한 그 집 아들에게 분노해 밥상을 뒤집어엎고 재영이의 손을 붙들고 나왔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코트 한 장 입은 재영이 책가방을 내가 대신 메고 둘이 손 붙들고 삼촌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는 재영이와 함께 울며 서울에서 안산까지 갔다.

함께 사는 반장님께 사정을 설명하니 대신 분노하시며 두 달 치 월급을 가불해 주셨고, 겨우 반지하 월세방을 얻었다.

보증금 200만 원에 월 30만 원짜리, 좁지만 투룸이어서 서툴게 재영이 방도 꾸며 주고 매일 바퀴약을 쳐 대도 재영이와 함께여서 나쁘지 않았다.

전학 문제 때문에 주민센터에 문의하니 무료 행정 상담을 연결해 줬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삼촌의 가족관계 증명서에 우리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었다는 걸.

재영이 전학 절차를 받고 입양 철회를 할 수 없나 알아보는 사이에 입영통지서가 날아왔고, 나는 어영부영 군에 입대했다.

미성년자였지만 중학생인 재영이는 주 2회 사회복지사가 방문해 가며 돌봐 주었고 나는 휴가 때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재영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생긴 여유 덕분인지 별걸 다 알게 되었다. 재영이와의 진짜 추억은 그 무렵부터 쓰였던 것 같았다.

편지 한 장 안 써 주는 무뚝뚝한 여동생이 양념치킨보다는 프라이드치킨에 소금을 찍어 먹는 편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고, 갈비탕에 당면이 들어 있지 않으면 실망한다는 것도 알았다.

플레이 리스트에는 듣도 보도 못한 영국 밴드 음악이 가득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두 명.

데면데면하게 굴다가도 복귀하는 날에는 눈물을 보이는 동생의 손을 잡으면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감을 잡았다.

너를 위해. 너와 함께하기 위해. 세상에 단둘뿐인 가족이니까.

돈이 없어 괴로운 게 아니라 함께하지 못해 괴로운 거라고 태도로 전하는 널 위해서 나는 나아가련다.

전역 후에 야간이라도 전문대 졸업장을 따고 그걸로 응급구조사 시험을 쳤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랑스러운 가족이 되기 위해서. 혹여나 있을지 모를 네 급박한 순간에 가장 먼저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어서.

누군가는 숨이 차다, 쉬어 가라 말했지만 쉬어 갈 새가 없었다.

동생은 20살. 대학 입학을 앞두고 버스 전복 사고로 죽었다. 미친놈처럼 달려간 현장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구 하나만 살려 내면, 그가 내 동생이 살려 낸 목숨이라 생각하려 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도 죽었다.

그 인생에 봄은 과연 없었나.

재영이는 내게 얼마나 웃어 주었던가.

육신은 사라지고 없는데 영혼이 아팠다.

솔직히 말해서 어리둥절하긴 했어도 좋았다. 네가 읽던 소설이라.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취미 삼아 했는지. 지금에라도 깊이 알 수 있게 되는 것만 같아서.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품었던 이유도 단순했다.

네가 좋아했던 사람이라. 네가 그렇게 애달프게 매일 행복한 모습을 보겠다고 외쳤던 사람이라.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게 고마웠다.

소설 속 캐릭터를 넘어 한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을 때도 벅차게 기뻤다.

그리고.

어쩌면 네가 나와 같은 세상에서 다시 숨 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처럼 좋다.

마녀, 예언자, 라시다 루루.

네가 내게, 아니 칼 린드버그에게 보인 무조건적인 적대가 너라서 그럴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기꺼울 정도로.

***

“그 마녀는 황태자 전하께 아주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니까요.”

테이블 위로 죽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마정석을 늘어놓는 칼 린드버그에게 마르코가 말했다.

산책을 다녀온다던 칼 린드버그가 냅다 아드리안에게 쫓아가 마녀를 데리고 린드버그로 가겠다고 했을 때를 기억했다. 마르코의 전신이 떨릴 정도로 아드리안은 분노했다.

첫째는 라시다 루루가, 칼 린드버그를 잠시나마 제 곁에서 떨어뜨려 놓은 장본인이었고 그다음은 그가 자신 외의 타인에게, 그것도 여자아이에게 보이는 관심이 싫어서 라는 게 그 이유였다.

아드리안은 그 불편함을 대놓고 표현했고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을 설득했다.

〈그 아이에게서 관심을 꺼. 칼 린드버그.〉

〈이 성에서 나 다음으로, 아니 네 부모님과 나 다음 순수한 마음으로 네 행복과 헤네켄의 무운을 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자 소녀일 거야.〉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도 칼 린드버그는 강경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어. 아드리안. 잘못은 내게 있었지. 나는 겁쟁이였고 무수히 많은 오판을 했어. 그래서 떠났던 거야. 그 아이가 내게 했던 건 그냥 조언일 뿐이었어. 내가 네 곁에 머무는 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닐지 모른다는 조언.〉

그것도 널 걱정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칼이 예언자의 편을 들자 아드리안은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그녀가 네게 또 다른 터무니 없는 예언을 해서 네가 또 흔들리면? 그때는 내가! 그녀를 죽일지 몰라.〉

협박 같은 말에서 아드리안이 아직도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태연한 척한다는 것을 알게 된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이젠 안 그럴게. 네가 떠나라고 하기 전까지 내 발로 네 옆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무슨 예언을 해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

칼 린드버그도 이제 확실히 안다.

아드리안의 행복은 그가 원하는 것을 쟁취했을 때 이루어지며 그건 다름 아닌 칼 린드버그라고.

그제야 아드리안은 어쩔 수 없이 예언자와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지난번에는 헨드릭 소공자께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는걸요. 그게 발단이 되어 고립당했다고 들었어요. 에휴. 예언도 잘 들어맞지 않는데 거기서 황태자 전하의 짝이 벨프리네 뭐네. 하니까 소공자께서도 얼마나 황당하셨겠어요.”

이불 사이에 침구를 데우는 마정석을 밀어 넣던 마르코가 혀를 끌끌 찼다.

“이젠 안 그럴 거야.”

루루는 이제 원작은 내려놓고 황태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걸로만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칼 린드버그가 아는 그녀가 정말 맞다면.

그 아이는 의외로 단순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왕자님이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마녀가 괜히 마녀인 줄 아십니까? 출신도 모르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데 마정석만큼은 정확히 쓸 줄 알아서 마녀라고 부른다던데요.”

“원래 중요한 인물들은 신비로운 과거 하나쯤 가지고 있는 법이지.”

칼 린드버그는 어쩐지 탁해서 수식도 잘 보이지 않는 마정석들을 불빛에 비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힘들게 읽어야 보이는 글자에 칼은 아무래도 돋보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죽어 가는’, ‘짐승’, ‘되살렸다’, ‘공허’, ‘허기’, ‘채우는’, ‘주인’.

‘죽어 가는 짐승을 되살렸다. 공허하고 허기진 것을 채워 주는 이가 주인?’

이런 말인가?

마정석 하나에 수식이 전부 입력되어야 발동하는 것이 마법이 아닌가 보네?

마수의 생김새가 평범하지는 않다고 했지.

프랑켄 슈타인처럼 시체를 파서 번개의 힘으로 되살렸나.

파르만에 직접 들어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종류는 제각각인 듯 결정 모양도 색도 달랐지만 쓰여 있는 글은 똑같았다.

칼 린드버그가 혹시나 하고 수십 개의 마정석을 전부 살피는 동안 마르코는 계속 뒤에서 투덜거렸다. 듣다 못한 엘리자벳이 주둥이로 마르코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저도 불안하다고요. 마녀가 혹시 왕자님을 설득한 것이 흑마법의 힘은 아닌지.”

“마르코.”

칼이 나지막이 저를 부르자 마르코가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만하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왕자님은 겁이 너무 없으니까. 좀 더 잔소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마르코는 이내 들리는 질문에 푸식 하고 가라앉았다.

“흑마법이 뭐야? 그런 게 따로 있어?”

아, 왕자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기억상실이었지.

마르코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대답했다.

“나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마법이요.”

“공공연히 쓰이는 마법인가?”

“설마요. 그랬다간 영원히 마력의 원천을 제거당하고 섬에 유폐될걸요?”

“헤네켄에서만? 아니면 린드버그에서도?”

마르코는 그게 왜 궁금한지 오히려 궁금해졌지만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건 대륙 공통이랬어요.”

그게 아니면 암투와 권모술수의 최전방에 흑마법사들이 먼저 배치됐을 거라 마르코가 말했다.

칼은 조용히 마정석을 쓸어 담아 다시 주머니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만찬 시간인데요? 어디 가시려고요?”

마르코가 물었다.

“있어. 되바라진 애.”

“누구요?”

마르코가 물었다. 칼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편견만 상실해 가지고. 오빠 몰래 남자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하는 소설 현질해서 본 그 아이에게. 이 소설의 실체를 탈탈 털어 볼 생각이었다.

회랑을 지나는 칼 린드버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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