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81)화 (81/150)

라시다 루루는 레아 공주가 즐겨 입던 것처럼 위아래로 적갈색의 빌로드 기사복을 맞춰 입고는 팔을 움직여 보았다.

역시, 드레스보다는 이쪽이다.

공주도 아니면서 공주 같은 차림새를 한 건 일종의 덕질이었다.

무수히 많은 로판 일러스트의 그 드레스.

한 번쯤 입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어쩌다 취향처럼 소문나서 매일 드레스만 입던 것도 질리던 참이었다.

린드버그 성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최애와 차애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

“……!”

귀를 간질이는 소음에 루루가 응? 하며 문가에 귀를 바짝 댔다.

누군가 문 근처에서 다투고 있었다.

“네가 마녀랑 둘만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아, 예언에 대해 물을 게 있어서 그렇다니까.”

“내가 말했지. 예언 따위 이제 필요 없다고.”

“혹시 모르잖아. 파르만과의 문제에 관련해서…….”

루루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안 봐도 유튜브였다.

부쩍 친한 척하는 칼 린드버그가 찾아왔다. 그 옆에는 아드리안 헤네켄을 달고.

어쩌다 최애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는 모르지만 칼 린드버그에게 하나는 고마운 점이 있다.

이렇게 데리고 와서 구경거리를 만들어 준 거.

라시다는 흠. 하고 제 옷매무새를 한번 매만진 뒤 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에게 한쪽 손목이 잡힌 채 이쪽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좋은 저녁.”

“안녕하지 못해요. 숙녀의 방 앞에서 다투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무슨 일이에요?”

따박따박 반말을 하던 루루였지만 아드리안을 의식한 탓에 존댓말을 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오래 시간 뺏지 않을게. 아, 아드리안은 곧 갈 거야.”

“함께 들을 거야.”

“엥?”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을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팔짱을 탁 끼고 칼 린드버그 대신 라시다 루루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다 보고받는 일을, 너와 마녀가 조용히 속닥거리는 게 더 웃기지. 안 그래?”

“아.”

칼 린드버그가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본체만체하며 척척척 들어온 아드리안은 먼저 소파에 앉았다.

예지력도 다 떨어졌다고 미리 말했는데 이제 와서 뭘 물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루루는 그 와중에 다리를 꼬고 앉은 아드리안이 눈부셔서 입술을 헤벌렸다.

“뭐 해? 빨리 와서 앉아. 묻고. 대답하고. 나는 듣는다. 그리고 우린 저녁을 먹으러 갈 거야.”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드리안 옆으로 착석했다.

“용건은 간단하게 부탁드려요. 칼 린드버그 왕자님.”

루루에 말에 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고는 마정석이 든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대놓고 묻겠는데. 파르만 왕국이나, 흑마법에 대해서 뭔가 짐작하는 것이 있다면 알려 주라.”

“파르만이요?”

라시다 루루는 사실 쫓아오기만 했지 정확히 린드버그와 헤네켄. 혹은 그 외의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파르만이라면.

루루는 집히는 구석이 있었지만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또 헛소리를 하면 정말 아드리안의 눈 밖에 날 테니까.

지금 칼 린드버그가 저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도 간신히 참고 있을 텐데.

“제 예지력은 이제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어요.”

루루의 말에 칼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감안하고 들을게.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파르만과 헤네켄 제국. 혹은 린드버그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칼 린드버그는 사실 오늘 살살 대화를 하며 원작 스토리를 감 잡아 볼 생각이었다.

흑마법까지 등장한데다. 마녀가 지난번에 말한 아드리안 헤네켄의 성격. 아드리안과 벨프리의 관계성이 지나치게 달랐던 게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소설이 칼이 짐작한 것처럼 꽃이 휘날리는 로맨스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루루가 원작을 읽은 전재영이 맞다면. 그녀의 의견은 참고할 가치가 있을 거다.

칼 린드버그가 헤네켄에 오고 나서도 약혼식 전까지 몇 가지 큰 사건을 예지한 그녀였으니.

루루는 기억을 더듬었다.

“파르만 왕국의 왕인 무지차 파르만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내년 겨울쯤이에요.”

“오.”

칼 린드버그가 품에서 종이와 깃펜. 휴대용 잉크를 꺼냈다.

아드리안은 그 행동으로 칼 린드버그가 루루의 말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아차렸다.

“파르만의 오랜 과제는 마물의 숫자를 인위적으로 불리고 그 시체를 고온에 압축해서 만들어 내는 인공 마정석이었고. 우연히 마정석의 비밀을 알게 된 후에는 마정석을 이용해서 대륙 전체를 제패할 야욕을 품고 있었죠.”

솔직히 그 파트는 아리송했다.

무지차 파르만은 중간중간 떡밥처럼 거론되었다. 칼 린드버그가 죽고 그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무렵까지가 연재분 전부였다.

루루가 아랫입술을 깨물자, 칼이 “어허.” 하고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어째 기시감이 들어 루루가 멈칫하는 사이 날카로운 아드리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파르만은 그 야욕을 이루었나?”

칼 린드버그가 휙 아드리안을 노려보았지만 아드리안은 황태자의 위엄이 서린 눈으로 루루만 응시했다.

“아뇨. 시도는 했겠지만 실패했을 거예요.”

“어째서 가정이지?”

“그 뒤로는 알 수 없어서요.”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피폐한 사건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는 것에 불안해진 독자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작가가 꽉 찬 해피엔딩이라고 못을 박았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실패했을 거다.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칼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의기양양한 시선이었다.

“봤어? 이렇게 불확실한 걸 듣겠다고 이 야심한 시각에 혼자 여길 온 거야?”

“저녁도 먹기 전인데 야심은 무슨. 나는 그냥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 그렇다니까.”

이제 막 해가 넘어갈락 말락 한다. 겨울인 것을 감안하면 그저 그런 시간대다.

루루가 정말 과거의 여동생이 맞다 한들 과년한 처자의 방에 한밤중에 홀로 들어갈 리가 없잖아.

“무슨 실마리? 그런 거라면 제국의 정예군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그쪽에다 물어봐.”

“다들 바쁜데 사소한 문제로 귀찮게 하기 싫어.”

칼이 고개를 수그렸다.

원작이 이렇게 풀리든 저렇게 풀리든. 어차피 원작은 어그러졌다. 루루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원래 이 소설의 분위기와 전개였다.

개중에는 주인공인 아드리안조차도 모르는 일들이 있을 터였다.

그런 걸로 앞으로의 일을 예측해 보고 사용할 수 있다면 써먹고.

핑계 김에 루루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드리안에겐 미안한 일이지.

칼 린드버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그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해서 꺼림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하는 일 중에 사소한 일은 없어. 미성년의 마녀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더 없어.”

칼 린드버그의 연애관이 베타 남성과 비슷할 거라는 벨프리의 충고가 아드리안의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여성에게 더욱 친절한 칼의 모습은 정말이지, 그를 베타 남성처럼 보이게 했다.

아드리안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칼은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그의 곁에 일부러 틈도 없이 붙어 앉았다.

신체가 닿으면 눈에 띄게 안심하는 아드리안의 버릇을 은연중에 눈치채서 종종 써먹는 것이고, 효과는 뛰어났다.

벌써 아드리안의 표정이 슬금슬금 풀리고 있었다.

“아드리안. 방해하면 나 내일 또 와야 해. 그때 또 쫓아올래? 그러면 모레 또 오고. 그렇게 매일 올까?”

그 말에 루루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칼 린드버그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꿋꿋하게 아드리안에게 기댔다.

덤으로 어깨에 뺨을 기대고 올려다보자 아드리안의 손이 허리를 감쌌다.

“그건 싫어.”

“그럼 오늘 내가 루루와 마음껏 대화하게 해 줘. 네가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까 루루가 말을 편히 못 하잖아.”

“전 괜찮은데요?”

아드리안의 얼굴을 합법적으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릴까 두려웠던 루루가 냉큼 괜찮다고 말했다.

‘어쭈. 이것 봐라.’

칼 린드버그는 속이 빤히 보이는 루루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황태자 전하는 다른 일로 바쁘세요.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네요.”

칼이 웃음 이모티콘과 닮은 눈웃음을 쳤다.

“번거롭기는요. 영광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전하와 함께 와 주시죠.”

씨알도 안 먹힌다며 루루가 같이 웃어 보였다.

어쩐지 닮아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에 불현듯 아드리안의 촉이 발동했다.

칼 린드버그는 루루의 어떤 부분을 제 진짜 여동생과 겹쳐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내 동생. 부모 얼굴도 모르고.〉

아드리안이 칼의 턱을 들어 제 쪽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 칼 린드버그.”

“비밀이라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거짓말.’

우물쭈물하는 칼의 입술에 아드리안이 제 입술을 붙였다 떼곤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루루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아드리안과 칼 린드버그를 번갈아 보았다. 칼의 얼굴이 불타는 감처럼 빨갰다.

아드리안이 대놓고 저를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처음으로 ‘현실 비엘’을 목격한 루루의 마음에 이상한 욕구 하나가 피어올랐다.

아드리안과 벨프리 커플을 덕질할 때처럼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을 덕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칼 린드버그라는 캐릭터가 더 이상 악역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고 외모 궁합으로 보자면 벨프리 헨드릭보다 잘 어울리긴 했으니까.

‘이거, 의외로 우량주인 모양인데?’

루루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칼 린드버그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드리안에게서 몸을 떼진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루루가 갑자기 과하게 친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왕자님, 궁금한 것은 뭐든 물어보세요. 황태자 전하께서도요. 아는 선에서는 거짓 없이 답해 드릴게요. 저도 밥값은 해야죠.”

‘밥값’. 익숙한 단어에 아드리안과 칼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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