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밥은 먹고 다니냐.’가 애정 어린 안부 인사이며 ‘언제 밥 한번 먹자.’가 또 보자는 인사와 같은 그들에게 ‘밥값’ 또한 스스로의 구실과 역할을 칭하는 평범한 단어였다.
하지만 여긴 달랐다.
벼농사에 적합한 환경을 가졌으면서도 밀을 재배하고 제국에서도 린드버그에서도 고기와 밀이 주식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결코 ‘밥’이라는 단어로 부르지 않았다.
대륙공통어에서도 ‘밥’과 ‘빵’은 구분되어서 저기 남부 어디쯤에서나 간간이 쓰는 단어였다.
아드리안에게는 ‘밥값’이 무엇을 뜻하는지 칼 린드버그와 지내며 알았을 정도로 생소한 단어였다.
그래서 마녀가 그 단어를 사용했을 때, 칼 린드버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마녀도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님을 확신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녀가 더 이상 요주의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아니었다.
칼 린드버그 주변의 모든 인물은 아드리안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으니까.
고작 식사 한 끼에 일희일비하는 칼 린드버그의 태도는 린드버그 왕성에서 일상이었던 무리한 체중 관리의 여파라 생각했다.
그러나 칼 린드버그의 면면을 알아 갈수록. 그는 그저 ‘먹는다.’라는 행위에 의미를 두고 무엇을 먹는지도 그만큼 중요히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칼 린드버그의 식사에 신경을 썼다.
처음 히트를 보낸 날에도 정신없는 와중에 식사만큼은 꼬박꼬박 챙길 정도였으니까.
대체로 무던한 칼 린드버그의 성품은 세 끼 내내 익힌 고기와 빵을 먹는 날엔 미묘하게 예민했다.
칼 린드버그가 술독에, 아니 술 욕조에 빠졌던 그날 이후 매일 마르코로부터 칼 린드버그의 하루를 보고받는 아드리안은 칼이 종일 ‘얼큰한’ 것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큰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밤새 고민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칼 린드버그에게 대놓고 묻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마르코를 스파이 삼아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는 사실도 들통나고, 칼 린드버그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들통날 것이 뻔해서 결국 미지의 것으로 남았다.
아드리안은 황성에서부터 따라온 조리장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못 먹고 자랐다기엔 제법 미식가였고, 그렇다고 까다롭지는 않은 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기 위해 매끼 다른 음식이 올랐다.
아직까지도 ‘얼큰함’은 찾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아드리안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건 칼 린드버그의 감정만으로 충분했다.
마녀의 방에서 나온 칼 린드버그는 갑자기 헐떡거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쥐었다.
그러고는 벅찬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며 아드리안을 붙들고 돌연 눈물을 보였다.
아드리안은 속으로 동요했지만 그저 칼을 안았다.
“나 혼자가 아니었어.”
아드리안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칼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혼자가 아니고. 앞으로도 혼자일 수 없어.”
내가 항상 함께할 거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과거의 너까지 모조리 끌어안고 앞으로 갈 거니까.
아드리안은 절박하게 칼의 등을 움켜쥐었다.
천으로 가로막혀 있어도 전해지는 체온이나 풍기는 향기로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살결이 당사자에게는 타인의 껍데기라 할지라도.
그 영혼까지 포함해서 전부 이제 아드리안 헤네켄의 것이었다.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고 빼앗길 리도 없었다.
“응.”
아드리안의 속마음을 읽은 듯한 칼이 물기 어린 눈으로 부스스 웃어 보였다.
처연한 모습에도 반응하는 자신의 신체에 쓴웃음을 짓던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를 데리고 바로 만찬장으로 향했다.
칼 린드버그가 루루에게도 저녁을 함께 들기를 권했지만 루루는 의외로 단칼에 거절했다.
〈저는 불편한 사람이랑 밥 먹으면 체해요. 그리고 오늘은 나름 기념할 게 있는 날이어서 방에 틀어박히렵니다.〉
무슨 기념인지 칼은 알고 싶어 했지만 아드리안은 더 이상 그녀와 칼이 말을 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찬장으로 가는 길에 아드리안이 칼에게 물었다.
“마녀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칼의 붉어진 코끝을 쥐며 장난스럽게 묻자 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점이?”
짐작은 가지만 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던 아드리안은 그가 얼버무리더라도 참을 예정이었다.
칼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자기 턱을 문지르다가 멈춰 서서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는 건데, 네가 질투할 만한 그런 감정은 한 톨도 없어.”
양손을 불끈 쥐고 선 칼을 보며 아드리안이 키득키득 웃었다.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는 것은 단순히 버릇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웃겼고 아드리안이 당연히 질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알았어. 나도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한테 너를 넘겨줄 만큼 유약하지 않으니까 질투하지 않을게.”
아드리안의 대답에 칼이 물렁하게 풀린 얼굴로 아드리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운 감정이야. 진짜 가족을 만난 것 같아서 벅차고 좋아.”
“그리고?”
제 어깨에 걸쳐진 칼의 팔을 자연스레 허리로 옮기고 반대로 자신의 팔로 칼의 어깨를 감싼 아드리안이 물었다.
칼은 그 다정한 스킨십에 기꺼이 응하면서 아드리안과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 당시에. 나는 마치 이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 같았어.”
조금 각색한 부분은 있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칼은 아드리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가슴을 살짝 눌렀다.
“그렇다고 해서 레아 누님이 가족이 아니라는 건 아니야. 나에겐 그녀도 마르코도 가족이고, 앞으로는 너와도 가족이 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는 말이야.”
아드리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대략 어떤 느낌을 설명하는지 알았다.
“특히 린드버그에 있을 땐 더 그랬어. 그런데 마녀는, 아니, 라시다 루루라는 예언자는 정말 혈육 같은 느낌을 줘. 내가 왕자고 본인이 평민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는 거침없는 태도도 그렇고. 쌀쌀맞은 말투도 그래. 너는 아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대목에서 아드리안은 조금 슬퍼졌다.
아직은 아드리안이 칼 린드버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서운한 건 지금뿐이고, 칼 린드버그가 언젠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쯤엔 더할 나위 없이 깊은 관계가 되어 있을 테니. 그때를 위하여 당분간 참는 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만찬장 입구에서 마주친 레아 린드버그와 벨프리를 먼저 들여보내고 아드리안은 칼을 마주 보았다.
한 뼘.
그와 칼 린드버그의 거리.
칼 린드버그의 새파란 눈에 담긴 아드리안이 넘실댈 때. 아드리안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네게 행복감을 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하지만, 혹시 그녀와 내가 반목하게 된다면 내 편을 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함께해 줘.”
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
“루루는 널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데, 아마 나보다 더 그럴 듯? 너와 그녀가 반목할 일이 뭐가 있을까?”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약속해 줘.”
칼은 잡힌 손이 얼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아드리안이 대인배인 척하면서도 자신의 은근한 불안을 전달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네, 걔 최애가 친오빠도 아니고 너라는 걸 알려 줄 수도 없고.’
혹시, 그녀가 재영이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의 최애는 여전히 ‘칼 린드버그’가 아니라 ‘아드리안 헤네켄’이었다.
“약속할게.”
“좋아.”
아드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만찬장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칼이 착석하기 전에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와 나는 가족이자 ‘연인’이야. 평생. 그거 잊지 말고 살아.”
‘연인’과 ‘평생’에 느낌표를 붙인 것처럼 강조해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기품 있는 황태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이 칼의 옆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던 칼 린드버그가 못 참고 푸흐, 웃어 버렸다.
아드리안 헤네켄. 왜 이렇게 귀엽냐.
어린애들처럼 손 꼭 붙들고 만찬장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저들끼리 속닥속닥 땅콩을 볶아 대는 두 사람 때문에 벨프리가 입술을 실룩여 보았다.
레아는 관심을 아예 끈 채 수프를 퍼먹었다.
마정석 대신 벽난로가 타오르는 네 사람의 식탁에 온기가 머무르다 떠났다.
* * *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레아 린드버그는 귀족들을 왕도로 모으는 대신 직접 찾아가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가능하면 대면하여 그간의 일들을 소상히 물어보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칼은 처음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말렸다.
그러나 레아는 강경했고 그녀를 보필할 사람들이 정해지고 나니 칼도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사랑을 받는 여신이 세웠고 레아의 조상들이 몇 대에 걸쳐 망쳐 놓은 린드버그를 그녀의 손으로 직접 재건하는 일이었다. 건물을 세우기 전 주춧돌을 직접 고르는 장인처럼 그녀는 비장해 보였다.
그녀는 직접 두 발로 이 땅을 디디고 그녀의 백성을 만나게 되는 일에 상당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칼 린드버그는 스무 해 꼬박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 있었던 레아의 심정을 이해하며 무탈하게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마침 아드리안 헤네켄이 변경으로 향하기 전까지의 일정을 레아 린드버그와 함께하기로 하자 칼은 더욱 안심했다.
그가 아는 한 아드리안 헤네켄의 곁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결국 린드버그 왕성에는 칼과 벨프리, 그리고 루루가 남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드리안은 못마땅해하며 칼을 데려갈 수 없을까 하고 수를 썼다.
맡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붙어 있을 순 없다고 칼이 어른스럽게 설득했기 때문에 아드리안은 홀로, 아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났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리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