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언제더라.”
한때 왕의 집무실이었고 지금은 레아 린드버그의 집무실이었으며 임시 회의실로 사용 중인 곳에서 칼 린드버그가 중얼거렸다.
다 비슷해 보이는 마정석인데 일일이 불빛에 비춰 보며 분류하는 칼 린드버그를 훔쳐보던 벨프리가 괜히 헛기침을 하곤 멈춰 있던 펜을 움직였다.
“누구요? 황후 폐하 말씀이십니까?”
벨프리의 질문에 칼 린드버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저번에 보니 배가 제법 나왔었는데. 얼마 안 남았죠?”
레아를 따라가는 대신 성에 남은 제니스가 때맞춰 웨건을 밀며 들어왔다.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굽었던 등을 펴며 끙, 하고 소리를 낸 칼이 중앙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듯한 차와 고소한 냄새가 나는 파이를 보며 입맛을 다신 칼이 벨프리를 손짓해 불렀다.
“오메가의 임신 기간은 베타보다 조금 짧다고 하니 아마 두어 달 정도 남았을 겁니다.”
벨프리가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칼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아와 아드리안이 성을 떠난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무래도 날이 풀린 모양이었다.
제니스가 정갈한 몸짓으로 찻잔에 차를 따르자 칼은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제니스에게도 앉으라 권했다.
제니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지만 칼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긴장을 풀겠느냐고 말했다.
칼을 마주 보고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것이 불편했던 벨프리까지 가세해서 앉으라고 청하자 제니스는 무릎에 손을 모으고 칼 린드버그의 옆에 앉았다.
제니스에게도 여분의 찻잔을 내밀며 손수 차를 따르던 칼이 제 목 부근을 벅벅 긁었다.
그 바람에 울긋불긋한 잇자국이 새하얀 피부 위로 선명히 떠올랐다.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벨프리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황태자가 칼을 린드버그 왕성에 두고 순순히 떠난 것에 의문을 품었던 벨프리에게 칼 린드버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른스럽게 설득’했다고 하더니. 그 어른스러움 너머에 끈적이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 밑이 퀭한 상태로 나타난 칼 린드버그는 제대로 앉지도 못했고 비척거리며 배웅을 마친 뒤에는 방에 들어가 한참 잠을 잤다.
그리고 해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나와서 부랴부랴 밀린 숙제를 하듯 마정석에 몰두했다.
벨프리는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해서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이내 알 수 없는 충동에 자리를 붙이고 앉았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통창을 두드리는 것을 멀거니 보던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 아직도 홍조가 어려 있었다.
그 옆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폭 끌어안고 싶다는 감정이 드는 것은 아마 날씨 탓이겠지.
벨프리가 괜히 파이를 입에 한가득 쑤셔 넣고 삼킨 다음 메인 목에 차를 들이부었다.
“갑자기 출산일은 왜 물어보십니까?”
“가급적이면 그 전에 헤네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요.”
“예?”
아직도 대놓고 움직이지 않는 파르만은 헤네켄의 정예군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마수를 보내왔다.
마수들은 미바리 숲 일대에서 발견되는 족족 병사들의 검에 죽음을 맞았다.
그것들을 죽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사납고 게걸스러웠지만 뭉쳐 다녔기 때문에 일단 발견할 수 있기만 하면 전부 토벌이 가능했다.
덕분에 칼 린드버그 앞에는 대량의 마정석이 쌓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마수들이 출몰하는 텀이 짧아지자 병사들의 피로도가 가중되었다.
더 이상은 가만히 보기만 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변경으로 직접 향하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마력 감응력이 뛰어난 그가 직접 현장을 보면 뭔가 다를까 해서였다.
“그것은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직 실마리도 잡지 못했는걸요. 파르만이 저러고 있는데 레아 공주님을 홀로 두고 가시면.”
‘왕자님 마음이 상당히 아프실 텐데.’
벨프리는 자신이 꼭 아드리안 같은 생각을 하는 것에 화들짝 놀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칼은 그저 ‘벨프리가 레아와 붙어 있더니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하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두 달 안에 파르만을 완전히 격퇴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대략 알 수 있겠죠. 지피지기 백전백태, 아니.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싸우면 백번을 싸워도 백번 이긴대요. 그러니 앞으로 한 달. 총력을 다해 그들의 검은 마음을 파악하고 남은 한 달간 대응책을 생각하면 얼추 마무리되지 않겠습니까?”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벨프리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헤네켄의 약혼 연회 내내 황후를 챙기는 모습을 심심찮게 봤던지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태자가 자리를 비운 시점에 또 다른 후계자의 등장을 경계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도 콩알만큼 있었다.
그러나 칼이 푹 한숨을 쉬며 하는 소리에 벨프리는 제 머리를 탁 때렸다.
“첫 출산은 아니지만 노산이라 걱정이 앞서는군요. 아이가 찾아온다는 기쁨과 별개로 황후 폐하께서도 많이 불안하실 겁니다. 그 고통은 낳는 사람 아니고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거라고 하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오죽 잘 하실까마는, 그런 때에 장남이 타국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라도 덜어 드리고 싶어요.”
종알종알 말한 칼은 벨프리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이쯤 되니, 왕자님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 척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제니스가 칼의 눈치를 볼 정도로 무례한 발언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제가 오지랖이 좀 심했나요?”
정작 칼 린드버그는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오지랖이 뭔지는 몰라도 벨프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벨프리는 왠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누가 포상이라도 내린답니까?”
제니스는 양 주먹을 쥐고 아래위로 흔들어 보였다.
최근 배운 멈추라는 뜻의 수어였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린드버그를 위해 위험한 짓을 도맡아 한 것은 그렇다 칩시다. 거기에 병사를 챙기고 황후 폐하를 걱정하더니 하다못해 쫓겨난 마녀까지 주워 오고.”
칼 린드버그는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연거푸 주먹을 흔드는 제니스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내리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아드리안 전하의 짝이 저라 생각해서 성을 떠났을 때도 그렇고 고작 신하인 제 목숨을 구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자꾸만 제 가슴을 쥐고 뒤흔드는 칼 린드버그가 미웠다.
어차피 아드리안 헤네켄 전하의 짝이다.
자신이 어떤 크기의 마음으로 칼 린드버그를 짝사랑하든, 자신은 주군의 상대가 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이 다정하게 굴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
괜한 화풀이를 한다는 자각이 있었으나 벨프리는 스스로 마음을 접는 방법을 몰랐다.
“자꾸 그러니까 아드리안 전하께서 불안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르십니까? 지금 왕자님의 몸에서 아드리안 전하의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을요!”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벨프리가 제 입을 틀어막았고 칼 린드버그와 제니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페로몬이 강한 아드리안의 곁에 십수 년을 머물렀어도 단 한 번도 그 향기를 맡아 본 적 없었다던 베타 중의 베타 벨프리가 어떻게 아드리안의 냄새를 안다는 것인가.
칼 린드버그는 괜히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창백하게 굳은 벨프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잊어 주십시오.”
성급하게 일어나던 벨프리의 눈앞이 흔들렸다.
꼭 그날처럼 머리가 아팠다.
벨프리가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리자 제니스가 먼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벨프리? 괜찮아요?”
칼 린드버그가 따라 일어나 벨프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도토리 키재기 같았어도 벨프리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작은 칼이 벨프리를 부축할 때 벨프리는 칼 린드버그의 가느다란 팔뚝이 저 때문에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괜찮으니 제 걱정은, 하지, 마. 십시오.”
벨프리가 칼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매일 단련을 멈추지 않는 칼 린드버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펜만 놀리는 벨프리가 이길 재간 없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불덩이 같아요. 벨프리 헨드릭.”
“모릅니다. 전 몰라요.”
“뭘 모른다는 말입니까?”
제 이마를 짚는 칼의 손을 꼭 잡고 벨프리가 연신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자꾸 잘해 주지 마세요. 기분이 이상해요.”
“벨프리, 잠시만 누워서 눈을 감아요. 제니스가 의원을 불러올 겁니다. 속이 메스껍거나 숨을 쉴 때 명치가 아프지는 않습니까?”
“의원이, 오면, 답하겠습니다.”
벨프리가 도리질을 쳤지만 칼이 아랑곳 앉고 숫자를 거꾸로 세어 보라 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저를 보면서 숫자를 세어 보세요.”
칼 린드버그는 싫다면서 제 손을 꼭 잡는 벨프리의 눈이 똑바로 떠지는지, 얼굴이 마비되지는 않았는지를 유심히 살피곤 단호히 말했다.
“어서!”
그 박력에 숨을 들이켠 벨프리가 칼 린드버그와 눈을 마주쳤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잘했어요. 악력도 이 정도면 정상이고.”
칼은 붙잡힌 손을 빼서 벨프리의 오금에 쿠션을 밀어 넣었다.
벨프리는 이제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잘해 주지 말아라. 기분이 안 좋다. 몸이 뜨겁다 어쩐다 헛소리를 하지만 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장시간 열이 지속되면 좋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던 찰나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의원이 조수 서넛을 달고 들어왔다.
뒤이어 물그릇과 천을 들고 들어온 제니스가 코를 쥐며 당황했다.
칼 린드버그는 그제야 벨프리의 몸에서 희미하게 아카시아꽃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아무래도 발현 같습니다.”
의원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마정석을 꺼냈다.
언뜻 보니. ‘구분하는 향기’라고 적혔다.
마정석의 종류는, 칼 린드버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과거 그가 린드버그에서 훔쳐 나왔던 옥새의 보관함에 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의원이 침을 꺼내어 벨프리의 손끝을 찌르고 그 밑에 마정석을 받치는 것을 보며 칼 린드버그는 마정석의 종류에 따라 마법을 발동시키는 데 필요한 매개체가 다르다는 것을 확신했다.
“오메가입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 상당히 우성에 가깝군요.”
의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칼의 얼굴색을 살폈다. 황태자와 벨프리가 친구 이상의 사이가 아니냐는 소문을 알음알음 들어서 알았던 터라 약혼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칼 린드버그는 “아픈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열은 얼마나 납니까?” 하고 물었다.
“빠르면 이틀, 길면 사흘입니다.”
칼은 벨프리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떼고는 회의실을 나오기 직전 제니스에게 지시했다.
“불덩이 같군요. 제니스, 벨프리의 온몸을 미지근한 물로 닦아 주세요. 찬물, 뜨거운 물 안 되고 체온보다 살짝 낮은 정도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