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84)화 (84/150)

코끝을 간질이는 꽃내음을 뒤로한 채 칼 린드버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직접적으로 맡아 본 것이 고작 세 번째였지만 벨프리의 페로몬은 예상외로 고혹적인 향이었다.

‘꽃나무, 그리고 숲이라니 궁합은 기가 막히겠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 연신 입맛을 다셨다.

가끔 아드리안은 그에게 제비꽃 향이 난다고 말했다.

제비꽃 향이 뭔지 정확히 맡아 본 적은 없었지만, 땅바닥에 딱 붙어 자라는 모양이라는 것은 알았다.

볕과 토양만 있으면 어디서도 잘 자라는 잡초 같은 꽃.

맡는 순간부터 풍부한 색으로 채워지던 벨프리의 페로몬은 아드리안의 페로몬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칼은 옷감에 쓸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허벅지 안쪽의 감각을 애써 떨쳐 보려 했다.

아드리안과 세 번째 밤을 보낸 것도 바로 어제였다.

홀로 떠나야 하는 불안감 때문인지 유난히 초조해 보인 그를 달랜다고 한 짓이 고작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밤새 어지러울 정도로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욱신거리는 아랫배를 누르고 이성을 찾느라 얼마나 노력했던가.

물론 그의 고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방망이를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스톱!”을 외치게 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칼 린드버그의 속도에 맞추며 평온을 가장하고 있는 아드리안이 사실 참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갈수록 집요해지는 밤의 관계로 눈치채고 말았다.

언젠가는 거칠 일이지만 생리적 두려움이 앞서고 마는 탓에 아드리안이 이 애들 장난 같은 스킨십으로 부족할지 모른다는 것은 간과했다.

아드리안은 물건이 아니라서, 이제 와서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었다고 해도 그에게 넘겨줄 순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감정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옮겨 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칼이 결국 입술을 깨물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냐고 벨프리는 물었다.

그 말은 칼 린드버그의 마음을 후볐다. 그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대놓고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벨프리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원래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고. 대답했을 터였다.

칼 린드버그가 자꾸 주변을 챙기는 것은, 그가 모르는 곳이면 모를까. 아는 선에서 누가 불행해지는 것이 못 견디게 싫어서였다. 그가 움직이면 충분히 좋은 쪽으로 바뀐다는 걸 아는데 가만히 있는 게 성에 차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만인에게 다정한 사람이 결코 좋은 연인이 아니라는 것도 칼 린드버그는 잘 알았다.

칼 린드버그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그가 되고 싶은 것은 아드리안의 연인인가. 소설 속의 정의로운 주인공인가.

“왕자님? 어디 가세요?”

나란히 우의를 걸친 마르코와 엘리자벳이 저녁 산책을 마쳤는지 돌아오다 말고 칼을 불러 세웠다.

“잠깐, 루루의 방에.”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칼의 뒤로 둘이 잽싸게 따라붙었다.

“예에? 마녀요? 잠시만요! 저랑 같이 가요.”

마르코가 우의를 벗어 던지려고 했지만 습기 때문에 피부에 달라붙은 우의가 잘 벗겨지지 않아 낑낑거리는 동안 칼은 저만치 가고 엘리자벳이 그 뒤를 쫓아가며 짖었다.

“왕!”

“자님!”

둘이 합쳐 ‘왕’ ‘자님’을 부르는 것이 철 지난 유행어같이 들려서 칼이 입술을 실룩이며 멈췄다.

“둘 다 당장 들어가서 따듯한 물로 씻고 머리와 털을 충분히 말리도록 해. 나는 그동안 루루의 방에 있을 거고 돌아오면 검사할 거야.”

“하지만, 혼자 가셨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제 그녀는 나한테 해코지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루루의 방 근처에 기사가 둘이나 서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칼 린드버그는 다시 붙잡힐세라 엘리자벳의 목줄을 마르코에게 쥐여 주고는 쌩하게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하지만!”

‘아드리안 전하께서 절대로 왕자님을 홀로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아우우우.”

주인을 놓친 두 생명체가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몸을 돌려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 * *

노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자 화들짝 놀란 루루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황급히 발치로 내렸다.

“베타가 형질자가 되려면 페로몬에 노출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칼 린드버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하자 루루는 갈라진 제 손톱 끝을 보았다.

“응. 그런데?”

“아주 많은 양의 페로몬에 갑자기 노출되는 것. 맞아?”

루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려면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거지?”

“응. 아무래도 그게 효과가 좋지. 왜? 페로몬 샤워라도 받았어?”

반짝거리는 루루의 눈동자와는 별개로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는 절망의 기운이 드리웠다.

일전에 루루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황태자의 생일.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밤을 보내야 하고 방대한 양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벨프리는 오메가가 된다.’

아드리안은 툭하면 칼과 시간을 보내려 했기 때문에 그가 벨프리와 밤을 보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린드버그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때? 단전이 막 화끈거리고 그래? 내가 하필 베타라 아쉽다. 네 몸에서 아드리안 전하의 냄새가 날 텐데. 자세히 좀 얘기해 줘 봐.”

방금 전까지 ‘아드리안X칼’의 소설을 쓰고 있던 루루가 신이 나서 물었다.

칼이 상세히 이야기를 해 준다면 소설을 쓰는 일에 박차가 붙을 거다.

이쪽에서도 통속소설이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떠돌이 악사는 어떻게 공작의 새장에 갇혔나.’ 같은 것들로 연명하곤 있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최애와 차애의 러브 라인이 깨지고 난 후로는 심란한 나머지 다시 소설 밖으로 튕겨져 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의 애정 행각을 실제로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은밀히 제 주머니나 침대 아래에 두었다가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던 것이다.

실존 인물을 상대로 소설을 쓰는 것에 취미는 없었지만, 그게 비엘 소설 주인공이며 맨날 액정을 핥아 먹을 정도였던 일러스트와 똑같이 생겼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루루의 질문에 칼 린드버그의 창백한 입술을 가르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벨프리가, 오메가가 됐어.”

“뭐?”

루루가 화들짝 놀랐다.

원작이 뒤틀린 것이 아니었나. 어째서 이 시점에 벨프리가 오메가가 된 거지?

그리고 칼 린드버그는 왜 저렇게 절망스러운 표정인 거지?

드라마틱하게도 밖에서 쾅쾅, 벼락이 떨어졌고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음영이 지는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벨프리가 오메가가 됐는데,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할 것 같아. 아드리안은 이제 벨프리를 좋아하게 되는 건가?”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칼의 말에 루루가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형질자는 본능이 앞선다며. 나는 그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아드리안에게 맞춰 주지도 못한 것 같아. ”

“첫 힛싸를 아드리안이랑 보낸 거 아니야? 그땐 뭐였는데?”

“우리, 그냥 물고 빨. 아니, 아니지. 별것 안 했어. 끝까지 가지도 못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갈증을 모르는 척하기 바빴다고 칼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았다.

솔직히 더럽게 쪽팔렸다.

동생일지도 모르는 애한테 오빠의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서.

그러나 주저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안 좋았고 상담할 사람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뭐야. 그럼 우리 아드리안 아직도 동정공이야? ’

루루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원래 페로몬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야? 상대방을 유혹하고 유혹당하고. 이성을 놓고 적극적으로. 네가 그랬잖아. ‘원래의’ 아드리안은 벨프리를 덮쳤었다고.”

“그러고 나서 징하게 후회하며 삽질하지.”

루루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게 없어. 솔직한 말로 아드리안의 페로몬 말고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희미하게 느낄 뿐이고. 히트사이클 때도 미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뿐인 것 같았어. 아드리안은 이런 내게 질린 건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던 루루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건 네가 먹던 약 때문이야.”

“뭐?”

“페로몬을 흐리는 약. 키치너가 왕비를 통해 네게 먹이던 것.”

“알고 있었어?”

루루는 칼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괜히 예언자고 마녀인 줄 아냐? 네가 먹던 약이 오랫동안 네 후각을 마비시키고 페로몬이 생성되는 기관을 망가뜨렸어. 키치너는 누군가 우성인 너를 채 갈까 봐 걱정했으니까. 원래라면 네 페로몬 기관은 영영 망가졌을 거야. 린드버그가 헤네켄과 줄다리기를 하듯 너를 두고 신경전을 하는 동안, 벨프리가 아드리안과 연결되고. 그 때문에 거의 미치광이가 되지. 키치너랑 억지 각인을 맺고 막판에는 임신을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키치너에게도 버림받아.”

칼 린드버그는 원작의 칼 린드버그가 정말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일은 나쁜 짓들이었지만 어린 칼 린드버그에게 그런 것을 가르친 것은 나쁜 어른들이었다.

“벨프리를 충동질해서 도망치게 만들고 도망친 곳에서 사람을 시켜 없애려고 한 것도 원래의 너지. 뭐. 결국. 아드리안에게 죽지만.”

칼 린드버그는 그제야 원작의 칼 린드버그의 영혼을 도닥였다.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괜한 말을 덧붙이긴 했는데, 그, 네가 지금 페로몬에 둔감하고 히트 사이클에 민감하지 못한 건 다 그것 때문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루루는 칼 린드버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칼은 루루의 어깨에 기댔다. 물론 그녀를 생각해서 완전히 체중을 싣지는 않았지만. 외로운 기분이 들어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루루, 결국엔 예언대로 흘러갈 건가 봐. 나는 아드리안을 두고 벨프리와 경쟁하고 싶지 않아. 그게 조금 슬퍼지려고 해.”

칼의 강아지 같은 눈망울과 오뚝한 코. 깨끗한 피부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던 루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뭘 이제 와서 벨프리와 네가 경쟁을 해?”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과 밤을 보내고 절뚝거리며 나왔다길래 당연히 한 줄만 알았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청승을 떨어 대는 걸까.

“아드리안이, 벨프리랑 잤나 봐. 나 몰래.”

뜬금없는 벨프리의 적의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탓이 아니었을까.

원작대로 흘러간다고 기뻐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불쾌해진 루루는 “그럴 리 없어.”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칼이 왜 죽상을 하고 들어왔는지 선명히 알게 되어 비싯 웃었다.

뭔, 삽질 같지도 않은 삽질을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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