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와 아드리안은 병사들이 미처 쫓아오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린드버그의 국경지대로 먼저 향했다.
당초에는 린드버그 중간 지점에 있는 영지로 향하려고 했지만 레아 린드버그는 연금 상태인 귀족들의 목을 좀 더 죄고 싶었다.
매일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따듯한 침실에서 지내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에 떨며 보낸 차가운 겨울은 그 나름대로 고문에 가까웠을 터였다.
하루 한 줌의 귀리와 벽돌 같은 빵을 지급하라고 한 것도 레아 린드버그였다.
헤네켄 제국에서는 레아가 마음을 결정하기 전까지 제국의 평민들이 먹는 수준의 꽤 괜찮은 식사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불만을 토해 내며 제국군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아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렇다면 린드버그 백성들이 어떤 식사를 하고 살았는지도 경험하게 해 주시죠.”라고 말했다.
귀족들이 연금되는 동안 그들에겐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지하 감옥에 갇힌 귀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난동을 부려도 누구 하나 꼼작하지 않았다.
레아는 그들에게 분노와 절망, 그리고 체념이 무엇인지까지 똑똑히 알려 줄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레아 린드버그가 돌아와 저들을 어찌할까 두려워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품을 그들에게 완전한 지옥을 보여 줄 예정이다.
“헤네켄에서는 저를 알파의 표본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 제 생각에는 공주님이 알파의 표본 같습니다.”
혼자 히죽대는 레아의 얼굴에서 잔인한 구석을 발견한 아드리안이 망토에서 물기를 털어 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태자 전하께선 사회성을 학습하셨잖아요. 저는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꼬박 스무 햅니다. 당연히 결이 다를 수밖에요.”
레아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검을 만지작거렸다.
선득한 레아의 표정에 아드리안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는 황태자 전하도 칼 앞에서 말랑말랑한 리코타 치즈처럼 구시잖아요. 눈은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해 가지고 몸짓은 어찌나 다정한지.”
칼 린드버그의 이름을 거론했을 뿐인데 보조개가 움푹 패도록 헤벌쭉 웃는 아드리안에게 레아는 똑같이 혀를 차 주었다.
“제가 멋대로 하면 그가 도망갈까 봐 그렇습니다. 솔직한 말로 요즘에는 앞뒤 안 가리고 각인해 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든데요. 피부가 연약해서 조금만 거칠게 굴어도 빨갛게 흉이 지는데.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러워 죽겠습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는 아드리안에게서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최근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를 볼 때마다 초조했다.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니 어디서 다른 알파가 꼬일지 몰랐다.
어설픈 알파가 접근한다 해서 쉽게 넘어갈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믿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칼이 아드리안을 달래고 몸을 맞댈 때 아드리안의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그가 알면 놀랄지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나 안심하며 동시에 절망하는지도.
아드리안은 가끔 생각했다.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 약속을 어기지 못해 체념하듯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그의 목덜미를 짓이기고 싶었다.
“기억을 잃은 탓인지는 몰라도 애가 순진해 보이지만. 알 건 다 아는 애니까 가끔씩은 본성을 좀 드러내며 살아요. 러트를 마정석으로 다스린 지도 벌써 몇 해입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 애 잡는다고 레아가 우려를 표하자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무섭게 만드는 것은 더 싫습니다. 이깟 페로몬에 동요해서 그를 몰아붙인다는 인상은 심어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하면 성욕, 식욕, 수면욕.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구를 느끼는데, 그때마다 그 위로 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욕구가 덧씌워졌다.
“참을 수 있습니다. 칼이 저와 같은 눈으로 보며 애원하는 날까지 기다릴 거예요.”
끈적거리고 어두운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발언에 레아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그러시든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 알파가 마주 앉아 서로를 벽 보듯 하는 찰나에 제임스 호거든이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그렇지 않다. 고 답하면서 한쪽 손가락을 쫍쫍 빠는 볼이 통통한 아이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이는 부끄러운지 제임스의 다리 뒤로 몸을 감추고는 눈만 빼꼼 내밀고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저희가 가지고 온 보온 마정석을 여기저기 나누다 보니 정작 두 분을 모시는 데는 미흡해서 송구합니다.”
빗줄기를 뚫고 변경에 도착했을 때, 제임스는 마을 촌장의 집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돌과 흙으로 마감한 방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워 두고 몸을 말리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제임스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성이 괜히 우성은 아니군요.”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제임스의 품에 폭 안겨서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아이가 아드리안이 저를 손끝으로 가리키자 “바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촌장의 손주입니다. 어찌나 순하고 귀여운지 요즘 푹 빠졌거든요.”
레아는 아이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고 아드리안은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어마, 부바바.”
아기가 웅얼웅얼하며 아드리안에게 양팔을 들어 보였다.
“안아 보시겠습니까?”
“아, 나는.”
아드리안이 멈칫하는데도 아랑곳 않고 제임스가 덥석 아이를 안겼다.
아이의 양쪽 겨드랑이에 어정쩡히 손을 끼운 채로 달랑 들어 올리자 아이가 발을 움직이며 꺄르륵 웃었다.
“귀엽지요? 아직 한 살도 안 되어서, 요만할 때는 개월 수로 나이를 셉니다. 열한 달 살았어요.”
“열한 달…….”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나이에 레아와 아드리안은 둘 다 탄성을 질렀다.
“아빠빠!”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드리안을 보며 박수를 쳤다.
“엉덩이를 받치고 이렇게 안아 주시죠.”
제임스가 손수 아드리안의 자세를 고쳤다.
“아기를 보는 데 익숙하시군요.”
“딸이 둘이나 있으니 당연합니다. 첫째는 이제 제법 잘 뛰어다니고 둘째는 언니가 하려는 건 뭐든 따라 하려고 해서 말리는 데 진땀을 뺍니다.”
아기의 파란 눈동자에서 연인의 모습을 떠올린 아드리안은 홀린 것처럼 볼을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쓸어 보았다.
무게감이 거의 없는 작은 생명에게서 콩콩콩 심장 박동이 들려왔다.
아드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칼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 아이를 낳아 줘.’라고 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이란 이런 거구나.
“아빠. 아빠. 엄마. 엄마. 하면서 말도 어찌나 잘하던지. 처음 만났을 땐 목도 못 가누는 데다 팔다리가 앙상한 아기라서 곧 죽겠다 했었습니다.”
제임스는 자신이 아이 아빠가 되고 나니 세상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예쁘다고 했다.
아드리안은 칼의 영혼, 그러니까 이전의 칼 린드버그에게도 이만한 아이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아이를 상대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임신과 출산에 대해 해박하고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것을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마을에만 이만한 아이들이 열댓 명 됩니다. ”
“열댓 명이요?”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 만하다는 식으로 제임스는 쓰게 웃었다.
“참으로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척박하고 엉망인데 아이들은 계속 세상에 태어납니다.”
제임스는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이만큼 태어나도, 어른이 되는 아이들이 고작 반이라고…….”
레아가 이를 악물었다.
대륙에서도 손꼽는 영아 사망률은 린드버그의 치욕이었다.
대부분의 자원과 의술, 그리고 인력이 귀족에게 집중되고 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아드리안은 어느새 자신의 품에 뺨을 기대고 꿈뻑꿈뻑 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음을 느꼈다.
생판 남인 아드리안도 그러할진대, 작지만 활발한 이 고동 소리가 멈추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랴.
아드리안은 칼의 의협심도 이런 감정 때문에 생기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이해했다.
“제국군이 린드버그에 들어왔을 때 모두 양손 들고 환영하고 싶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나지막한 레아의 음성에 아드리안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두 번은 되풀이하지 않을 겁니다. 과거의 영광 따위 필요 없이. 린드버그의 사람들에게 양분이 되는 빛을 찾아줄 거예요.”
레아의 주먹 위로 힘줄이 튀어나왔다.
“예정을 바꿉니다. 변경에서부터 모든 영지를 거쳐 왕도로 돌아갑니다.”
“네?”
제임스가 화들짝 놀랐다. 전국을 일주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영지에 들를 때마다 정신적, 육체적 소모를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몇 곳으로 추린 것인데.
“공주님, 공주님께서 아무리 우성 알파라곤 하지만.”
“제임스 호거든.”
아드리안은 제임스의 주제넘은 참견을 저지했다.
레아의 눈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쭉정이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 낼 참이에요. 제국군이 차려 놓은 식탁에 포크만 얹는 것도 지겨운 참이었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드리안이 장단을 맞추자 레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영토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이 오늘처럼 반가운 날이 없군요. 이렇게 좁은 곳에서 멧돼지들이 활개를 치니 피다 만 꽃들이 밟혀 죽지 않았겠습니까.”
맹금-猛禽-의 날개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펴지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등을 도닥이면서 이 아이의 미래가 더 이상 어둡지 않을 거라는 것에 비싯 웃음이 나왔다.
칼 린드버그.
네가 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지 이젠 알 것 같아. 나 아닌 사람에게도 자꾸만 관심을 주는지 알 것 같아.
너와 나 사이에도 언젠가 작은 인간을 두고 그 미래를 점치는 날이 오겠지.
우리가 죽고 없어진 그때에도 이 아이들은 살아가야 하니 그런 것 맞지?
아드리안은 레아가 멧돼지를 낚아채는 동안에 근방에서 기웃거리는 뱀을 잡아 족쳐야겠다 생각했다.
제임스는 아드리안이 레아의 무모한 계획에 동조하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변경까지 달리는 데 만 하루가 지난다. 그 길을 다시 동서남북으로 되짚으며 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내일 아침부터 레아의 뒤를 따라야 하는 병사들의 곡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