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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86)화 (86/150)

“피부, 심장 박동, 혈액처럼 생명을 매개로 발동하는 마정석은 본디 순도가 아주 높아야 합니다. 불순물이 없어야 마력이 안정적으로 담기고 그만큼 수식을 발동시킬 때 오류가 적어지죠.”

마정석 연구에 있어서는 평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드람뷔 자작이 파르만에서 생산된 마정석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순도가 높으면 가죽이나 소금물처럼 비슷한 파장의 다른 매개체로도 충분히 마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순도가 높은 마정석을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다른 광물을 덧대어 마력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순도 부족에 관한 부분을 보완했죠. 헤네켄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연구를 이미 마쳤습니다. 파르만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정석을 만들어 내는지는 모르지만 결정이 일정치 못한 탓에 안정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테죠. 그래서 피부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을 사용한 듯합니다.”

칼 린드버그는 기계적으로 메모를 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엉망이었다.

벨프리는 꼬박 이틀을 발현열로 앓았다.

밥도 못 먹고 헛소리를 해 대는 벨프리의 몸에서 페로몬이 절절 흘러 벌레가 꼬일 지경이 되자 칼 린드버그는 제니스와 베타 의원, 그의 조수 그리고 본인을 제외한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을 만들고 벨프리를 직접 간호했다.

땀에 젖은 벨프리가 가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칼을 향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좋아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열망에 애처롭기까지 한 그 시선을 받으며 칼은 벨프리가 아드리안에 대한 짝사랑을 드디어 자각했다고 확신했다.

열로 마른 입술에 물에 적신 천을 가져다 대며 칼은 애써 모른 척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아드리안의 넘치는 애정이 고마웠던 것과 별개로 아직도 어색하다고 미적지근하게 굴었던 건 칼 린드버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아드리안과 벨프리가 함께 밤을 보냈기 때문이라 의심하기 시작했더니 발밑이 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 어떻게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막말로 화장실 가고, 밥 먹을 시간만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피울 수 있는 게 바람이다.

대체로 아드리안은 칼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것이 24시간 전부를 붙어 있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고. 내가 너와 약혼을 한 것이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새 벨프리를 오메가로 만드냐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아드리안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마침내 원작대로 흘러갈지 모르는 스토리와 무엇보다 그것을 바랐을 루루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이 벨프리랑 잤나 봐.〉

라고 묻는 칼의 질문에 루루는 대답을 미뤘다.

〈내가 여기서 그거 아니라고 말해도 네가 믿겠어? 그냥 아드리안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루루는 칼 린드버그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정체가 모호한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면서 아드리안에게 따져 묻기를 머뭇거리는 자신도 있었다.

물어볼 수 있겠냐. 마음이 옮겨 간다면 보내 줘야지. 이게 단순히 심리적 바람이냐 육체적 바람이냐 하고 묻는다면 칼 린드버그는 바람이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칼이 생각했을 때 아드리안과 자신의 관계가 다소 애매했던 탓이었다.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기엔 아드리안이 칼에게 주는 애정의 크기가 훨씬 컸고 칼은 인간적인 호의가 앞서 맞춰 주던 것 아니었나.

따지자면 아드리안의 ‘원래’ 짝은 벨프리가 맞았으니까. 칼 린드버그가 그 사이를 훼방 놓지 않았다면 자연스레 일어날 일이었다.

변경에 있는 아드리안은 아직 벨프리가 오메가가 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제임스의 영상구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하루 한 번 당장 급한 전언 외의 다른 것들을 전하기엔 시간도 마력도 부족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드리안은 당황할까. 아니면 미안해할까.

이도 저도 아니면 기뻐할까.

의외로 대쪽 같은 성격이니 칼 린드버그와의 약혼을 유지한 채 벨프리를 후처 따위의 자리로 놓을 리는 없을 테지.

그렇다면 칼 린드버그는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덤덤한 척, 쿨하게 아드리안의 손을 놓으며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해 주면 되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애먼 상상의 나래까지 펼친 칼 린드버그는 그것 또한 질투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저 당초에 우려했던 대로 세상 이치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려니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걸까.

“왕자님?”

드람뷔 자작이 왕자를 부르자 칼이 번뜩 생각의 늪을 헤쳐 나오며 제 뺨을 때렸다.

자작이 놀라든 말든 연거푸 제 뺨을 때린 칼이 붉어진 뺨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칼 린드버그가 한숨을 폭 쉬자 드람뷔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혈관이 마정석에 엉겨 붙어서 염증을 만들어 내거나 증폭이 심화되어 엉뚱한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마정석이 제대로 발동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죽었을 겁니다.”

마수만 죽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인간에게 직접 실험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칼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수식 한 줄을 한 마정석에 입력하지 않은 것은 그런 오류를 줄이기 위한 시도로도 보이는군요.”

“맞습니다. 혹은 염증이 발생해서 피부를 도려내야 할 때 적당히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기도 하고요.”

끔찍한 소리다.

“마수들이 다 온전치 못한 모습이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요.”

칼이 말하자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정석을 생산하기 위해. 혹은 실험을 지속시키길 개체를 보존하기 위해 인공 번식을 했거나 식시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식시귀요?”

칼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식시귀, 흔히 구울이라는 말로 많이 표현되고 시체를 먹으며 좀비처럼 살아나길 반복하는 그것을 말하는 건가.

“네. 시신을 먹고 거기에 맞춰서 신체의 부족한 부분을 재생시키며 살아나는 것들 말입니다.”

칼 린드버그의 황망한 표정을 보며 자작이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일반적인 짐승이라면 시체를 먹이로 준다고 해서 식시귀가 될 수는 없지만 마수는 가능할 겁니다. 여신에게 배척당해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데다 종에 따라서 대단한 마력을 지닌 녀석들도 있으니까요. 마정석도 그렇게 만들어지니까요. 결국엔 생명력을 담보로 마법을 취하는 꼴입니다.”

생명력. 그렇다면 이 마정석들도 어떤 마수의 생명이었던 것일 테지.

칼 린드버그가 파르만의 마수에게서 채취한 마정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마정석을 쥐었다.

처음 ‘타오르는 장작’에 힘을 실었던 때를 떠올리며 집중하자 일전에 느꼈던 떨림이 느껴졌다.

불규칙한 박동과 함께 미지근한 감촉이 전달되었다.

그것이 미묘한 불쾌감을 선사하여 칼 린드버그는 더 느끼기를 관두고 손을 뗐다.

마력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지지 못한다. 그 탓에 감으로만 알고 있는 그 무형의 힘이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그걸로 기묘히 뒤틀린 생김새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수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에 식시귀가 나타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헤네켄에서는 식시귀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합니다. 그러나 일대를 전부 뒤져서 식시귀 전부를 소탕하는 일은 없습니다. 인력이 워낙 축나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그 말인즉, 인간도 마력을 지니고 있으면 식시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드람뷔 자작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칼은 입술을 뜯으며 다시 물었다.

“마력을 지닌 인간이 꾸준히 마수의 시체를 먹으면 구울, 아니, 식시귀가 될 수도 있는 겁니까?”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만에서 마수와 더불어 인간 식시귀를 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쪽에 형질자가 몇이나 있는지는 몰라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안타까운 말씀이지만 왕자님. 인간은 대부분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극소량이냐 소량이냐, 대량이냐, 극대량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칼 린드버그가 입을 떡 벌렸다.

“그 말은 모두가 형질자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까?”

자작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베타와 베타 사이에서도 드물지만 형질자가 태어나는 것일 테죠. 아. 물론 여신의 축복과 상관없는 소수의 민족들은 형질과 관계없이 살아간다고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입니다.”

“파르만도 여신과 관련이 있습니까?”

“대륙 중부 일대는 거의 관련이 있습니다. 파르만도 국경을 봉쇄하기 전까지는 이주민을 받았으니 헤네켄과 린드와이어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칼 린드버그는 이 소설이 도대체 무슨 세계관을 가진 건지 그제야 의문을 품었다.

밝고 명랑한 사랑 소설인 줄만 알았는데 남자가 임신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구울까지 등장시킨다고?

칼 린드버그는 원작을 알고 있을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정석이 마력을 지닌 마수의 시체가 부패하며 생기는 화학적 반응으로 생성된다는 걸 가정하면, 그들은 발밑에 마수의 시신을 쌓아 두고 있겠군요. 그걸로 식시귀를 만들고 마정석도 만들고.”

혹은 인간의 시신을 쌓아 두었거나.

“맞습니다. 왕자님 말씀을 들으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군요.”

드람뷔 자작은 심각한 표정을 했다.

“식시귀가 같은 식시귀를 먹어 마력을 보충하거나 마물을 상대로 포식하면 더 힘이 강해질 겁니다. 마력을 지닌 인간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어째서 미바리 숲을 근거지로 정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가 가슴팍을 뒤적여 주먹만 한 영상구를 꺼냈다.

“황제 폐하께 당장 전언드려야겠습니다.”

칼 린드버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에게도 식시귀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문득 칼 린드버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마정석을 더듬었다.

제임스 호거든의 영상구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아드리안과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며 징징거릴 타이밍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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