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구가 종료된 후 공작은 집무실 의자에 등을 걸치며 끌끌 혀를 찼다.
“무슨 일이오? 벨프리한테 무슨 문제라도?”
발베니 대공이 뜨거운 차를 들고 들어오다가 공작의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벨프리가 문제가 아니라, 칼 린드버그 왕자님 문제야.”
“아…….”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공이 집무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벨프리가 출국하는 기간에 맞춰서 상단과 함께 나갔다가, 막내아들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째서 린드버그가 아니라 집으로 왔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오메가가 된 아들 걱정보다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룰 공작을 걱정해서였다.
“그 왕자가 왜?”
대공은 공작의 뺨을 쓸었다.
매일 붙어 있어도 그리운 사람의 살결은 대공의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와 따듯한 체온에 불쑥 성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대공은 그를 책상에 눕히는 대신 연거푸 뺨을 쓸었다.
“각인이 어떤 느낌이냐고 묻더라고.”
어떻게 하냐, 가 아니라 어떤 느낌이냐 물었다.
“각인을 하면 세상이 달리 보이냐 물었어. 그것이 사랑을 만드냐고도 물었고.”
각인을 하면 사랑하게 되냐는 왕자의 원초적 질문에 헨드릭 공작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각인과 사랑은 동일시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동시에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기도 했다.
영혼과 영혼의 결합이었고 평생 너 아닌 다른 사람은 보지 않겠다는 유형의 약속이기도 했다.
헨드릭 공작의 목 뒤에 남은 잇자국은 사랑의 증표였고 속박이었다.
처음부터 대공만 사랑했고 그로 인해 각인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공작으로서는 무어라 대답하기 어려웠다.
각인이 오메가에게도 알파에게도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헨드릭 공작은 제 아들도 아닌데 칼 린드버그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신경 쓰여 영상 너머 그의 어깨를 도닥이듯 팔을 뻗다가 내려놓았었다.
〈각인은 각인일 뿐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내지는 않아요. 육체적인 끌림과 사랑을 구별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공작의 애매한 대답에 칼 린드버그는 붉어진 흰자를 감추듯 눈을 감았다.
“두려운가 보오. 당신도 그랬잖소. 각인하기 직전에 가출한 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알이 뒤집힌다고 말하는 대공의 말에 공작이 입술을 삐죽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뭘 얼마나 나가 있었다고.”
“집 나간 지 하루 만에 엉엉 울며 제 발로 들어온 것도 가출이라고 하면 가출이지.”
헨드릭 공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막내아들이 곱게 자라 눈치가 없다고 뭐라 하긴 했다만 왕년에는 본인도 만만치 않게 눈치가 없었다.
선 결혼 후 각인이 당연시되는 헤네켄에서 공작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집을 나갔다가 추위와 배고픔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 솔직히 춥지는 않았는데. 처음 느껴 본 여관방의 부스럭거리는 침대와 벽이 차갑게 느껴졌었다.
돌아오자마자 활자 그대로 눈이 돌아간 대공에게 붙들려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것도 지금 생각하니 귀여운 수준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만 하루도 안 되어 배우자가 집을 나가는 것을 본 대공의 마음고생에 비하면 말이다.
“생리적인 두려움이라고 하잖소. 각인이 어찌 보통 일이던가. 나도 두려웠소.”
대공의 뜻밖의 말에 공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이?”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기울여 공작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응, 사실이오. 혹시 당신이 각인을 꺼리는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사람이 올까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헛소리!”
대공의 말에 공작이 그의 가슴을 밀며 뒤로 몸을 물렸으나 되레 대공의 손에 자리에서 일으켜졌다.
“나는 지금도 두렵소. 사랑하는 만큼 두려움이 커지고 어느 날 당신의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을지 매일 망상을 해. 이것도 병일 테지. 그것을 참아 내는 게 내 과제요.”
와락 끌어안긴 공작은 대공에게서 풍기는 체취에 미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이 남자는 이렇게 행동으로, 말로, 페로몬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1년에 몇 개월을 떨어져 있어도 헨드릭 공작은 안심할 수 있었다.
“반백 년을 살아온 나도 이럴진대, 아이들이라고 오죽할까. 당신도 잘 알잖아요. 각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해 줄걸 그랬어.”
대공의 가슴에 기댄 공작은 눈을 깜빡거리며 왕자의 잔상을 새겼다.
“자연스레 깨달을 거요. 우리가 그랬듯이.”
사랑은 생각만큼 달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다.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상처 주던 한때도 있었고 사랑이라는 이유를 들어 서로를 구속하지 못해 안달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바뀌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던가.
발베니 대공은 헨드릭 공작의 일과 충성을 존중했고 헨드릭 공작은 대공의 집착과 인내를 인정했다.
한 사람이 한 걸음 내디딜 때 보폭을 맞춰 걷는 방법을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터득했다.
착오를 겪는 그 당시에 둘 중 하나라도 욕심을 부렸다면 지금의 평화와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헨드릭 공작은 칼 린드버그가 가진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아드리안이 빨리 해소시켜 주길 바랐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갈등은 없던 감정의 골도 만들어 내니까.
“고통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할 거요. 각인처럼.”
대공의 묵직한 음성이 공작의 귀를 파고들었다.
매번 헨드릭을 안심시키고 전율하게 하는 목소리다.
몸을 부르르 떤 공작이 대공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었고 대공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겹쳤다.
양손을 겹치고 왈츠를 추듯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긴 입맞춤 후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발베니. 우리 아들이 공왕비가 되면 어떨 것 같아요?”
뜬금없는 헨드릭의 말에 발베니가 멈칫했다.
“나쁘지는 않지만, 황제가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아무래도 인재 욕심이 많으신 분이라.”
애매한 미소를 짓는 공작을 번쩍 들고 침실로 향하며 대공은 “린드버그의 공왕이 되자마자 어마어마한 혼수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어.”라고 중얼거렸다.
* * *
칼 린드버그는 린드버그 왕성에서 유례없이 쓸쓸하고 괴로운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비척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털썩 누워서는 애꿎은 마정석만 만지작거리는 왕자에게 결국 마르코가 한 소리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벨프리 공자님께 꼭 들를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걱정되는 걸 어떡하냐.”
“왕자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의원이 알아서 잘해 줄 겁니다. 제니스 누님도 마찬가지고요. 공주님이 발현열을 거하게 앓을 때에도 홀로 그분을 지켜 냈다고요.”
칼의 우울감이 단지 피로에 국한된 것이라고 단단히 착각한 마르코는 사서 고생하는 왕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 나도.”
자꾸만 발걸음이 벨프리에게로 향하는 것이 순수하게 그를 걱정해서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혹시. 아드리안 헤네켄을 좋아해?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수척해진 얼굴로 입술을 다무는 그를 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좋아한다고 그러면 뭘 어떻게 해 줄 건데.
잘됐네, 아드리안의 원래 짝은 너였어. 하며 박수 치고 퇴장하기에는 칼 린드버그의 마음이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듯했다.
그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루루에게 단언한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마르코.”
“왜요?”
날이 점점 풀리는 듯 풀리지 않는 듯 일교차가 큰 날씨 탓에 왕자의 실내복 위에 두르는 망토를 손질하던 마르코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체불명의 짐승의 털로 만든 망토는 하얗고 폭신폭신한 것이 왕자님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지만. 방에 있으면 바닥 생활을 자꾸 하는 왕자의 습관 때문에 툭하면 엉켰다.
그런 망토를 그대로 왕자에게 두르게 하는 것은 마르코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마다 빗질을 하는 것이 일과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엘리자벳의 털도 빗고, 망토의 털도 빗고.
털 관리의 장인. 빗질의 장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만약에 내가 헤네켄의 황후가 아니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는 걸까?”
무심하지만 묵직한 질문에 털털털, 하고 중얼거리던 마르코가 빗을 툭 떨구었다.
“또, 그 소리세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왕자님.”
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질문이었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왕자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냥, 궁금해서.”
침대 아래에 엎드려 있던 엘리자벳이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낑낑거리며 왕자의 겨드랑이에 파고들려는 개의 체중에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것을 보며 마르코는 엘리자벳이 아직 성장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쓸데없는 생각보다 왕자의 풀 죽은 목소리가 먼저였지만.
마르코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로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빵집 아저씨가 되겠다는 꿈을 아직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 그건 진작에 버렸는데.”
그래서 더 갈피를 못 잡겠다고 왕자가 중얼거렸다.
엘리자벳은 끈질기게 왕자의 얼굴을 핥았다.
그 통에 얼굴을 든 왕자의 뺨이 심상치 않게 창백했다. 얼굴만 창백한가. 눈 아래가 도톰하게 부풀고 코끝은 붉었다.
곧 한바탕 울 사람 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왕자님.”
왕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애인이 바람을 피운 것 같다고 하소연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몸이 오메가가 되더니 정신도 오메가가 되었나.
마르코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왕자가 엘리자벳의 털을 쥐고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처량했기 때문이었다.
“왕자님. 이야기를 해 주셔야 제가 알아먹지요. 무슨 일이세요. 네?”
평소의 왕자를 흉내 내며 등을 도닥이는 마르코에 서투른 손길에 칼의 코끝이 겨자를 먹은 사람처럼 싸하게 아팠고, 동시에 눈물이 톡 터졌다.
평생 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재영이 때문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칼 린드버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자 마르코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까지 어떤 역경이 있어도 울지 않았던 왕자였다. 일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코는 공포에 질려 함께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칼 린드버그가 이제는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애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자각했다.
칼 린드버그가 악역을 관둬서. 아드리안 헤네켄이 행복해지려면 우성의 오메가가 필요하다기에 선심 쓰듯 곁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인간 칼 린드버그에게도 아드리안 헤네켄이 필요했다.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 헤네켄을 진심으로.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