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린드버그가 제 마음을 자각하면서 눈물을 쏟고 있을 때 변경에 있던 아드리안은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영상구의 금이 심해졌다고?”
아드리안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멀쩡하던 영상구에 갑자기 금이 갔다. 처음에는 실금 수준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오늘 아침에는 결정 표면이 보이는 수준이었다.
급속도로 차갑게 굳어지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면서 제임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더 사용했다가는 박살이 날 것 같습니다. 헤네켄에 예비 영상구를 요청하긴 했지만 도착하려면 이틀은 걸린다고 합니다.”
소지자의 주변 환경을 그대로 비추는 영상구는 시동자도 받는 사람도 마력을 직접 주입해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마정석과는 달랐다.
만드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어려운데다, 모두가 소지할 수 없어서 당장 연락을 취해야 하는 거점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단 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었다.
칼 린드버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상구는 마법의 ‘끝판왕’이었다.
영상구를 통해 얼굴을 보고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놓고 흥분하는 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드리안조차도 멀찍이 떨어진 연인과 영상구 너머로 애틋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을 기대했었다.
“비상용 영상구를 하나 더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 아시다시피 그것은 황실 중앙 상비군에게만 연통이 닿는지라…….”
아드리안의 미간이 왜 구겨지는지 아는 제임스가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삼갔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아 긴장한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까지 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챈 아드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었소. 내게도 비상용 영상구뿐이니. 그나마 무슨 일이 있으면 황실을 통해 전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는 칼 린드버그를 보지 못하는 초조함을 잠시 내려 두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아드리안이 기세를 누그러뜨리자 제임스가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쉬며 병사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칼 린드버그에게 영상구를 쥐여 주지 않았던 내 탓이다.’
그가 변경에 머무르기로 한 시간은 고작 사흘.
그 사흘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것이 아드리안의 안일함이었고 실수였다.
영상구가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한들 명색이 황태자인데다 마정석 연구가인 아드리안에게 여분의 영상구가 없었겠느냐는 말이다.
칼 린드버그와의 달콤한 시간에 취해 긴장의 끈을 놓은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레아 린드버그가 다른 영지로 움직이자마자 영상구에 금이 가 사사로운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된 것만으로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시점에 마물 떼가 불쑥 미바리 숲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말이다.
미바리 숲을 철통처럼 수비하고 있는 경비대가 수상한 진동을 감지하고 재빨리 움직였지만 역부족일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이 많은 마수들이 어디 숨어 있다 나왔는지 구태여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은 땅을 파고 기어 나왔다.
하나같이 기괴한 생김새로 제 살갗이 다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흙을 파 구멍을 낸 뒤 솟구쳐 올랐다.
처음에는 새로운 은신술을 배웠을 뿐이라 짐작했지만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꼴을 보며 아드리안은 지상으로 이동한 마수가 미끼일 뿐이고 지하에서 별도로 갱을 판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 안 그래도 드람뷔 자작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마수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식시귀일 것이라고요.
헨드릭 공작의 연락이 오기 전에 먼저 연락을 취한 버번 백작이 말했다.
그 한 줄의 설명으로 마수들의 뒤틀린 생김새와 일정치 못한 마력을 이해한 아드리안은 미바리 숲에 경계를 두고 있는 모든 마을에 비상령을 내렸다.
아드리안도 책으로만 보았지 실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반은 생물이고 반은 죽은 자인 식시귀들은 주로 시체를 먹기 때문에 ‘식시귀’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식시귀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살아 있는 인간의 살과 피였다.
그러니 숲과 마을 사이에 거리가 있다곤 하나 마을이 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근거지를 원천 봉쇄해야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병력으로는 주변 마을에 비상 경계 근무를 세우고 쏟아져 나오는 마수 떼를 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가장 늦게 출발한 아드리안은 순식간에 선두로 치고 나와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좌측에 장검을 차고 있으면서도 레이피어를 쓰는 건 순전히 그가 열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후회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드리안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상비군과의 연락과 더불어 오늘 아침에야 아드리안에게 전달되었다.
칼 린드버그를 제외한 모두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말했다.
애초에 부모가 모두 우성 형질자인데, 그 밑에서 베타 자녀가 태어난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결합하면 무조건 형질자를 낳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지만 지금 와서는 그것도 아니었다.
자녀가 둘 이상일 경우, 그중 하나가 베타로 태어나는 일이 점점 많아졌으니까.
글렌 황제는 그것이 형질자의 도태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단언했고 아드리안도 수긍했다.
일부의 베타가 뒤늦게 형질자로 변하는 것은 페로몬 작용의 일종으로 드물지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별 감흥 없이 건넨 아드리안의 축하에 헨드릭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헨드릭 공작은 벨프리보다 칼 린드버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많이 불안해 보이셨습니다. 본인을 베타처럼 여기는 분이라 그러신 건지, 형질자로 발현하는 모습을 처음 보셔서 그러신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려운 시기지만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 칼 린드버그를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헨드릭 공작의 어두운 표정에 아드리안의 눈앞이 샛노랗게 변했다.
이런 식으로 발이 묶일 줄 알았다면 칼 린드버그를 데리고 오는 거였는데.
아니지, 데리고 왔다가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그것이 문제지.
하지만 아드리안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더.
오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아드리안은 오랜만에 제 안에 있는 광기를 꺼냈다.
황태자로서의 덕목 중 한 가지인 ‘감정적으로 굴지 말 것.’에 대한 엄격한 교육 덕에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레이피어는 거짓말을 못 했다.
마법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마수의 미간을 직접 찍어 내린 아드리안의 잔인함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아드리안이 날고 기는 우성 알파에 무도로 단련된 몸이라고는 해도 실전에서 피를 보면 머뭇거리기 마련이었다.
첫 전장에서 생명을 상대로 이렇게 무식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간 억눌려 있던 본성이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알아차렸다.
기에에엑!
“쯧,”
거미처럼 다리가 네 쌍이나 달린 생물이 아드리안에게 덤벼들다가 순식간에 머리가 잘려 나갔다.
가장 후미에 달려 있는 뒤틀린 두 개의 다리가 꿈틀거리다 움직임이 멎는 것을 보면서 아드리안이 피를 탈탈 털어 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며 이 아수라장을 지나쳐 성벽으로 향하는 놈은 없는지 살핀 아드리안은 제 뒤쪽으로 레이피어를 던졌다.
등 뒤에서 팡, 소리가 나며 마수의 살점이 아드리안의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끈적거리는 피와 살점의 감촉이 그의 기분만큼 더러웠다.
“하!”
어느새 레이피어는 다시 아드리안의 손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손에 쥐어지는 금속의 감촉에 아드리안 헤네켄은 변경으로 떠나기 전날 밤 칼 린드버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동으로 주인한테 복귀하는 레이피어라고? 꼭 묠니르 같네.〉
〈묠니르가 뭔데?〉
〈그, 어떤 신이 쓰는 망친데. 걔도 주인이 부르면 돌아옴.〉
〈뭐 하는 신인데? 이름이 뭐야?〉
평소에는 자기 이야기를 아끼는 주제에 밤에 알몸으로 붙어 있을 때만 경계심이 낮아지는 칼에게 아드리안은 때를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이름이 햄스워즈? 아, 아니다. 토르! 근데 진짜 신이 아니라 가상의 신일걸?〉
칼은 홍조로 가득한 뺨에 피곤으로 가물가물 눈을 깜빡이면서도 신나게 설명했다.
번개를 쓰는 금발의 아저씨인데 몸매가 끝내준다며, 자기도 ‘토르’가 되고 싶었다 말한다.
울면서 찾을 정도로 애틋한 여동생에 이어 ‘가짜 신’까지 경계해야 하는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물렁한 제 팔뚝을 만지며 근육 타령을 하는 폼이 얄미워 볼을 깨물었었다.
신이라기보단 인간의 영웅에 가까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였다고 덧붙인 칼이 아드리안의 레이피어를 쓰다듬었다.
〈이름 지어 주자. 묠니르라고.〉
그래 놓곤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구각을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물줄기가 흐르는 걸 몽롱한 시선으로 훔치던 아드리안은 곧 실소했다.
〈남이 쓰던 이름이라 좀 그런가? 기분 나쁜 거 아니겠지.〉
물건이 제 이름을 알아들을 리 만무하건만 칼 린드버그는 진지하기만 했다.
〈네가 붙이면 좋아할 거야.〉
누가 붙인 이름인데 싫어도 좋은 척해야겠지. 레이피어가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그래? 그럼, 묠니르야. 잘 부탁한다. 우리 아드리안 잘 지켜 줘.〉
실없는 소리를 해 놓고 뒤늦게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는 칼 때문에 아드리안의 콧구멍이 실룩거렸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내 짝이라니!
결국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를 다시 제 품에 가두고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칼 린드버그의 원래 세상에선 왜 가상의 신 따위를 만들어 영웅으로 섬기는가. 아드리안은 잠시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칼 린드버그가 자각 없이 경계를 낮추고 진짜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속절없이 가까워지는 기분에 행복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고! 망할 마수! 망할 파르만! 망할 키치너!’
속이 부글부글 끓든 말든,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어서 더 공포감을 조장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묠니르가 춤을 출 때마다 하늘로 피가 솟구쳤다.
정신없이 검을 쓰고 마정석을 소모하며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황태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전투가 길어지면, 아니. 왕자님을 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우리까지 죽은 목숨일지도.’
평소 상식적이라 주변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아드리안이었지만 우성 알파의 진짜 폭주는, 상식 밖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괜히 우성을 떠받들겠는가 말이다.
어느새 아드리안 주변에 식시귀의 시체가 산을 이뤘다.
그 가운데에 피투성이의 아드리안이 서서 숨을 잠시 고른 뒤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망토를 집어 대충 얼굴을 닦아 냈다.
약혼식 이후 황태자와 왕자의 모든 의복에 신중을 기하여 두 마리의 늑대 문양을 새긴 디자이너가 보면 통곡을 할 장면이었다.
아드리안은 핏발 선 눈으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까지 전방에 있었던 부대는 마을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병력을 재정비하십시오. 그리고 후방은 다시 전방이 되어 이곳에서 야영을 합니다.”
정작 본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셔츠를 들추며 부상을 확인했다.
황태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기사가 조심스레 아드리안을 불렀다.
“전하께서도 후방으로 가시지요. 이틀이나 밤을 새우셨는데.”
그러나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얼굴에서 일순 황태자의 잔혹함을 엿본 병사들이 멈칫했다.
“나는 여기 남을 것입니다. 싹 다 죽이고 내일 저녁 린드버그 왕성에서 만찬을 가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