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네켄 황성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린드버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때그때 넘어오는 만큼 제국의 수뇌부는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다.
내각 총리대신인 헨드릭 공작은 수면 위에 있는 백조처럼 우아하게 집무실을 지켰지만 매일 수북하게 쌓인 서류의 양이 그의 바쁨을 증명했다.
파르만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이 린드버그가 아닌 헤네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헤네켄의 국방을 책임지는 버번 백작의 집무실에는 벌써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글렌 황제는 대사제와 독대를 하는 중이었다.
큰일을 앞두고 대사제가 그와 한가로이 차나 마시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글렌에겐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뭘 하나 했더니 개미굴을 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황후 생각만 하기도 모자란 하루에 파르만까지 신경 쓴다는 게 못내 짜증 난다는 말투다.
대사제 다니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런 글렌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되십니까?”
제국 자체가 여신의 축복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만큼 황제는 대사제를 스승처럼 받들며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의논했다.
대사제는 황제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황제 버금가는 권력자였지만 양쪽으로 거대한 제국을 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황제를 존중했다.
신전과 황실은 유기적으로 얽힌 관계였고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였다.
“그건 아닙니다.”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다니엘의 자애로운 미소에 글렌이 체,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얄미운 저 얼굴.
잠깐이나마 황후를 홀렸던 얼굴이다. 젊은 시절엔 대사제를 질투하며 황성 출입도 금지시켰었다.
물론 황제의 명령에 불복해도 특별히 처벌받지 않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문짝을 발로 뻥뻥 차며 잘도 들어오시곤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금지시키고 싶었다.
황후의 이상형은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왜 그렇게 심통이 나 있습니까?”
반백 살의 황제에게 감히 ‘심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것도 대신관의 특권이다.
다 알면서 부러 묻는 태도도 보기 싫었다.
“성가셔서 그럽니다. 솔직히 개미굴에 마정석을 처박고 다 터뜨리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대신관의 말에 글렌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보다 무섭소만.”
뾰로통한 글렌의 대답에 대신관은 키득키득 웃었다.
참으로 변함이 없는 자로다. 그러니 여신께서도 이만큼 축복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겠지.
황제는 스스로의 강함을 믿었다.
그 강함이 타인을 지키기 위한 마음으로 유지된다는 본질을 믿었다.
이기적인 힘의 분배는 파멸을 불러올 뿐이라는 건 린드와이어 제국의 흥망성쇠만 봐도 명확히 보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니키타가 사실 파멸의 여신에 가깝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원, 제가 뭘 할 때마다 그 가르침이 번번이 제 발목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왜 여신님은 하나만 하시지 않고 양날의 검 같아서 번번이 제 발목을 잡으시는지요?”
푸념하는 글렌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그를 투영한 대사제는 “자연의 모든 것은 본래 양날의 검입니다. 여신님 탓이 아니에요.”라고 청년이었던 그에게 한 대답을 똑같이 했다.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슬슬 참기 힘들어서 그렇소.”
대사제는 글렌 황제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채었다.
글렌 헤네켄이 파르만을 여태 가만 내버려 둔 건, 반은 그의 의지이고 반은 신전의 의지였다.
정치적인 이유를 둘째 치고서라도 정당한 이유 없이 피를 보면 잔혹함에 무뎌진다고 가르친 것이 다름 아닌 대사제였기 때문이었다.
형질자는 여신의 축복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선택된 인간이었다.
인간 중 신과 가장 닮은 자로도 표현되곤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마냥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처럼 알려져 있는 니키타와 인간의 사랑이 포장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신전에서 일반 신도들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직의 여신인 니키타는 인간이 자신만큼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에게 사랑과 신력을 쏟아부었다가 다음 날에는 책망하며 가두어 놓기를 반복했다.
그때 인간에게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공공연히 마법이란 인간과 신의 결합, 그 아래에 태어난 후손에게 내린 축복이라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쏟아붓던 신력의 파편에 가까웠다.
그 증거로 실제 여신의 후손인 사제들은 전부 신력을 사용했고 그것은 마법과 엄연히 결이 달랐다.
종족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탓에 서로를 이해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시간이 흐르며 니키타는 비뚤어지고 망가졌다.
그녀의 사랑은 인간을 짓눌렀고 결국 인간은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소멸하려는 니키타를 구한 게 바로 랜디였다.
〈전 연인과 닮았기 때문에 니키타를 구원할 수 있었다는 말이 우습습니다. 그럼 같은 얼굴 열 명이 있으면 열 명 다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랑 다를 게 무어가 있습니까?〉
성서를 읽던 이십 대의 젊은 황제, 글렌은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전 연인과 닮아서가 아닙니다. 랜디가 여신에 버금가는 미친 여자여서 여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땐 좀 젊었던 다니엘은 입을 떡 벌리는 글렌 황태자에게 신전 안에서만 엄격히 보관하는 다른 성서를 내밀었다.
〈구원한 것이 아니라 침전하는 여신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렸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게 바로 신전에서 랜디를 여신이 아니라 ‘성녀’라고 못 박는 가장 큰 이유였다.
〈니키타는 자신보다 더한 랜디를 만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정을 찾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길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돌아다니는 미친놈을 제압한 게 채찍을 든 또 다른 미친놈이라는 거예요. 형질자와 각인이 왜 생겼는데요? 랜디가 여신의 멱살을 잡고 목덜미를 물어뜯었다는 겁니다! 제 증표를 새기려고. 인간이 감히.〉
글렌은 그때를 돌이켜 볼 때마다 흥분한 다니엘이 말 등을 채찍질하며 여신에게로 돌진하는 랜디의 화신 같았다고 설명했다.
다니엘은 글렌에게 무엄하게도 삿대질을 하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 미친 조합 아래 탄생한 것이 형질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형질자들은 매 순간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해요. 예? 너희들이 고삐를 놓는 순간이 저 랜디 미친 여자가 원하던 대로 세상이 망하는 순간이니까.〉
그런 여자를 ‘성녀’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도저히 여신으로 추앙할 순 없었다고 눈을 가리며 괴로워하는 다니엘 앞에서 글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렌 황제가 힐긋 대사제를 보았다.
색소가 거의 없어 금빛으로 나부끼는 속눈썹이 마찬가지로 금빛으로 빛나는 영롱한 눈동자를 덮었다가 금방 위로 치켜 올라갔다.
황제뿐만 아니라 다수의 우성 형질자들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며 너희들은 반성해라, 랜디 그 미친 여자가, 라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던 다니엘은 어디 가고 없었다.
그 눈앞에 있는 건 성스러움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신의 사제뿐이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또 이 늙은이의 외모를 폄하할 생각이라면 좀 봐주시지요.”
글렌 황제가 다니엘을 질투하던 무렵에 눈에 총기가 없이 흐릿하다느니, 주책이라느니 하며 대놓고 앞에서 말하던 것을 상기시킨 다니엘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또 그런 소리를 나불댄다면, 나이 먹고도 철없는 황제의 볼기짝을 칠 생각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대사제께서도 백 세가 넘으시니 차분해지긴 하는군요. 새삼 놀랍습니다.”
볼기짝 감까진 아니었지만 충분히 얄미운 말투에 다니엘은 의뭉스럽게 웃어 보였다.
글렌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어허, 감히 제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오늘의 만남을 소득 없는 시간 버림으로 만들 셈입니까? 신전의 허가 없이 타국을 침략하지 못하는 제국법, 기억하시지요?”
“망할 노친네.”
“뭐라고요?”
속삭이듯 중얼거린 글렌에게 다니엘이 제 귀를 문지르며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아닙니다. 아직도 정정하셔서 이렇게 제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시는지라 여신님께 잠시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글렌이 웃으며 대꾸하자 다니엘도 마주 웃었다.
“허락, 해 주시는 겁니다. 스승님?”
“스승 노릇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 제자의 인내심이 바닥나려 하니 괜한 짓을 해서 여신님 얼굴에 먹칠하기 전에 정당하게 파르만을 침략할 수 있게 허가해 주십시오.”
이것이 글렌이 오늘 대사제와 만난 유일한 이유였다.
파르만이 꿈틀꿈틀 움직인다.
기대만큼 벌레 같은 움직임으로 땅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글렌이 자녀들을 마른 생선처럼 줄줄이 엮어 린드버그로 보낸 것은 파르만더러 침 좀 흘려 보라고 대놓고 걸어 둔 미끼였다.
아직 각인 전인 칼 린드버그는 여전히 키치너에게 맛있는 먹잇감이었고 거기에 덤으로 헤네켄의 차기 수장까지 얹혀 있으니 파르만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미 다 정비된 헤네켄에 와서 칼 린드버그를 납치하고 아드리안 헤네켄을 죽이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아직도 오합지졸 소굴인 린드버그 왕국에서 둘을 습격하는 게 나을까.
당연히 후자였다.
고결한 성품의 글렌 황제를 존경하는 칼 린드버그가 알았다면 까무러칠 만큼 검은 마음이었다.
이 계획을 두고 황후와 다른 제후들이 걱정할 때 글렌은 ‘양날의 검이고, 두 마리 토끼다.’라고 대답했다.
글렌이 자녀들을 거기로 보내며 거기서 무언가 배워 오길 바라는 마음도 진심이었고 동시에 파르만을 자극하길 바랐다.
거슬리는 벌레를 밟아 죽이는 데도 묵직한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에 앉아 있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파르만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으면 이 깐깐한 대사제는 절대로 헤네켄 발 전쟁 따위를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정당성의 근거는?”
다니엘의 물음에 글렌이 대답했다.
“심증은 이미 있고 물증은 털면 와르르 쏟아질 겁니다. 가지를 백날 쳐 내 봐야 어디다 씁니까? 뿌리부터 밑동까지 한 번에 뽑아내겠습니다.”
털면서 키치너도 잡아내고, 그간 눈에 거슬렸던 것을 치워 낼 생각에 글렌이 가슴을 쓸었다.
“내 불허는 불허하겠지?”
상상만으로도 개운한지 활짝 웃던 글렌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지자 다니엘이 껄껄 웃었다.
작은 복수다. 이놈아.
“농담이오. 한번 해 보시지요. 여신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어디 받은 축복을 저주로 되돌리려 해? 미친놈에겐 몽둥이가 약이지.”
무분별한 폭력과 살생을 혐오하는 다니엘이었지만 그도 여신의 자식이었다.
글렌의 지체 없는 호출에 대기하던 버번 백작이 들어와 똑같은 악당의 얼굴을 한 황제와 대사제를 보고는 마침내 때가 왔음을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