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워.”
무지차의 명령에 병사들이 들어와 그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은 사내의 목을 내리쳤다.
잠시 버둥거리던 사내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그것을 둘러메고 사라지는 병사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본 무지차는 가운의 허리끈을 동여맸다.
“부족해.”
햇빛도. 마정석도, 사람도, 마수도, 그리고 오메가도.
훔쳐 온 오메가로 러트를 다스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대부분 열성이라 하룻밤을 제대로 보내기도 어려운데다 짝이 있는 몸들도 있어서 반항하는 걸 찍어 누르는 것도 짜증이 솟구쳤다.
“러트 때마다 사람을 죽이실 거면 저나 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까.”
산 사람을 마수 밥으로 던지는 것을 벌써 몇 번째 목격한 키치너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무지차의 감정 없는 눈이 키치너를 향했다가 피식 웃었다.
“나도 못 여는 몸을 늙은이가 퍽이나 열겠다. 거, 제대로 구실을 하기는 하고?”
명백한 비웃음에 키치너의 얼굴이 모욕으로 일그러졌으나 그는 차마 무지차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무지차에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마음을 가다듬은 키치너는 본론을 꺼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습니까?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요.”
“……글쎄. 아직은 헤네켄의 병사들이 건재해서. ”
뜨뜻미지근한 무지차의 반응에 키치너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수들이 헤네켄 병사들의 검에 목이 다 달아나고 있는데.”
늙은이가 성격도 급하다. 무지차는 킬킬 웃었다.
“린드버그의 전 재상께서는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 두신 건지? 덜 미지근한 방법으로 헤네켄의 군대와 정면 승부하실 겁니까?”
“차라리 갱도를 통해 정예부대를 보내지 그럽니까. 살수 교육을 받은 파르만의 병사들이 일단 아드리안 헤네켄의 목을 따기만 하면.”
“그럼 하나뿐인, 아, 곧 둘째가 생긴댔나. 어쨌든 아들을 잃은 글렌 헤네켄이 파르만을 지도에서 먼저 없애겠지.”
무지차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쿰쿰한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 것만 같았다.
페로몬이 없는 것들이랑 몸을 섞으면 이런다니까.
짜증 나.
그리고 눈앞의 버짐 핀 쭈글쭈글한 노인도 빨리 치우고 싶었다.
차가운 물을 마신 무지차가 제 손목에 달린 방울을 흔들었다.
“제가 들고 온 마정석만 수백 개입니다. 그걸로 정예부대를 만들겠다고 해서 기꺼이 내놓았는데. 그것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쓸 수 있는 겁니까?”
곧 발소리도 없이 들어온 시녀들이 엉망이 된 집무실을 정리하고 무지차의 온몸을 닦았다.
키치너에게도 무지차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수치를 모르는 그의 행동에 키치너가 미간을 찌푸리든 말든, 무지차는 시녀의 가슴을 희롱했다.
“아, 그 쓸 데도 없는 마정석.”
“뭐요?”
키치너의 허탈한 표정을 보며 무지차가 킬킬 웃었다.
“린드버그는 마정석을 헤네켄에서 수입해 썼다지? 그 마정석에 무슨 수작이 걸려 있는지 알곤 있었소?”
“수작이라니, 그, 그것이 무슨 소리요?”
“이봐, 그 마정석은 다 쓰레기야. 고품질의 마정석을 지니고 있다기에 당신을 데리고 온 내가 후회될 정도로 쓰레기였다고.”
내내 꼿꼿하던 키치너의 등이 약간 굽었다.
“그, 그럴 리가. 마정석에는 수식이 별도로 입력되지 않았어. 그저. 마법사의 인장만 있을 뿐.”
린드버그의 마법사들은 전부 껍데기만 마법사였다. 키치너 자신도 그랬다. 대를 이어 열성의 열성 형질자만 생산되다 보니 마석에 마력을 불어 넣을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식이 별도로 입력되지 않은 마정석을 수입해 그때그때 수식만 입력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런대로 쓸 만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는 키치너에게 무지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어 보였다.
멍청한 자식. 마정석에 대한 기본 이해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똥인지 초콜릿인지도 모르고 덥석 물었겠지.
“마법사의 인장은 최초로 마석에 마력을 불어 넣은 사람에게 귀속되는 표식과 마찬가지야. 거기에 무슨 수식을 넣어 어떻게 사용하든, 마음만 먹으면 본래 주인이 다 알 수 있다고. 헤네켄에서 그 많은 정보들을 다 어떻게 수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응?”
“그럴 수가.”
“린드버그는 헤네켄에서 마정석을 수입하는 순간부터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고. 그따위 것을 쓰면 파르만 왕국도 린드버그 꼴이 난다는 말이야. 원, 이렇게 멍청해서 재상 노릇은 어찌 했누.”
진작에 모추 산맥의 마정석을 채굴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마법사를 양성하거나 망명하는 것을 금지시켰어야 했다.
눈앞에 있는 금화를 움켜쥐는 데 급급한 나머지 도끼로 제 발등을 찍어 버린 키치너가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쩐지, 린드버그의 마법사가 부족해 마정석을 제작하는 것도 버거워질 무렵, 발베니 대상단에서는 파격적인 가격에-그렇지만 여전히 비싼- 마정석을 흔쾌히 매매해 주기로 했다.
나름의 정치적인 이유가 있으니 그런가 보다, 마침 칼 린드버그가 우성 오메가가 되었으니 미리 점수를 딸 노릇으로 그런가 보다 하며 이용해 먹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가 바닥을 벅벅 긁으며 “개 같은 발베니 헤네켄!” 하고 외쳤다.
‘끝까지 멍청한 브루스트 키치너. 헤네켄의 검은 속내를 미리 알았다고 한들 너희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유쾌한 기분이 된 무지차는 곁에 서서 사타구니를 닦던 시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코를 가까이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제법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오메가는 아니지만 하루 쓰고 버리기엔 나쁘지 않겠어.
무지차가 입꼬리 양쪽을 쭉 찢으며 웃었다.
“너 오늘 밤 내 시중을 들어라.”
무표정하던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녀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하자 무지차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지차는 상대방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베타인 그녀의 몸이 망가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심지어 그의 몸에 실수로 손톱자국이라도 낸다면 당장 목이 잘려 나갈지도 몰랐다.
“왜, 싫으냐? 혹시 알아? 네가 차기 수장을 잉태할지.”
무지차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여린 살갗이 터져 새파랗게 멍이 들 만큼 강한 힘이었다.
거부권이 없는 시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영광입니다.” 하고 영혼 없이 대답했다.
동료들이 힐끔거리며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무지차는 시녀를 놓아주었고 여전히 엎드려 있는 키치너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그의 몸을 툭툭 쳤다.
“그러니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나는 다 무너져 가는 나라의 왕 노릇 하고 싶지 않아. 너는 그때를 위해 남겨진 거야. 네 마정석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안 순간 널 갱도로 던져도 상관없었다고.”
무지차는 키치너의 손등을 꾹 밟았다.
키치너가 윽,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손에 남은 시녀의 잔향을 코로 훔친 무지차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부족하군. 오메가가 아니면 안 되겠어. 이왕이면 아주 우성에 얼굴도 예쁘면 좋겠고. 각인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짝이 있는 것들은 쓸데없이 올곧고 좋은 냄새도 나지 않아 싫다.
“그,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키치너가 더듬거리며 무지차에게 손을 내밀었다.
썩긴 했어도 동아줄이었다.
그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지금, 뭐.”
“칼 린드버그만큼은, 아드리안 헤네켄과 각인하기 전에……!”
린드버그에 숨겨 둔 파르만의 세작들은 도통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지막 연통이 ‘칼 린드버그가 린드버그 왕성에 돌아왔다. 둘은 아직 각인하지 않았다.’였다.
헤네켄 제국에서 혼전 각인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고마울 수 없을 정도였다.
무지차 파르만이 헤네켄 제국을 꿀꺽하고 난 뒤 껍데기만 남은 린드버그의 수장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키치너에겐 우성 오메가가 필요했다.
몇 안 되는 극 우성의 오메가는 말라 가는 키치너 가 형질의 씨를 보존해 줄 유일한 기회였다.
왕 같지도 않은 왕을 떠받들어 주던 것도, 왕비의 허영심을 채워 주던 것도, 지금 파르만의 발밑에서 기는 자신의 모습도 끔찍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짝으로 점찍어 놓은 그 왕자마저 놓치면 억울해서 눈 뜨고 죽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왕자가 공식적으로 헤네켄 황태자의 약혼자인 만큼, 그들은 언제 각인해도 이상하지 않소. 각인하지 않은 채 떨어져 있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내게 주시오!”
키치너가 간절하게 무지차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무지차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지만 키치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흐음, 그 오메가 왕자가 아직 각인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약혼을 했으니 당연히 각인한 줄 알았는데. 의외의 소득이 생길 것 같군.
무지차는 다시 키치너의 손등을 꾹 밟았다.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든 말든 무지차는 감흥이 없었다.
“키치너, 우리의 계산은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이미 지불된 것 같아.”
폐쇄된 파르만이 무른 지반을 토대로 거대한 지하 소굴을 만들고 그곳을 통해 주변국 주요 도시로 갱을 팔 때, 가장 먼저 파고들어 간 곳이 린드버그의 미바리 숲이었다.
파르만에 약점이 잡힌 키치너 때문에 만만하기도 했었고, 마정석 외에도 마수들의 숫자가 많다는 점이 구미를 당겼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예전 린드버그가 오메가 사냥에 열을 올릴 때 그들에게 타국의 오메가를 쥐여 주고 뒷돈을 받은 것도 파르만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떠돌이 용병처럼 꾸몄으나 그들은 인구가 턱없이 부족한 파르만의 알파들을 위하여 오메가를 수급하는 파르만의 정예부대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수법은 단순했다.
타깃이 있으면 수면향을 놓아 잠재우고 그 상태로 둘러메 달리는 것이다.
히트 직전의 오메가들은 마치 몸의 모든 기관이 열린 사람처럼 주변의 냄새를 흡수했다.
알파와 결합하려는 본능적인 생체 활동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평소라면 잠들 리 없는 아주 적은 양의 수면향에도 기절하듯 잠들곤 했다.
오메가의 숫자가 줄어든 후에는 낌새만 보이면 무작정 수면향을 놓고 납치했다. 그러다 보니 개중에는 베타도 끼어 있었고 오메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열성 오메가도 있었다.
파르만은 그들을 린드버그의 귀족들에게 헐값에 팔았다.
가짜 오메가로도 흥분하는 린드버그의 귀족들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몰랐다.
키치너는 유일하게 그들이 파르만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키치너에게 쥐여 준 열성 오메가가 갑자기 우성으로 변모하여 왕비가 될 때도, 그 때문에 왕을 중독시킬 때도. 칼 린드버그의 페로몬을 숨길 때도. 키치너는 파르만의 손을 빌렸고 파르만은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창구로 키치너와 협력했다.
하지만 더이상 협력 관계라고 부를 필요가 없었다. 파르만은 곧 땅 밖으로 나갈 테니까.
무지차는 손을 움켜쥐고 끅끅 우는 키치너를 향해 말했다.
“내가 당신의 요구를 왜 들어줘야 하지? 이제 쓸모도 없는걸.”
키치너의 얼굴이 완전한 절망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