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본 루루가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안 물어봤어?”
“물어볼 수가 없었어. 그리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두 사람은 모처럼 활짝 갠 하늘 아래 나란히 앉았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라니까. 둘이 잤냐고.”
“아드리안이랑 연락이 안 돼, 물어보려면 헤네켄 황성에 있는 상비군을 통해야만 하는데,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잖아.”
변경에 마수가 판을 치고 있어 다들 바쁜 와중 애인의 외도를 확인한답시고 비상 연락망을 쓸 순 없었다.
상대가 황태자인지라 더욱 그랬다.
루루가 그건 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차라리 헨드릭 공자한테 물어보면 어때.”
“그럴까 했었지만 벨프리가 나랑 독대하는 걸 피하는 눈치야.”
아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의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한 통에 제니스조차 벨프리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칼 린드버그의 핏발 선 흰자위와 거무죽죽한 안색에 루루는 총체적 난국이구나 했다.
벨프리의 태도에 칼은 둘이 잤다고 더 확신한 모양이었다.
‘이런 유의 삽질은 아주 골치 아픈데.’
속으로 중얼거린 루루는 자신이 어떻게 끼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라 입술만 깨물었다.
“나 진짜 한심해.”
칼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시종이 저만치서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종의 눈도 탱탱 부어 있는 꼴이 둘이 붙들고 울었던 모양이다.
“뭐가 한심한데.”
“아드리안이 변경에서 싸우며 고생하고 있는데 그를 의심하면서 자꾸만 원망하는 내가 한심해.”
아이고, 또 눈물이 나는 모양인지 제 코를 틀어쥔다.
루루는 그 별것 아닌 행동에서 누군가를 겹쳐 보았다.
우리 오빠가 꼭 그랬지. 눈물도 많으면서 동생 앞에서 센 척하느라 눈물을 참을 때마다 저렇게 코를 틀어쥐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코가 수도꼭지냐고 묻기도 했었다.
“약혼자가 다른 사람이랑 잤는데 원망이 다 뭐냐? 나 같으면 확인하기 전에 배신감에 따귀부터 때렸을걸.”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내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일 때가 아니라고.”
루루는 팔짱을 꼈다.
그렁그렁한 눈이나 좀 어떻게 하고 그런 소리를 하든가.
“사랑에 때가 따로 있니? 전쟁통에도 사랑하고 질투하고 애 낳고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의 삶이야.”
“꼭 할머니 같은 소리를 하네.”
킁, 코를 먹으며 칼이 말하자 뜨끔해진 루루가 칼 린드버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기운 차리라고 아프지 않게 때린 건데 마르코가 화들짝 놀라며 루루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본다.
발치에 있던 엘리자벳이 귀를 쫑긋 세웠다.
린드버그 왕성에서 마주칠 때마다 간식을 주고 아는 체를 하니 경계심은 옅어졌지만 여전히 루루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루루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짧은 입덕 부정기를 거쳐 칼 린드버그를 응원하기로 한 이 시점에 뜬금없이 벨프리가 오메가가 된 것도 그렇고, 짜고 치는 판처럼 아드리안과 칼이 떨어지게 된 것도 그렇고, 또 평소와 다르게 혼란스러운 칼 린드버그의 축 처진 어깨도 그랬다.
맞다. 이 소설 고구마 구간 참 길었지.
원작에서 벨프리와 아드리안이 삽질할 때마다 가슴을 퍽퍽 쳤던 게 떠올랐다. 물론 그 삽질 사이 사이에 칼 린드버그가 트롤 짓을 하는 부분이 제일 싫었지만 말이다.
원작의 주인공이 바뀌어도 이런 건 안 바뀐다 이거냐?
루루는 마음속으로 작가에게 주먹 감자를 먹였다.
그리고 칼 린드버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별로 도움이 안 될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선에서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자면.”
“해 줘. 듣고 싶어.”
칼은 자연스레 루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루루에게 유난히 치대는 모습이 소설 밖에 있을 오빠랑 똑같았다
떨어져 지낸 세월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둘만 있을 때 아이처럼 구는 것이, 루루는 오빠가 그럴 때마다 질색하면서도 결국 받아 주곤 했다.
아, 우리 오빠도 맨날 이렇게 울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문득 오빠가 보고 싶어진 루루가 칼 린드버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고 칼은 어리광을 피우듯 이마를 비비적댔다.
아드리안이 돌아와서 둘이 이러고 있었다는 걸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날지도 모르지만 루루는 더 이상 아드리안이 두렵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도 원작과 다르고 벨프리 헨드릭도 원작과 달랐지만 가장 달라진 것은 아드리안 헤네켄이었으니까.
루루는 이제서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편견을 버리고 봐. 아드리안 헤네켄이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잘 만큼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그게 무슨 소리야?”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는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알파의 페로몬에 대량 노출될 것’이야. 꼭 잠을 자야 한다가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페로몬에 노출되려면 같이 밤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칼 린드버그도 페로몬이 뭔지는 알았다. 아무 때나 그 페로몬이 방출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아드리안의 감정의 동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는 것도 그가 칼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고 칼과 있을 때 그가 다른 때보다 더 동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페로몬을 가장 많이 감지할 때는 그가 성적으로 흥분을 할 때라는 걸, 몇 차례의 경험으로 잘 알게 되었다.
생각하다 보니 또 우울해진다.
침대 위의 아드리안이 얼마나 섹시한지 잘 아는 칼은 그 모습에 번번이 넋을 잃을 정도였다. 이번에 새삼 느낀 거지만 외모가 비범한 벨프리도 섹시하기는 아드리안 헤네켄 버금갔다. 그가 발현열로 몸을 뒤척거릴 때 솔직히 칼도 덜컹했다.
그런 둘을 겹쳐 놓으면, 그림체가 맞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딱.
또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헐떡거리면서 울상이 되는 칼의 이마에 루루가 딱밤을 먹였다.
“아, 아파.”
레아 린드버그 이후로 처음 맞아 보는데, 이 와중에도 열 받으면 손부터 나오던 전재영을 떠올린 칼은 이마를 문지르며 비싯 웃었다.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서 웃는 꼴에 루루가 마르코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코는 제 본분이고 뭐고 야! 하고 루루에게 소리쳤고 칼이 괜찮다고 손짓하지 않았으면 달려와서 루루의 이마에 똑같이 딱밤을 날렸을지 몰랐다.
“바보. 지속적이고 많은 양의 페로몬 노출이지만, 단 한 사람의 페로몬 때문이라곤 아무도 말한 적 없거든?”
예상치 못한 루루의 말에 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벨프리 주변에 알파가 한둘이야? 가까이로는 걔네 아빠가 우성 알파, 소꿉친구인 황태자는 극우성 알파, 성에서 가끔 마주치는 황제도 우성 알파, 심지어 걔네 형들도 다 알파인데.”
루루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알파만 득시글득시글한 집단에서 혼자 베타로 버티고 있었던 게 용했다.
“거기에 더해서 너희 누나 우성 알파지. 요즘 레아 린드버그랑 벨프리가 매일 붙어 있었다며.”
“아!”
그제야 칼 린드버그가 확 얼굴을 폈다.
“맞아, 레아, 아니 우리 누나 우성 알파였지?”
그리고 벨프리가 레아 린드버그와 딱 달라붙어 며칠을 보낸 것도 맞다.
의심의 구름이 순식간에 걷혔다.
루루는 밝아진 칼 린드버그의 얼굴을 보며 신이 났다.
“벨프리가 꼭 아드리안 때문에 오메가가 된 건 아니라고. 이제 믿을 수 있겠어?”
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사자가 돌아온 후 확인해야 할 일이긴 했어도 일단 지금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특히 레아 그 언니 멋있잖아. 벨프리를 보는 눈이 심상찮았어. 딱 봐도 알파미가 쩌는데.”
“알파미?”
“막 이렇게, 우두머리의 기운이 이렇게 나는 거 말이야. 아, 백합 안 좋아하는 나도 가끔 설렌다니까.”
“백합은 또 뭔데.”
생소한 단어에 칼 린드버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앗차 싶었던 루루가 입을 다물었다.
“백합이 뭐냐니까?”
“……몰라도 돼.”
“알고 싶은데.”
“그런 사소한 건 좀 넘어가. 어휴, 이제 삽질 그만해. 아드리안은 수 한정 집착광공이라 절대로 딴 사람이랑 안 자.”
“수 한정이 뭐야. 집착광공은 또 뭐고?”
칼 린드버그는 쏟아지는 전문용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 씨. 이놈의 주둥아리.”
루루가 제 입술을 탁탁 쳐 댔다.
“그게 뭐냐니까. 나도 좀 알자.”
“아, 모르셔도 됩니다. 마녀들끼리만 쓰는 용어라.”
“거짓말.”
어물쩍 넘어가려는 루루의 태도에 칼 린드버그는 더욱 궁금해졌다.
집착광? 수한정? 아니, 수, 한정인가?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왕자님.”
눈을 데굴데굴 굴린 루루가 손을 모아서 싹싹 빌었다.
칼 린드버그가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재영아, 휴대폰 요금이 꽤 많이 나오는데 소액결제를 어디다 했어?〉
〈아, 그거. 요즘 소설 좀 읽는다고.〉
〈무슨 소설인데? 재밌어?〉
〈오빤 몰라도 돼.〉
〈내용만 살짝 알려 주면 안 돼?〉
용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는 동생이 소액 결제 좀 했다고 책망하려는 게 아니었다. 과금을 할 정도로 재밌다고 하니까 관심이 갔을 뿐.
〈……연애하는 얘기야.〉
〈아, 로맨스? 근데 뭘 눈까지 피하면서 알려 주냐.〉
〈그냥 좀 넘어가 주라. 대신 5만 원 이상 절대 결제 안 할게. 내 용돈에서 깎아도 됨.〉
그때도 손을 이렇게 모아서 빌었지.
전재영이 유일하게 전우영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때였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재영이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소설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가끔 자기 기분 좋을 때 빼고.
아드리안 헤네켄의 새 일러스트가 나왔을 때.
칼 린드버그가 죽었을 때.
한창 연애에 관심 많을 나이니까 로맨스 소설 좀 볼 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젠 진짜 참을 수가 없었다. 칼 린드버그가 된 전우영도 알 권리가 있었다.
칼 린드버그는 당사자였고 그리고 볼 장 거의 다 봤으니 좀 알아도 된다.
남자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고, 옷 홀딱 벗고 뽀뽀도 백 번 했는데. 앞으로 뭐가 더 남았는지 알아야 마음의 준비라도 하지.
칼 린드버그가 눈을 부릅뜨며 루루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 말해!”
야, 라고 불렀다.
“아, 싫어!”
서로 하대를 하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이 아옹다옹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거야? 그래서 설명 못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고, 말해 봤자 못 알아듣는다니까!”
“알아듣게 설명하면 되잖아.”
루루가 안간힘을 쓰며 칼 린드버그의 팔을 밀어냈다.
방금 전까지는 다정하게 붙어 있다가 갑자기 왕자를 때리고 다시 다정하게 붙었다가 또 몸싸움을 하는 두 사람 때문에 혼란스러운 마르코가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지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고 명하셔서 어쩔 수 없이 멀리 있긴 했지만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콩알만 한 게 비밀만 많아 가지고!”
칼 린드버그보다 약간 작을 뿐인데. 콩알이라는 말에 루루는 칼의 손아귀에서 잽싸게 빠져나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라고!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진짜?”
“별거 아니면 알려 주면 되잖아!”
칼 린드버그도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이 소설 정체가 뭐야? 어?”
“어?”
뜻밖의 말에 루루의 눈 코 입이 다 열렸다.
이 왕자, 지금 뭐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