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언성을 높이니 참지 못하고 뛰어온 마르코가 칼 린드버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입을 틀어막고 눈만 멀뚱멀뚱 뜨며 눈치를 살필 때였다.
“들어가요, 왕자님! 마녀의 무례를 참아 주는 것도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르코는 자신 또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왕자의 팔을 잡고 질질 끌며 건물로 향하는 마르코의 주변에서 엘리자벳이 낑낑 울며 동당동당 발을 굴렀다.
“아냐, 아냐, 마르코.”
칼 린드버그가 헐떡거리며 마르코에게 끌려가다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버티는 왕자 때문에 힘에 부친 마르코가 왕자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가뜩이나 왕자님 상태도 좋지 않으신데!”
처음으로 본 왕자의 눈물은 마르코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
맹세컨대 왕자가 자신을 학대할 때도 마음이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었다.
마르코의 추측일 뿐이지만 황태자가 왕자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뭐 때문인지 말해 주지도 않으면서 서럽게 울던 왕자는 새벽 동이 틀 때 겨우 잠이 들었다.
아기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간헐적으로 훌쩍이는 왕자의 머리맡에서 함께 울며 마르코는 왕자가 그간 많은 것을 참아 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왕자님이 아름다우니까. 우성 오메가시니까.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는 것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도 전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엉뚱한 소리를 하긴 했어도 대체로 의연했기 때문에 단지, 기억의 혼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저 참고 있었을 뿐이라면. 마르코는 왕자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걸 관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르코는 왕자가 원한다면 그를 업고 기꺼이 성벽을 뛰어넘을 거다.
왕자님이 빵을 만들고 싶다면 마르코는 밀밭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할 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소매치기를 다시 시작하더라도 왕자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으면서 기껏 한다는 게 마녀와 언성 높여 싸우는 겁니까? 애초에 마녀는 왕자님께 이렇게 꼿꼿이 서서 얼굴을 마주 댈 위치가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야. 마르코, 이건 싸운 게 아니고.”
칼이 마녀의 역성을 들자 마르코는 서러움이 폭발했다.
“왜 이렇게 물러 터지셨어요!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당하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도 그렇고 이제는 마녀까지. 감히, 평민 주제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해만 쌓이는 아드리안만 억울할 타이밍이다.
루루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칼 린드버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긴장이 풀린 것도 같았다.
아드리안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고 칼이 아드리안을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는 걸 알아차린 다음엔 변경에서 홀로 고생하는 아드리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고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작스레 루루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기까지 하니 뒤늦게 눈꺼풀 안쪽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했다.
“차라리 예전의 왕자님처럼 악을 쓰세요! 아드리안 전하를 탓하고 마녀의 무례를 벌하고 누구도 왕자님께 상처 주지 못하게 가시를 세우라고요!”
아, 어린 마르코에게 왕자의 오만한 태도는 그리 보였구나.
칼 린드버그가 눈을 반짝 떴다.
어린 칼 린드버그가 그리도 안하무인이었던 것은 날 세우지 않으면 무시당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배웠던 탓도 있었겠다.
겉으로는 떠받드는 척하면서 뒤로는 희롱하고 하찮게 보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신을 지키는 법밖에 몰랐을 어린 왕자를 떠올린 지금의 칼 린드버그는 자세를 고쳤다.
마르코에게 당겨진 팔을 부드럽게 빼고 허리를 바로 세운 왕자가 마르코에게 다정히 말했다.
“마르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너도 평민이잖아.”
마르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평민인 주제에 누굴 책 잡으려는 거냐고 혼을 내려는 걸까.
그러나 왕자는 혼을 내는 대신 마르코의 등을 토닥였다.
“평민이지만 네가 내 가족이듯, 루루는 내 친구야.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고 그녀는 대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마르코에겐 미안했지만 칼 린드버그는 이 대화의 끝장을 봐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특히 아드리안이 돌아오게 되면 루루와 독대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그 전에 칼 린드버그는 확인을 해 둬야 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혹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혼자 동요하고 우울해할 순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삶은 활자만으로 담을 수 없는 각자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으면서, 여태 미적거렸던 것은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까 봐서다.
아무것도 모르고 짐작만으로 앞서 나가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루루가 전재영이든 아니든 그녀가 소설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칼 린드버그는 그녀를 유일한 이해자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칼 린드버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을 아드리안에게도 언젠가 다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다.
충격을 받을 그에게 벌써부터 미안했지만 비밀을 감추고 그 옆에서 마냥 행복할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꾸밈없는 자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쩌다가 칼 린드버그가 돼서 원작을 망친 죄로 아드리안의 옆에 서게 된 게 아니라 전우영의 영혼을 지닌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을 사랑하게 된 거라고 똑똑히 말해 주고 싶었다.
아, 아드리안이 비밀을 만들지 말자고 당부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을까.
칼이 슬쩍 루루를 건너다보니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락스 칠을 한 듯 탈색되어 있었다.
“꼭 오늘 들어야 하는 이야기예요? 쉬면 안 되는 거예요?”
마르코가 작게 훌쩍이며 코를 문질렀다.
하기야 같은 평민이라고 해도 저쪽은 경험 있는 예언자고 마르코는 그저 시종에 불과했다.
그런 마르코에게도 왕자는 가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마르코, 정말 미안해. 걱정하는 네 마음 잘 알아.”
따듯한 분. 이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칼은 훌쩍이는 마르코에게 손수건을 내밀었고 마르코는 머뭇거리다 팽 코를 풀었다.
“응, 오늘 꼭 들어야 해. 엘리자벳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 있을래? 나는 루루와 이야기 좀 더 하다가 들어갈게.”
잠시 가만히 서 있던 마르코가 겨우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르코가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엘리자벳의 궁둥이를 토닥거리며 미련이 가득 남은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 뒤로 칼 린드버그가 손을 흔들었다.
“너, 칼 린드버그가 아니구나?”
한 사람과 한 마리가 완전히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루루는 주변을 한번 훑어본 후 작은 목소리로 칼에게 물었다.
그녀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기, 밖에서 왔는데.”
머쓱하게 하늘을 가리켜 본 칼 린드버그에게 루루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빙의자?”
“이런 걸 빙의라고 하나? 그럼 맞을걸.”
루루가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니 칼이 허겁지겁 달려와 루루를 부축했다.
“……원래 이름이 뭔데?”
“……전우영.”
“뭐?”
“전우영이라고 원래 내 이름.”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이름에 루루가 눈을 홉떴다.
설마, 아니지?
“다시, 말해 봐. 누구라고?”
루루가 더듬거리며 묻자 칼 린드버그는 갑자기 귀를 벌겋게 물들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밀착해 있는 칼 린드버그의 심장이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칼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루루는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두려워서 누군가 그녀의 목을 내려쳐 기절시켰으면 하고 바랐다.
반면 칼 린드버그는 점점 창백해지는 루루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가 전재영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대놓고 물어볼까, 말까.
입술이 바싹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의 재회는 예상치 못했다고. 천국에서나 만날 줄 알았다고. 그래서 더 기쁘다고.
속으로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시며 칼 린드버그는 할 말을 골랐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기사들조차 이상함을 감지하고 이쪽을 주시할 만큼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더 지체하면 마르코 대신 우직한 기사들이 달려 나올 태세였다.
칼은 입술에 침을 한번 발랐다.
루루는 가까이서 본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 모공 한 점이 없다는 걸 확인하며 그럴 리 없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대한민국에 전우영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이냐?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나는, 네가. 내 여동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루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정해라, 진정해. 여동생을 가진 전우영이 설마 우리 오빠뿐이겠니.
정말 우리 오빠라면, 루루는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였다.
제발, 아니지? 아니라고 해.
아무리 간절하게 올려다봐도 칼 린드버그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혹시 너 전재영이냐?”
루루가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칼 린드버그가 당황해서 어어? 하면서 그녀를 붙들었다.
결국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시하기에는 예비 황태자비의 품에 마녀가 지나치게 오래 안겨 있었고 저러다 둘이 정분이라도 나면 지키고 선 기사들의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어진다.
척척척. 가까워지는 기사들의 워커 소리에 당황한 칼 린드버그가 루루와 기사들을 번갈아 보는 와중에 루루가 입술을 열었다.
“에바…….”
“어? 뭐라고?”
루루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작아서 칼이 귀를 바짝 들이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에바라고. 오빠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오빠가 왜 내 최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냐고.
너는 보이즈도 모르고 러브도 모르는 인간이잖아.
여태 친형제를 상대로 최애와의 커플링을 응원하고 있었다니, 아마추어 비엘러에겐 너무나 높은 장벽이었다.
루루가 쓰게 웃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눈을 감았다.
“어, 야! 재영아! 아니, 루루야!”
겨우 만난 동생이 정체를 밝히자마자 드러눕는 꼴에 황망해진 칼이 루루를 흔들었다.
그러나 루루는 눈을 뜨지 않았다.
루루의 입장에서 이건 세 번이나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이었다.
첫 번째는 최애 얼굴도 보기 힘든 시골 마을 변두리 평민으로 빙의한 것이고.
두 번째는 악역이 갱생해서 커플링을 꼬아 버린 것이고.
세 번째는 그 악역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친오빠였다는 사실이었다.
“시발. 이건 아니지.”
루루는, 아니, 전재영은 멀어지는 주변 소음을 뒤로하고 작가에게 주먹 감자를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