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질반질한 얼굴의 사내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토실토실한 얼굴이 조금은 수척해진 것이 제 딴에는 고생을 한 듯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토지의 임대 및 소유 금지. 집 앞마당에 잡초 한 포기 못 키우게 했으면서 소작에 한 해 세율을 팔 할이나 매겼다고.”
레아 린드버그가 종이를 팔락거릴 때마다 남자는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녀의 양옆에 서 있는 병사들의 서슬 퍼런 눈빛에 아무것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디 소작뿐인가, 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도 주택이랍시고 달마다 이자를 매겨 가며 빚을 지웠다지.”
몇 번째인지 세기도 어려울 정도의 심문이었다.
한 개의 성벽을 공유하는 영지민들이 각자 모시던 영주가 달랐다는 말에 이상함을 느낀 레아 일행이 비교적 멀끔한 주택을 털어 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귀족 나부랭이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왕은 작위를 내린 적이 없는데 작위를 달고 횡포를 부리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그저 마을의 촌장 내지는 유지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이 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말에 영주의 성을 지키던 헤네켄의 병사들이 당황했다.
레아 린드버그는 그제야 몇 되지도 않는 영주들이 어떻게 이 많은 영지민들을 휘어잡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영지민들이 들고일어날 때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지도.
귀족으로서의 긍지도 없고 영지에 대한 책임감은 더더욱 없었으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무늬만 귀족들은 폭동이 일어나고 헤네켄의 병사들이 진짜 영주를 구금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일단 몸을 숨기기를 택했다.
“빚을 지우다 못해서.”
레아가 남자 옆에 같이 무릎을 꿇고 앉아 오들오들 떠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무르팍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안겨 엄마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성년도 채 지나지 않은 딸을 상납받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레아가 주먹을 말아쥐고 이를 갈았다.
심지어 창의성도 부족하여 손바닥만 한 땅 위에서 하는 짓이 하나같이 똑같아서 더 기가 찼다.
명목상 설립되어 있는 귀족 아카데미에서 찍어 낸 것처럼 썩은 귀족을 양성한 모양이었다.
“네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수치심이라곤 없는 게야?”
머리가 반쯤 벗어진 귀족이 항변하고 싶어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억울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귀족들의 것, 아무것도 쥐고 태어나지 못한 평민이 그들의 것을 빌리는데 그 정도의 세도 못 받는가.
평민들은 제때제때 세를 내지도 못해 어쩔 수 없이 나서서 긁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정당한 사유로 내게 왔소. 그리고 우리는 엄연히 부부고. 사랑에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오?”
사랑? 지금 어디다가 그런 숭고한 단어를 들이밀어?
레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남자의 옆에 앉은 여자는 딱 봐도 앳되어 보였다.
많이 쳐 줘도 레아보다 아래였고 그녀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보다 공포가 먼저 있었다.
레아의 눈썹이 위로 확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사랑해서 이 추운 계절. 지하에 머무르는 동안 너는 솜이 들어간 외투를 걸치고 젖먹이를 키우는 네 배우자에게 얇은 드레스 한 장을 주었느냐?”
겨울용 장화가 아닌 여름용 샌들을 신은 그녀의 발끝이 얼어서 푸르게 보였다.
오랜 동상의 흔적과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에 있는 자국은 매서운 레아의 시선 아래 낱낱이 파헤쳐졌다.
“제, 제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추위를 많이 타서.”
레아 린드버그는 앉아 있던 곳에서 내려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무릎을 움직여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새 헤네켄의 병사들이 앞뒤로 포진해 있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모포와 탕파를 가져다주게.”
레아의 눈짓에 아기를 끌어안고 있던 여인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다른 방으로 향했다.
“야.”
남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주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남작 위를 받은 지 벌써 수십 년, 단 한 번도 ‘야.’ ‘너.’ 따위의 칭호를 들어 본 적 없는 몸이었다.
알파라곤 하나 여자한테, 그것도 망국의 공주 따위가 감히 ‘야.’라고?
“나이를 너무 드셔서 귀도 안 들리냐? 너 말이야.”
저잣거리 왈패 같은 공주의 말투에 병사들이 작게 숨을 참았다.
남자만 정신을 못 차리고 더듬더듬 말했다.
“체, 체통을 지키십시오.”
“네까짓 거한테 지킬 체통 없어.”
“아, 아무리 군신 간이라고는 하, 하나. 이렇게까지 하대하, 시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말하려던 남자의 가랑이 사이로 공주가 쿵 발을 내려찍었다.
“히익!”
“왜? 무서워? 구실도 못 하는 거 터뜨릴까 봐?”
레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법도 중에 제대로 아는 게 있긴 하고?”
가짜 귀족 주제에 법도를 운운하려 하다니 같잖다.
아아, 린드버그의 절대왕정은 완벽하게 망해 있었다.
제대로 휘어잡지도 못하고 뒤에서 귀족들이 무슨 작당을 하는지도 몰랐을 제 아비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진짜 우스운 듯 어깨까지 들썩거리던 레아 린드버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달리했다.
“네 본처는 어디 있느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본처는 남자가 남작 위를 받자마자 맨몸으로 쫓겨났다.
그걸 레아 린드버그가 알 턱이 없을 텐데 어째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다리가 부러진 젊은 여인을 데려다 보살핀 마음씨 좋은 부부를 만났지. 의원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이 다친 탓에 평생 절름발이가 되어야 했더군. 그녀가 네 본처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
레아에게서 넘실대는 분노를 감지한 병사들이 급히 코와 입을 가렸다.
“어차피 넌 죽어, 발뺌해도 죽고, 실토해도 죽는다. 왜 그랬어?”
남자는 벌벌 떨었다.
“그,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어쩔 수 없이.”
들을 가치도 없었다. 레아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럼 두 번째 처는 어디에 두었느냐?”
“두 번째 처라니, 요?”
그것도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이다. 남작이 입을 헤벌렸다.
“발뺌하면 죽는다고 했다. 지병이 있어 노역을 거절한 아비에게서 강탈해 온 네 두 번째 처는 지금 어디 있나.”
“모, 모릅니다.”
“그러겠지. 강바닥에 가라앉았던 그녀의 시신은 그 아비가 직접 수습했으니까.”
모든 일은 레아 린드버그가 친히 마을을 돌며 수집한 정보였다.
표면보다 더 문드러진 속 알맹이에 레아는 분노로 머리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사고였습니다! 멋대로 달아나다가 멋대로 죽는 것을 어찌합니까.”
공황 상태에 빠진 남작은 자신이 스스로를 함정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사들이 검집으로 바닥을 탁탁 쳤다.
레아는 그녀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빼어 들었다.
피를 한껏 머금어 요사스럽게 빛나는 검날이 남작의 미래를 비췄다.
“자, 마지막으로 묻는다. 세 번째 처는 어디 있느냐.”
“모, 모르오! 없소! 내게 더 이상의 처는 없었소!”
레아가 빙그레 웃으며 검 끝으로 남작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실토하는군. 네게 더 이상의 처는 없지. 애첩과 애동만 줄줄이 끼고 있었을 뿐.”
때맞춰 문이 열리고 하나같이 수척한 몰골의 남녀가 대여섯 들어왔다.
저것들이 어디서? 분명히 직전에 다 내보냈거늘.
남작이 움칫거리자 레아는 검 날을 세웠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레아는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남작을 노려보았다.
“너희들 중 자의로 이놈에게 몸을 의탁한 사람이 있느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혹은 이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은 자는?”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폭행의 흔적을 달고 누구도 레아 앞에서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아닙니다!”
남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지 같은 것들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줬는데. 고작 돌아오는 게 이런 배신이라니.
그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
“저들은 거래의 대가로 내게 몸을 의탁했소! 내 소유인데 내 멋대로 하는 것이 무어가 나쁘단 말입니까! 나는 귀족, 귀족이란 말이오!”
헤네켄의 병사들이 일제히 발을 굴렀다.
그것은 일종의 항변이었다.
저자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의사 전달 방식이었다.
그들도 대부분 평민이었던지라 남작의 행태는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돼지 같은 자식.”
레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작지만 깊은 울림이 있어 병사들이 발을 구르는 것을 멈추었다.
“난 네 이름도 거론하기 싫으니, 돼지 남작이라 부르겠다. 직전에 만난 박쥐 자작의 말로를 먼저 알려 줄까. 그는 첫 줄에 내게 목이 베였다.”
남작이 숨을 들이켰다.
눈알을 아무리 굴려도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아느냐. 그는 제 첩이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이 형질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 채로 묻었거든. 미쳐 있는 그의 첩이 그것을 증명했고 산파와 하녀가 확인해 주었다.”
남작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자 레아의 검 끝이 그의 목젖을 긁었다.
핏발 선 레아의 눈이 남작을 지나쳐 평민 무리에게 향했다.
“이자의 말로를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구역질 나는 일이 될 것이다. 남겠느냐? 아니면 나가겠느냐?”
한 여인이 무리 앞으로 나섰다.
“저는 지켜볼 것입니다.”
그녀는 이들 중 가장 오래 저택 안에 머물렀고 그 때문에 온갖 더러운 꼴을 보았다.
“그렇다면 저도.”
“저도 남겠습니다.”
결국 전부 다 남았다.
“너희들이 어떻게!”
남작이 몸부림을 쳤으나 래아는 검 손잡이로 그의 어깨를 내리쳐 막았다.
그가 어깨를 쥐고 나동그라지든 말든 레아는 꼼짝 않고 서서 말을 이었다.
“백성의 목숨은 모두 여신의 것. 태어나게 하는 것도 거두는 것도 신의 영역이지.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귀족이 뭐길래 너희가 마음대로 주무르느냐.”
레아는 속으로 작게 신음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인가.
남작은 입술이 타들어 가고 머리가 압박되는 고통에 끄윽끄윽 신음했다.
레아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네 발아래 기는 백성들을 보면서 희열이 느껴지던가.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았겠지.”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의 레아에게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압박에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큭, 하는 신음성을 내었다.
“아주 달았을 거야. 그게 독인지도 모르고. 집 안 곳곳 숯불을 놓으면서도 그 연기가 네 목을 조를 거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남작은 거품을 물었다. 레아의 검이 먼저 남작의 다리를 잘랐다.
“이자의 사재를 전부 털어 사치품은 상단에 넘겨 제값을 매기고 그것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보상해. 남은 것들과 옷감과 식량은 영지민들에게 분배한다.”
남작이 잘린 다리를 붙들고 어헝어헝 울 새도 없이 목이 달아났다.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으니 지옥에 가서도 아까워하지 말거라.”
놀랍게도 레아 린드버그는 남작의 목을 자르는 순간에 눈물을 보였다.
그것은 연약함이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죽는 것을 눈 깜짝 않고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증오가 깊은 이들에게 고작 목숨과 돈으로밖에 보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