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칼 린드버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격에 겨워도 모자랄 남매 상봉은 잠시 미뤄 두고 소설 내용을 캐묻던 칼 린드버그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재영이가 자신이 읽던 소설의 정의를 ‘십구금 판타지 피폐 비엘 소설’이라고 말하자마자 칼의 눈동자가 벌벌 떨렸다.
피폐가 피폐하다 할 때 그 피폐가 맞냐고 몇 번을 물었다.
등장인물들 태반이 동성애자라는 건 둘째치고 지치고 쇠약해진다는 사전적 정의가 어째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붙어 있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서로 좋아서 물고 빨고 가끔 마법 쓰고 가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린 루루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십구금 팬픽을 쓰다가 혈육에게 걸린 기분이었다. 또는 책상에 그려 놓은 매운 고추 그림을 담임 선생님께 들킨 기분이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멀쩡한 소꿉친구를 덮쳐 턱을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는데 벨프리가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서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거기까진 못 봐서 모르지만, 아마 그럴걸?”
사귀지 않는 상태에서도 수십 번의 일명 ‘떡 신’이 있었으니 못해도 2권 말미쯤에는 애가 생겼을 거다.
오메가버스에 임신수 키워드가 빠지면 섭섭하니까.
“미치겠다. 진짜.”
마침내 소설의 정체를 알게 된 칼 린드버그는 이마를 짚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안 좋아해도 잠은 잘만 자는데. 얼굴이 개연성이고 몸정이 사랑이고 그런 건데…….”
“씁.”
칼 린드버그는 우물쭈물 변명하는 루루를 흘겨보았다. 찔끔한 루루가 손장난을 하며 칼의 눈을 피했다.
내 순수한 동생이 어쩌다가 이런 애가 된 거지.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설은 본래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고 했다.
헤네켄 제국은 지금처럼 번성했고 황실과 귀족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예상치 못한 아드리안 헤네켄의 폭주로 조금씩 불안에 휩싸이던 중이었다고.
“벨프리가 아드리안 헤네켄을 짝사랑 했던 건 맞고?”
“그게, 좀 이상해. 소설에서는 벨프리가 아드리안 헤네켄과 몸을 섞으면서 자신의 몰랐던 감정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서술했는데. 최근의 벨프리를 보면 짝사랑, 첫사랑.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를 주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말했거든.”
가끔 나오는 벨프리 시점의 회상 신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풋내 나는 첫사랑 그 자체였다.
예를 들면 아드리안이 벨프리를 상대로 치는 장난의 수위가 높아져 울먹거리면서도 절대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하는 점만 봐도 그랬다.
루루의 중얼거림을 들은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영아, 감정은 때로 왜곡되거든? 괴롭힘은 괴롭힘일 뿐이지 그런 걸로 첫사랑 따위가 성립되지 않아.”
멋모르는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니었지만 칼 린드버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막말하자면 아드리안은 벨프리가 만만했고 벨프리는 아드리안이 무슨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을 뿐이었다.
충심이 연정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 이전에 수긍에 가까웠다.
칼 린드버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 치자 루루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욱기가 치밀어 올랐다.
명실공히 광공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던 소설 속의 아드리안이 알고 보니 다정물렁공이었다는 것도 짜증 나는데, 왜 자신이 비엘 소설 읽은 걸로 이렇게 죄인처럼 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 오메가버스는 다 그래. 발정 나면 한 번 하고, 한 번 하면 두 번 쉽고. 그러다 보면 임신하고 체념하고 사는 거라고.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엄밀히 말하면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전재영이 읽었던 오메가버스 소설은 그랬다.
혈압이 오른 칼이 열변을 토했다.
“힘의 우위가 명확한데 거절할 수 없는 쪽이 마냥 받아 주기만 하는 게 무슨 사랑이냐?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체념은 체념이지 사랑 아니야 그거.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나누는 게 사랑이지.”
그리고 무슨 버스? 칼 린드버그가 아는 버스는 하나밖에 없었다. 전우영 인생에서 단 하나뿐인 동생을 앗아 간 그 사고의 원인 말이다.
“그래서 죽도록 후회한다니까. 벨프리라고 가만히 있었겠어? 발버둥 치고 도망가고 결국에 잡혀 와서 발목도 한 번 부러지고.”
싸아아.
루루는 질색하는 칼 린드버그의 표정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다 사랑을 자각하는 과정이었다고?”
중얼거린 칼 린드버그는 괜히 제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칼 린드버그는 도통 현실의 아드리안과 겹쳐지지 않는 소설 속 아드리안 헤네켄과 벨프리의 감정선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취향을 존중해 주고 싶었지만 잔소리가 먼저 나왔다.
“그, 재영아. 생각을 해 봐. 네가 재벌 3세 소꿉친구가 있는데. 걔네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 월급도 주고 네 월급도 준대.”
뜬금없는 소리에 루루가 눈을 치켜떴다.
“걔네 부모님도 존경스럽고 소꿉친구도 존경스러워서 어찌저찌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발정 났다고 너한테 이만한, 이이만 한 무를 엉덩이에 넣으면.”
팔뚝을 내밀며 몰입하던 칼 린드버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순화해 보았지만 ‘그것’의 용태를 이미 알고 있는 칼의 입장에서 무는 지나치게 귀엽고 매끈한 표현이었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내 발목까지 부러뜨리면 그게 후회한다고 용서해 줄 수 있고. 사랑이 되고 그러겠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지금의 아드리안이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아도 말이다.
아주 나중에 용서를 해 준다고 쳐도 당장 주먹이 먼저 나왔을 텐데.
“게다가 아드리안은 재벌 3세가 아니라 황태자라서 함부로 때리지도 못한다니까.”
충성심이 과한 벨프리는 그걸로 황태자가 제국법의 심판을 받아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도 원치 않았겠지.
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좀 안일했지. 그런 소설인 줄도 모르고 네가 좋아했다길래 아드리안이 마냥 착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인 줄 알았거든. 내가 본 로맨스 소설 주인공은 다 그래서.”
맞은편에 있던 루루의 볼이 발긋하게 상기됐다.
감정이 다 얼굴에 드러나는 동생을 처음 본 칼은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지난 생의 전재영이 얼마나 억눌려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는 이제 와서 루루에게 왜 그런 소설을 읽었느냐고 따지거나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한 소설적 허용이니 관용을 베풀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단순히 그것은 평범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고 루루에게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빤 어떤데?”
가만히 있던 루루가 물었다.
“뭐가?”
“아드리안이 이제 싫어졌어? 피폐 소설 주인공이라서?”
그럴 리가. 칼이 헛웃음을 쳤다.
“아드리안은 나한테 여전히 정의롭고 착한 주인공이야.”
“주인공을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도 그래?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오빠는 남자랑의 연애. 상상도 못 해 봤을 거 아냐.”
루루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눈을 살금살금 피하면서도 조곤조곤 묻고 싶은 건 잘도 물어봤다.
한때 레아 린드버그에게서 재영일 겹쳐 봤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린애 같았다.
제 최애가 이제 와서 오빠한테 미움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된 건가. 귀엽기는.
“난 아드리안을 인간적으로 많이 좋아해. 시작은 유별났지만, 그가 나한테 보여 주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꼈고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
종종 보여 주는 질투가 심한 모습조차 귀여워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다.
“흐음.”
루루는 어느새 칼의 옆에 붙어 앉았다.
“애가 바르게 잘 자랐어. 가끔 미치광이처럼 보여도 말이야. 정도를 잘 지킨다고. 나도 내가 남자한테 흥분할 수 있는 줄은 몰랐지만 몸도 얼굴도 근사하잖냐.”
칼 린드버그는 자리에 없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덧그리며 주절주절 말했다.
“솔직히 갑자기 나보고 애를 낳으라고 했을 때는 이거 완전 또라이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기서는 그게 상식이잖아? 아드리안은 항상 상식선에서…… 뭐야?”
지나치게 가까운 루루의 의미심장한 얼굴에 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 곧 무를 넣어도 되겠네.”
“뭐?”
“진짜 그 정도로 커? 웬일이냐. 나 너무 신난다. 오빠. 다음에 기회 되면 자세히 알려 주라.”
혈육의 사생활을 알게 되는 것은 다소 불유쾌한 경험이지만 루루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얼굴이 칼 린드버그고, 몸이 아드리안 헤네켄인데.
콧구멍이 한껏 팽창된 루루에게 칼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돌려주었다.
“야, 너, 진짜.”
“아, 뭐가 문제냐고. 성인이고, 서로 좋아하는데. 조만간 하겠네. 하겠어. 애들 장난 같은 거 말고.”
“하긴 뭘 해. 이게 발랑 까져 가지고.”
칼 린드버그의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 버렸다.
“오빠. 동정공이 왜 맛있는지 모르지. 몸소 체험 권장.”
“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 린드버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 * *
루루와 한바탕 입씨름을 하고 오전을 보낸 칼은 점심도 거른 채 오수에 빠졌다.
그런 그가 뒤숭숭한 꿈자리 때문에 벌떡 일어난 것은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질척거리고 음습한 꿈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밖을 보며 홀로 넓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순간이 못 견디게 쓸쓸했다.
‘보고 싶다. 아드리안.’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청승이냐 싶다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하냐고 마음을 돌린 칼은 품을 뒤적였다.
영롱한 보랏빛의 마정석에 추가한 수식은 그의 진심이고 바람이었다.
칼은 제 손에 쥐어진 마정석에 가만히 집중했다.
동그란 구체가 손 위에서 웅웅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의지’를 담았다. 정확히 말하면 의지가 담긴 목소리를 담았다.
소곤소곤 뭐라 말한 뒤에 머뭇거리다 입술도 한 번 붙였다 뗀 칼은 마정석에서 팔랑팔랑 솟아오르는 나비를 보며 입을 헤벌렸다.
나비는 좁은 창문 틈을 잘도 비집고 날아올랐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뒤늦게 민망해진 칼이 제 볼을 긁적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마법 소녀 같네.”
문득 배가 고팠다.
칼은 설렁줄을 당기는 대신 직접 주방으로 가 보기로 했다.
마르코가 매일 정성스레 빗질을 하는 털옷을 걸치고 허리춤에 마정석을 매달았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마정석의 무게를 손끝으로 더듬은 칼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라는 기존의 수식 아래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새겨 넣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수식이 반짝 빛을 내다 수그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