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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97)화 (97/150)

“뭐가, 어쩌고저쩌고 백만 피폐 마니아들 적으로 돌리는 소릴 하고 있어. 하여간 고지식해서 못 쓴다니까.”

루루가 복도를 폴짝폴짝 뛰었다.

그녀는 오빠와의 만남이 뒤늦게 실감 나 잔뜩 들떠 있었다.

무엇보다 비공식적인 최애의 시누이. 아니 뭐라고 그러지. 처제. 그래. 처제가 된 것이다.

“역시 오빠는 내 치트키야.”

루루가 전재영일 때도 오빠는 그녀의 인생의 희망이고 구원이었다.

동생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데다, 뭐든 괜찮다 괜찮다 하는 동생 바보라서. 갖가지 사건으로 생긴 상처도, 부모의 빈자리도 금세 아물었다.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건 당시의 전재영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고 나서 가장 후회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빠,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 네 단어를 아끼고 있었던 것.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돌릴 수 있게 되다니.

신이 난 루루는 흥얼흥얼하며 복도를 서성거렸다.

“아!”

불현듯 스치는 생각 때문에 루루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음 놓고 두 사람의 응원하려니 커다란 벽이 하나 있었다.

전재영의 취향은 동정공을 능수능란한 수가 휘어잡고 있다고 착각할 때 뒤집히는 건데.

껍데기만 오메가인 고지식한 오빠가 휘어 잡히면 잡혔지 아드리안을 리드하긴 글러 보였다.

본방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그것 때문인가.

이러다가 동정공수로 아무것도 못 하고 15금 미만으로 스토리가 끝나면 어쩌지.

루루가 미간을 짚었다.

“어쩔 수 없네. 내가 옆에서 코칭을 잘해 줘야겠네.”

“뭐가 어쩔 수 없어?”

미간을 붙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루루 앞에서 마르코가 뾰족하게 말했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관두는 게 좋아. 마녀.”

정원에 엘리자벳을 풀어놓고 혼자 들어온 마르코는 마녀가 혼자서 쇼하는 것을 아까부터 지켜 보고 있었다.

“아, 뭐냐. 너냐?”

루루가 심드렁히 대답했고 마르코는 기분이 상했다.

“마르코라고 제대로 이름 불러. 쉽게 하대하지도 말고. 같은 평민이지만 나는 왕자님의 시종이고, 너는 직책도 없잖아.”

날 선 마르코의 반응에 루루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왕자님께서 널 친구처럼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다 인정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마.”

루루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그녀가 칼 린드버그 왕자에게 버릇없이 군 건 사실이지만 그녀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수 있는 건 최애, 차애. 그리고 오빠인 칼 린드버그뿐이었다.

“미안한데, 난 인정 따위 필요 없어.”

마르코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루루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칼과 아드리안의 약혼식 이후 그는 한낱 몸종에서 어엿한 시종으로 거듭났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사용인들에 비할 바는 못 되어도 명실상부 왕자의 최측근이라는 말이었다.

붉은 기가 도는 곱슬머리와 주근깨가 남아 있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헤네켄에서 잘 먹고 잘 잔 덕에 부쩍 키도 크고 어깨도 벌어졌다.

왕자는 마르코가 말랐다고 툴툴거려도 그것은 근육질의 기사를 동경하는 왕자의 시선일 뿐이었다.

엘리자벳의 덩치가 산만 해지는 동안 마르코도 청년에 가깝게 자랐다.

루루는 이 시종이 의외로 준수한 외모라는 것에 개미 콧물만큼 감탄하는 중이었다.

“자꾸 건방지게 굴지 마. 왕자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네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테지만. 거리에서 굴러먹던 가락이 있어 실수할지도 몰라.”

협박하는 모양새가 자연스럽다.

거리에서 굴러먹었다는 것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 품을 뒤져 푼돈을 꺼내고. 빈집을 털어 식량을 찾는다. 지나가는 행인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재빨리 도망을 친다.

어린 마르코가 성안에 들어오기 전까지 했던 일이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 후회는 없었지만 왕자에게는 쉽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그의 일면이기도 했다.

고질적인 왕자의 학대를 묵묵히 겪었던 건 그런 왕자라도 마르코를 빈민굴에서 건진 사람이라서였다.

가시 돋친 왕자의 태도가 빈민굴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자신의 삶과 어딘가 닮아 보여서였다.

맹목적인 충성심은 왕자가 기억을 잃은 후에 더 심해졌다.

지금의 칼 린드버그는 사서 고생하는 일이 많았고 위험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힘을 기를 거라고. 왕자님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누구도 왕자님께 상처 줄 수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방만하고 정체를 모르는 마녀는 더.

마르코가 이를 갈자 그것을 빤히 보던 루루가 아, 하고 소리 냈다.

“그래서 자꾸 다쳐 오는구나?”

“뭐?”

루루는 겁도 없이 마르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야, 뭐 하는 거야?”

마르코는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왕자가 방에 있을 때마다 자리를 비우는 것은 비밀 훈련 때문이지?”

마르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짠가 보네. 왕자의 시종인 너를 대놓고 괴롭힐 사람도 없는데 가끔 쩔뚝거리거나 손목이 부어 있길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경계심 강한 고양이처럼 털을 세우는 마르코에게 루루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람이 한가하면 관찰력이 높아져.”

“……왕자님껜 비밀로 해.”

한풀 꺾인 기세의 마르코에게 루루는 “그러지, 뭐.”라고 대답했다.

그녀를 지나쳐 왕자의 방으로 향하려는 마르코의 손목이 다시 잡혔다. 이번엔 뿌리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선생님을 모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잘못된 자세로 훈련하니까 몸만 아프고 실력은 늘지 않는 것 같거든?”

“네가 내 실력이 느는지 안 느는지 어떻게 알아?”

루루가 씨익. 웃었다.

마르코는 그녀의 웃음이 껄끄러워 인상을 팍 찌푸렸다.

“딱 보면 척이지, 부자연스레 솟은 승모근. 부어 있는 손목. 물집이 잡히지 않은 손바닥. 그리고 절뚝거리는 다리.”

이래 봬도 전생에 체대 지망생이었는데. 그걸 모르겠니.

제대로 걸린 듯 망부석이 된 마르코를 보며 루루가 요사스레 눈을 빛냈다.

* * *

식사를 마친 지 오래되었지만 칼 린드버그도, 벨프리도 주방을 떠나지 않았다. 주방장과 시종 몇이 안절부절못하며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

“……전하를 사랑하십니까?”

칼 린드버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화구에 주전자를 올릴 때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프리가 갑자기 직구를 날렸다.

“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칼의 대답에 벨프리는 반쯤 실망하고 반쯤 안도했다.

커피를 마시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어차피 일찍 잠들기엔 그른 터라 칼은 커피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난 커피 마실 건데, 벨프리는 뭘 마실래요? 계속 빈속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카모마일 티 같은 걸 마시면 좋을 텐데.”

커피를 마시겠다고 해도 카모마일을 내밀 요량이었다.

같은 걸로 마시겠다고 말하려던 벨프리는 답이 정해져 있는 듯한 칼의 단호한 뒷모습에 “아무거나요.” 하고 대답했다.

칼 린드버그가 뜨거운 물을 각자의 컵에 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던 벨프리는 손톱 주변 거스러미를 뜯으며 칼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좋아하는 마음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준 칼에게 벨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중을 가지고 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칼은 벨프리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마음을 밝히기로 했다.

그것으로 벨프리가 아드리안에 대한 미련을 접어 주길 바라면서.

또는 그것으로 자신도 몰랐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모를 수도 있습니까?”

“사람이 좋고 싫음엔 이유가 없다고들 하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이유를 꼽으라면 너무 많고 사소해서. 근데 또 대단한 이유는 없더군요.”

“조건 없는 사랑이란 것이 존재합니까?”

연애 불능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하는 말이라는 게 이런 거였다.

한쪽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던 사람이고 한쪽은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잘나가는 집안의 막내아들로 사랑도 글로 배웠다.

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아드리안을 떠올렸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 사람이어야 했는지.

고민을 하는 듯 음, 하고 소리를 내는 칼에게 벨프리가 선수를 내놓았다.

“아, 하긴 황태자 전하께선 문무 양도하신 데다가 마법적 기량도 뛰어나니 왕자님께서 반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은근히 자신의 외모도 뒤처지지 않는다 생각한 벨프리는 외모 이야기는 쏙 빼고 말했다.

“게다가 왕자님께서는 미색도 뛰어나시고, 재주도 많으시고, 성격도 좋은데 우성 오메가이기까지 하니 서로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려던 벨프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벨프리의 부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두 사람은 타고나기를 서로의 짝으로 난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우위에 서서도 안 되고 설 수도 없는 몸이었지만, 오메가가 된 바람에 더욱 칼 린드버그와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 이게 내 절망의 근원이구나.

벨프리가 동당동당 뛰는 가슴을 문질렀다.

그 꼴을 지그시 바라보던 칼 린드버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 아드리안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게 아니면 우린 애초에 엮일 일도 없을 거였다고.”

칼은 따듯한 컵을 만지작거렸다.

“나한테 매번 좋은 사람이라고 뭐라고 했잖아요. 벨프리가.”

그 말이 제 뼈를 때렸답니다.

하고 후르륵 커피를 마신 칼이 비싯 웃었다.

벨프리의 양 볼이 달아올랐다.

“그건 그냥 홧김에, 제가 어리석어서.”

“아닙니다. 맞는 말이에요. 나요.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고 싶어 안달 나 있었던 것 맞아요.”

“예?”

원래는 아드리안이 오면 그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원래 자기한테 부족한 점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나한테는 그게 가족애고 또 헌신이었습니다.”

벨프리는 왕자가 표면적으로 사랑받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었던 점을 기억해 냈다.

해 달라는 것 다 해 주고 사치품을 안긴다 해서 그게 애정이 될 순 없었으니까.

“내게 헌신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대신 내가 헌신하기로 했고, 아드리안의 가족이 부러워 그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기로 했었는데.”

칼 린드버그는 ‘좋은 사람’ ‘멋진 오빠’ ‘자랑스러운 아들’을 한 꺼풀 벗었다.

“그게 다 자기만족이었다는 말이에요. 내가 불안해서, 내 결핍이랑 자격지심을 숨기려고 남한테 다 퍼주고,”

벨프리는 아니라 반박하고 싶었다. 칼 린드버그는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게 아니었다고.

“아무튼, 그래서 아드리안에게도.”

우르릉.

칼이 입을 다물었다.

천둥이 치나? 오늘은 분명 맑았는데.

칼과 벨프리가 이상한 진동 소리를 느끼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일행이 돌아온 건가?”

“……그렇다면 황성에서 먼저 연통을 줬을 텐데요.”

우르르릉.

이번에는 조금 더 길고 확실한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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