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에 두 사람이 동시에 꿀꺽 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죠?”
칼이 먼저 말을 걸었고 벨프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숨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두 사람은 누군가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왕자님! 소공자님!”
주방장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문을 벌컥 열었고 주방장과 시종 몇이 구르듯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는 모두 주방으로 들어온 뒤 병사들이 어딘가로 우르르 달려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문을 닫았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던 사람들 중 주방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체불명의 마수가 성내에 있었습니다!”
“정체불명의 마수?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화들짝 놀란 벨프리가 주방장을 닦달했고 다른 시종이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복도를 기어 다니는 괴생물체를 발견했습니다.”
“저희는 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이 시녀가 달려와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방장이 어떤 시녀를 가리켰고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의 양어깨를 감쌌다.
벨프리가 소상히 보고하라고 명령하자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거대한 지네 같았습니다. 다리가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되어 보였고 탑을 부술 만큼 덩치가 큽니다. 저는 서쪽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이쪽으로 바로 도망쳤습니다.”
“탑을 부쉈다고?”
“몸부림치며 탑을 부수고 나와 그대로 정원으로 나간 것이 순식간에 본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입에서 불이라도 뿜는 건가.
마수가 이능력을 쓰는지 어쩌는지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지라 그것이 무슨 수로 사람을 해치는지 가늠해 보던 칼 린드버그가 그의 빈약한 상상력을 탓했다.
“독기를 지닌 듯 정원이 엉망입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하여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다 했습니다.”
이를 딱딱 맞부딪치면서 왕자의 눈치를 살피던 시녀는 칼 린드버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어, 얼굴이. 사람의 형태였는데. 그것이, 왕비님의 얼굴 같아서.”
“뭐요?”
칼 린드버그가 더할 나위 없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서 드람뷔 자작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마력이 있는 인간도 식시귀가 될 수 있습니다.〉
〈여신의 축복 아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주 적냐, 적냐, 많냐, 아주 많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마력이 큰 존재가 식시귀가 되면 아주 골치 아픕니다. 그만큼 강하니까요.〉
이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대부분 베타. 그들의 상관인 기사들 몇은 형질자.
그중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사람은 칼 린드버그 자신이었고 이제는 오메가가 된 벨프리 헨드릭이었다.
자, 이 둘을 빼고 식시귀가 된다면 강할 자가 또 누가 있던가.
그건 다름 아닌 왕비였다.
린드버그 왕성에서 칼 린드버그를 빼면 유일한 우성 형질의 오메가였던 그녀는 키치너와 내통했었으니.
어떤 경로로 그녀를 식시귀로 만들었느냐는 둘째치고 지금 나타난 괴생물체가 그녀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불안감을 느낀 칼이 허리춤에 있는 마정석을 더듬은 후 옆에 놓인 식칼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검도 휘두를 줄 모르면서 식칼은 왜 챙기는가 하던 벨프리도 과도를 집어 허리춤에 넣었다.
두 사람은 살짝 움직여 문 앞으로 나아갔다.
칼 린드버그가 먼저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기사들의 갑옷이 마주쳐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창을 타고 넘어오기도 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무언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생물이 발톱으로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소리는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겼다가.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다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방장을 포함한 사람들의 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개중에는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병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들은 전투와는 거리가 먼 일반 사람들이었다.
“저쪽으로 가 있어요.”
칼 린드버그가 식칼을 고쳐 쥐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안 됩니다. 왕자님.”
사용인들은 갑자기 문 앞에 있던 칼과 벨프리를 밀쳤다. 상당히 무엄한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몸을 바리케이드처럼 쓰려는 듯 문에 등을 대고 차곡차곡 선 그들의 행동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 린드버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비켜요.”
이러다가 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가장 먼저 다칠 텐데.
“저, 저희는, 괜찮습니다. 왕자님. 이미, 황성에도 연락이 갔으니 지원도 금방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십시오.”
비장한 얼굴의 주방장이 제 몸으로 문을 가로막으며 더듬더듬 외쳤다.
“비키라고요.”
칼이 말했지만 그들은 고개만 흔들었다.
“여, 여차하면. 두 분은 저희가 지켜야 합니다.”
밖의 소란스러움이 좀 더 확실하게, 그리고 크게 들렸다.
검이 마주치는 소리.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발바닥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마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 린드버그의 심장이 더할 나위 없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가 공포와 비장이 섞인 시선들을 마주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기력함이 뇌 속을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등불 같은 아드리안 헤네켄을 기다리며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윽.”
칼 린드버그가 엄습하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왕자님!”
“아니, 괜찮습니다.”
벨프리가 황급하게 왕자를 불렀고 왕자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너는 린드버그의 왕자였고 헤네켄의 황후가 될 몸이니, 책임감을 가져라.〉
레아 린드버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 레아는 그렇게 자신의 손에 기꺼이 피를 묻히기를 결정했다.
아드리안도 그렇게 변방으로 나섰다.
“정신 차리십시오. 왕자님.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주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왕자를 지키겠다고 너도나도 의지를 불태웠다.
이 사람들을 두고 나만 살아서 행복한 엔딩을 맞을 순 없었다.
모두를 지킬 힘이 있다면 좋지만 그럴 순 없다 하더라도.
“저것이 단순한 마수라면 그저 버티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실력 좋은 검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까요. 지금도 많이 약해진 듯 보입니다.”
문에 귀를 댔다 뗀 벨프리가 말했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느려진 것은 그것이 배로 바닥을 미는 소리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칼은 불현듯 루루와 마르코, 그리고 엘리자벳의 존재를 떠올렸다.
“구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검을 쓰는 병사들도 단번에 잡지 못하는 괴물을 식칼 따위로 죽일 수 있을 것인가.
비틀거리는 칼 린드버그의 어깨를 벨프리가 강한 힘으로 움켜쥐었다.
“주방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습니다.”
벨프리가 기억을 더듬어 성의 모든 통로를 상기시켰다.
“아!”
그제서야 통로의 존재를 깨달은 주방장이 시종들을 제치고 나서서 주방 바닥을 두드렸고, 텅텅 소리가 나는 부분을 더듬어 손잡이를 찾아내었다.
그동안 식자재 대부분을 시종들이 주방까지 직접 날라 줬던 터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통로의 문을 여는 동안 시종들은 주방의 집기들을 문 앞에 쌓았다.
칼 린드버그는 주저하지 않고 훌쩍 뛰어 내려갔다. 사람 두셋 정도가 나란히 설 수 있는 통로는 어두웠다.
“벨프리.”
벨프리도 칼 린드버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비가 갑자기 식시귀가 되었다면 말 다 했습니다. 키치너와 파르만이 손을 잡고 왕비까지 이용한 걸 겁니다.”
벨프리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마도구를 꺼내어 휙휙 흔들었다.
이내 사방팔방에 작은 폭죽처럼 빛이 튀었다.
“목적이 있는 녀석이라면 그것이 원하는 것은 이 성에 단 한 명, 왕자님뿐입니다.”
시종들이 줄줄이 안으로 내려오고 마지막으로 주방장까지 내려와 통로 입구를 닫은 것을 확인한 칼은 벨프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빛은 잠시 머물러 앞을 비추었다가 꺼졌고, 벨프리는 다시 구체를 흔들어 빛을 비추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휑하니 넓은 곳이 나왔다.
곳곳에 오크통과 채 소비하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식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린드버그 왕성이 폐쇄되어 있는 동안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는 공간 같았다.
칼 린드버그는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았고 쥐새끼 한 마리 없다는 점을 의아해했다.
‘이것도 마법인가, 그렇다기엔 마정석이 보이지 않는데.’
지하 저장고 천장에 또 다른 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벨프리는 사다리를 잡았다.
“왕자님 올라가세요. 여기는 지하 저장고이고 위쪽이 창고입니다. 창고에서 본관 1층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이 또 있습니다.”
그사이에 불빛이 또 꺼졌다.
칼 린드버그는 먼저 사다리에 올라 뻑뻑한 출구 입구를 힘주어 밀었고. 부연 먼지와 함께 펜트리로 꽉꽉 차 있는 창고를 살폈다.
마도구를 품에 넣은 벨프리가 뒤이어 올라오고 칼은 주방장까지 일일이 손을 붙들어 수월히 올라올 수 있게 도왔다.
“본관에 도착하면, 다른 분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나가십시오. 저는 곧장 제 방으로 가겠습니다.”
창고를 둘러보며 선 칼의 말에 벨프리가 구체를 흔들다 말고 탁 떨어뜨렸다.
“왕자님도 함께 가셔야지요.”
벨프리가 떨어뜨린 마도구를 칼이 주웠다.
빛을 담다. 흔들고. 쏟아 낸다.
역시 직관적이구나.
마도구를 흔들자 빛이 튀며 칼 린드버그의 말간 얼굴을 비추었다.
“우리가 본관으로 나가기 전에 저것이 죽는다면 모를까. 살아 있다면 저는 미끼 노릇을 해야만 합니다.”
칼 린드버그의 말을 들은 주방장이 후미에 있다가 펄쩍 뛰었다.
“절대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방에 들른 뒤에는 루루와 마르코, 엘리자벳까지 데리고 나갈게요.”
“병사들이 이미 안전한 곳으로 모셨을 겁니다.”
사용인들이 한목소리로 왕자를 말렸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나가면 저것이 쫓아 나올지 몰라요. 그럼 성 밖에 있는 엉뚱한 사람들이 다칠 겁니다.”
팬트리 뒤에 있는 허름한 문을 용케 찾은 칼 린드버그가 문을 열며 주방장의 등을 떠밀었다.
“방까지만 갈게요. 거기 마정석이 한가득이라. 꼭 챙기고 싶군요. 식시귀가 그것까지 먹어 치우고 더 강해지면 어떡합니까.”
식시귀가 마정석 자체를 먹이로 삼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으나 마력이 담긴 시체를 먹고 강해지는 녀석이니 마정석도 그럴지 몰랐다.
주방장과 사용인들이 마지못해 먼저 들어간 뒤 칼은 벨프리를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벨프리는 그 표정이 뜻하는 바를 눈치채고 맥이 탁 풀렸다.
“정말 질립니다. 왕자님.”
“미안해요.”
벨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용인들의 뒤를 따랐다.
칼 린드버그의 파란 눈동자에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