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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99)화 (99/150)

아드리안 헤네켄이 칼 린드버그의 나비를 만난 것은 린드버그 성으로 돌아오는 길목 딱 중간 지점이었다.

그의 목에 걸린 마정석에서 솟아올라 제 품에 안기는 나비를 잡아채고도 말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의 열기가 늦은 겨울 찬 공기에 닿을 때마다 풀풀 김이 났다.

린드버그 왕성에서 생긴 문제를 구태여 보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왕성에서 시작된 봉화는 금방 아드리안이 지나친 성벽까지 줄지어 올랐다.

아드리안이 뿌득 이를 갈았다. 두세 시간만 빨리 출발했어도 칼을 저곳에 홀로 두었을 리가 없는데.

변경에서는 내도록 기승을 부리는 식시귀들 때문에 다른 문제까지 겹쳐 생겼다.

시체를 태워 그들이 지닌 고유의 정수를 분리하는 작업이 시체가 쌓이는 시간보다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피 냄새를 맡은 미바리의 다른 마수들까지 내려오는 통에 인원은 충당되는 즉시 소모되었다.

저녁 식사만큼은 칼 린드버그와 하겠다던 계획이 틀어지자 아드리안 헤네켄의 분노는 눈빛만으로도 마수를 태워 죽일 만큼 커졌다.

지쳐 있는 병사들과 먹고 자지도 않으며 가감 없이 폭주하는 아드리안 헤네켄 사이에서 변경 수비 책임자인 제임스의 등이 터졌다.

더 두었다가는 앞뒤 안 가리고 미바리 숲을 전부 불태우고 파르만까지 쳐들어간다고 할까 봐 노심초사하게 된 제임스가 결국 아드리안에게 제발 린드버그 왕성으로 돌아가 달라고 애원했다.

당장이라도 칼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아드리안이었지만 여기를 이렇게 두고 가는 것도 저어되어 갈등하는 찰나에 헤네켄에서 연락이 왔다.

버번 백작은 글렌 황제가 파르만을 상대로 비공식적 선전포고를 할 것을 알려 왔다.

제임스가 이때다 싶어 황태자의 등을 떠밀었다. 전시에 황태자가 타국의 변방에 있는 것도 옳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살생이라면 질릴 만큼 했다.

대사제 다니엘이 왜 그렇게 아비 귀에 딱지가 않도록 살생하지 말라 외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피를 볼 때마다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도 징그럽다거나 잔인하다거나 하는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해서 그저 둔감하다고 여겼던 게 틀렸다.

아드리안은 그 안의 잔혹한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을 분명히 인지했고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칼의 곁으로 가는 설렌 마음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 언젠가 홀연히 사라진 칼 린드버그를 찾으러 나설 때처럼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키치너든, 파르만이든. 지금 성에 있는 것이 그 무엇이든.”

칼 린드버그의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다 죽일 거다.

심약하지만 고집쟁이인 그가 잔인한 자신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턱에 힘을 주는 아드리안의 눈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하늘을 날던 말이 발을 디디고 다시 솟구치느라 어느 집 담장을 밟았고 부실한 담이 우르르 쏟아졌다.

집 안에 있던 사람이 후다닥 달려 나왔으나 그가 본 것은 무너진 담장 위에 대충 던져 놓은 금화였다.

저만치 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늦은 밤인데도 환한 왕성과 무언가 터지는 소리. 왕도를 경비하던 병사들이 성문을 막으며 소리치는 것이 아드리안의 눈에 선명히 보였다.

아드리안은 눈을 부릅떴다.

아직도 그의 피가 절절 끓고 있는데, 정체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헤네켄에 돌아가면 아드리안 헤네켄은 자신의 몸을 칼 린드버그에게 묶어 둘 생각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에 미쳐 있는 주인을 만난 죄로 말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때 아드리안의 손에 꼭 쥐어졌던 나비가 그의 손 틈을 비집고 다시 날아올라 귓가에 머물렀다.

아드리안이 하, 하고 작게 한숨을 쉬며 고삐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아드리안, 흠흠, 몸은 건강한지 궁금하다. 큭. 이 마법이 성공한다면 좋겠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부디 조심히, 그리고 빨리 돌아왔으면.]

칼 린드버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무리는 아주 작은 소리로 ‘이러고 있으니까 꼭 마법 소녀 같네’였다.

언제 또 이런 재주를 배웠어.

머리가 조금씩 식어 갔다.

아드리안의 마정석은 희미하게 빛을 내며 칼 린드버그가 아직 무사히 존재함을 알렸다.

그제서야 이성의 끈을 붙든 아드리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너는 엄밀히 따지면 마법 청년이야. 칼 린드버그.”

들리지도 않을 대답을 한 아드리안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 * *

루루와 마르코는 건물과 가까운 수풀에 몸을 숨겼다.

“흐윽, 흐윽,”

마르코가 어깨를 잘게 떨며 울었다.

그의 눈은 바쁘게 성 안쪽을 살폈지만 왕자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만 울어, 우리 오빠 아직 안 죽었거든?”

루루가 마르코에게 손수건을 탁 던졌다.

“왕자님을, 끅, 왜, 오빠라고 불러, 이, 훌쩍, 무엄한.”

나름대로 울음을 참으면서 마르코는 매섭게 루루를 노려보았고 그녀는 기가 차서 맞서 노려보았다.

“넌 지금 그런 게 따지고 싶냐. 그냥 좀 넘어가.”

루루도 혼란하긴 마찬가지인지라, 불안하게 병사들의 뒷모습만 눈으로 좇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옥신각신하던 중이었다.

칼 린드버그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마르코를 뒤쫓던 중 쾅, 소리와 함께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들이 깨져 나갔다. 거기서 괴상한 모습의 괴물이 나왔을 때는 현실감각이 없어 둘 다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사람의 팔다리 모양을 한 것을 수백 개나 달고 있는 그것을 본 마르코는 “와, 와, 왕비님이!” 하고 까무룩 기절했다.

루루가 정신 차리라며 마르코의 따귀를 때리는 동안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탑 쪽으로 달려갔고 그중 한 사람이 마르코와 루루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왔다.

괴물이 기를 쓰고 본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기 때문에 병사는 루루와 마르코에게 절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말했다.

괴물의 몸에서 끈적한 액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병사들의 살점이 함께 녹았다.

루루는 구역질을 하며 아직도 기절해 있는 마르코를 흔들어 깨웠다.

잠시 후 “왕자님을 찾아야 해!” 하고 외치며 일어난 마르코는 루루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빠가, 아니. 왕자님이 주방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그럼 당장 주방으로 가야지!”

마르코가 벌떡 일어나자 루루는 그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미쳤니? 여기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가서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여기서 지켜만 보라고?”

“그래!”

“너는 그럴 수 있어도 나는 못 그래. 죽어도 왕자님 곁에서 죽을 거야!”

떼쓰는 아이처럼 구는 마르코에게 루루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잘 들어. 나도 너만큼이나 왕자의 안위가 궁금하고 간절하거든. 그런데 지금 네가 가잖아? 발목만 잡힐 수도 있어. 오빠는, 아니, 왕자님은 알아서 잘 탈출할 거고. 괜히 네가 눈앞에서 다치거나 잡히기라도 하면 그 성격에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서 너 구하고 자기가 죽겠지.”

루루의 말에 마르코는 풀이 죽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검도 쓸 줄 모르고 마법도 쓸 줄 모르는 걸림돌 그 자체였다.

“사사건건 주인공 발목 잡는 역할 해서 욕 뒤지게 먹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알았어?”

누구한테 욕을 먹는 건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르코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저 괴물, 왕비 맞아?”

“……맞아. 왕비님이야.”

괴물의 주둥이 위에 붙어 있던 건 분명히 왕비님의 얼굴이었다.

왕자님과 닮은 얼굴로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뭔가를 찾는 건, 왕비님이 맞았다.

마르코가 눈을 가렸다.

끔찍했다. 왕비님은 무슨 짓을 하고 계셨던 걸까.

혹은, 무슨 짓을 당하고 계셨던 걸까.

“아, 무지차 파르만.”

소설 내용을 생각하던 루루가 중얼거렸다.

파르만의 젊은 왕, 나쁜 의미로 미친놈. 그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대륙의 제패.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오메가버스에 충실한 오메가. 우성의, 꽤 괜찮은.

키치너가 왕비를 통해 왕자에게 꾸준히 먹여 왔던 페로몬 교란 약.

왕을 중독시키기 위해 썼던 어떤 장치.

루루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키치너는 베타에 가까운 알파라, 칼 린드버그와 각인도 수월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어떻게 왕자를 각인시켰지?

소설에 따르면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과 벨프리 헨드릭에게 앙심을 품는 것은 키치너와의 각인, 그 후였다.

키치너의 꼭두각시였던 왕비처럼 칼 린드버그도 키치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끝내 그에게 버림받고 그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 벨프리에게 돌아갔다.

자신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진짜’ 우성 오메가. 벨프리 헨드릭. 거기에 자신을 진작 짝으로 삼아 주지 않았던 아드리안 헤네켄에 대한 애증으로.

“모든 것을 마법으로만 하지 않았을 텐데.”

루루가 손톱을 물어뜯다 못해 피가 나려 하자 마르코는 울다 말고 루루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

은근한 걱정이 묻어나는 마르코의 음성에 멀뚱히 그를 바라보던 루루가 ‘아’하고 소리 냈다.

“네가 칼 린드버그에게 약을 가져다주었지?”

“아.”

뜬금없는 말에 마르코는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다잡았다.

마르코 평생의 죄책감이며 실수인 그것. 설마하니 왕비가 왕자에게 독약을 먹일 거라고 생각지 못한.

“그건 마법적 장치가 없는 약이었어. 맞지?”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중독되어 있었던 그, 물담배. 그것도 그냥 물담배였고. 맞아?”

“아마도.”

확실히 마녀는 마녀인 모양이었다. 린드버그 왕실 내부에 일어나는 일들까지 이렇게 세세히 알고 있었을 줄이야.

“우성 알파도 아닌 키치너가 칼 린드버그를 각인해서 쥐락펴락 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왕이나 왕비를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 전부 마정석과는 상관이 없어.”

그랬구나. 루루는 파르만이 숨기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은 마정석도 맞지만. 그것보다 더욱 몰두하던 것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법이나 마정석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파르만이 주력으로 사용한 건 아마도 마법이 아니야.”

“그게 지금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

마르코의 물음에 루루는 가슴을 턱턱 쳤다.

루루의 정체가 전재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빠는 마정석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었다.

오빠가 정확히 알고 싶었던 것은 마정석에 수식을 어떻게 입력해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것. 그리고 커다란 사건에 대한 일들이었는데. 소설 자체가 마정석에 대한 언급을 세세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루도 명확한 답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수식이 한글이었다는 것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오빠가 파르만에서 보낸 마수들에게서 마정석을 수집했어. 다들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파르만이 진짜 하고 있던 일은 그들을 세뇌시키는 거였어.”

마법의 힘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그게 무슨 상관이냐니까.”

마르코의 물음에 루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장은 상관없지만, 앞으로는 상관있을 거야.”

이런 사건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판타지 소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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