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린드버그는 본관에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괴물이 아직도 동관 주방 쪽에 있는지 그쪽이 소란스러웠다.
이미 건물이 초토화 상태였다. 군데군데 쓸린 자국이 가득한 계단과 부서진 손잡이, 형체를 알 수 없게 망가진 장식품들이 괴물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마정석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괴나리봇짐 메듯 둘러메고 잠시 숨을 골랐다.
루루와 마르코가 제발 성안에 없기를.
어디서부터 더듬어 찾아야 하나. 칼이 끙, 소리를 내었다.
“왕자님!”
누군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자주 왕래하며 얼굴을 익힌 병사 하나가 왕자의 방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병사가 칼 린드버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밖으로 피하십시오. 황태자 전하께서도 곧 당도한다고 하십니다.”
“아드리안이!”
칼 린드버그는 그제서야 조금 웃어 보였다.
내가 보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간 네게 쏠리다 못해 흘러넘치는 감정을 아끼려고 애썼던 거나, 잠시지만 의심했던 것을 사과하고. 칼 린드버그이며 전우영인 자신의 실체와 과거를 함께 마주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아드리안이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미리 집어먹은 겁은 이제 버리고 오롯이 나 한 사람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확실하게 말해 줄 예정이었다.
괴물의 처치와 파르만과의 전쟁 등 아직 산재한 문제가 많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아드리안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했다.
“일단 나오시지요.”
병사의 손에 이끌려 방 밖으로 나온 칼이 그에게 물었다.
“아, 혹시 라시다 루루와 마르코를 보셨습니까?”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전부 다 밖으로 대피하라고 했습니다. 아직 남아서 대치 중인 병사들도 많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것!”
콰드득.
병사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칼 린드버그는 눈앞에 점점이 흩날리는 핏방울들을 보고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섰다.
“……거짓말.”
바닥에서 솟구친 왕비의 얼굴을 한 괴물이 천연덕스레 병사의 시신을 먹어 치웠다.
“찾았어. 내 아들. 내 보물. 내 전부.”
입맛을 다신 괴물이 얼어붙은 왕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 * *
“왜, 말이 없어. 어미가 보고 싶지 않았니? 어째서 한 번을 찾아오지 않았어?”
왕비는 우는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머리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아주 작았고, 파묻혀 있는 거대한 몸체가 그녀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쩍쩍 금을 만들어 냈다.
사방에 악취가 깔렸다.
“왜 그랬느냐고. 묻질 않니? 이젠 이 어미 말이 말 같지 않은 게야?”
그녀가 흑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바닥이 들썩거리고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손과 발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끔찍했다.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칼은 간신히 참았다.
기사들이 “왕자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았다.
자욱이 깔린 안개가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았다.
칼 린드버그는 그 안에 홀로 고립되었다.
왕비의 얼굴이 칼 린드버그의 코앞에 다가왔다.
그녀는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했다.
키치너나 왕 옆에서 그녀의 외모를 칭송하는 것을 들으며 빙그레 웃고 있을 때보다 훨씬 인간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그랬어.
옥새를 찾으러 갔던 날 마주쳤던 왕비도 절박한 사람처럼 굴었고. 그때 이 사람이 인간이긴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과식은 좋지 않다고 몇 번을 말했니?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것이. 오메가답지 않아.”
그녀의 머리 뒤에서 손 두 개가 뻗어 나왔다.
팔을 주무르고 목덜미 뒤를 확인하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고 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 주인님이 좋아하시겠다. 이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주인님이, 누군데.”
브루스트 키치너?
아니면, 파르만의 국왕?
칼 린드버그는 힐끔 뒤를 돌아보며 움직이지 않는 발을 채근해 한 걸음 물러섰다.
“내게 머무를 곳을 주신 분. 내게 살길을 알려 주신 분. 내 원수를 죽이고 너를 가지겠다 하신 분.”
키치너인가.
이제는 알 바 아니었다.
칼 린드버그가 신중히 몸을 움직였다.
“나도 제법 괜찮은 오메가인데, 어째서 널 원하는지 모르겠어. 어려서 그런가. 네가 어리고 나보다 아름답기 때문인가.”
왕비는 이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호러 영화를 한 편 보는 기분이다.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안개는 짙어지고 있었고 그녀의 헛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칼 린드버그는 자신까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칼은 꿀꺽 침을 삼켰다.
“네가 아름다운 것은 날 닮았기 때문이야. 네가 우성의 오메가가 된 것도 내 덕분이었지. 그 돼지 같은 양반이 네게 물려준 것이라고는 왕자라는 허울뿐이었어. 그런데 왜 내게는 돌아오는 것이 없을까.”
주절주절, 참 말도 많다.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식칼을 만지작거리던 칼 린드버그가 왕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왕비.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였는데.”
“남들이 다 가진 것, 명예와 부. 나한테만 어려웠던 것.”
왕비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듯 얼굴을 빙그르르 돌렸다.
손끝에 식칼 손잡이가 걸렸다.
왕비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을 때 왕자는 등 뒤에 식칼을 감췄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키치너는 네게 그것을 주었나?”
“아니.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으니까. 네가 날 배신했잖아.”
“명예는 몰라도 부는 이미 갖고 있었잖아. 당신의 드레스, 보석, 그리고.”
당신의 자식들.
“그따위 것이!”
왕비가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악귀였으니 별다를 바 없었지만.
“내가 무슨 짓을 해 가며 버텼는지 모르잖아. 그것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
왕비의 손이 칼의 목을 조를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가만히 있으면 떨어지는 부와 명예를 네가 걷어찼어!”
칼 린드버그의 한 손이 슬며시 반대쪽 손에 있는 식칼을 만지작거렸다.
뒷짐을 지고 선 칼은 그녀의 손이 다가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넌 틀렸어. 어머니, 당신은 틀렸어요.”
칼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왕비는 멈칫했다.
“부와 명예는 스스로 쌓는 것. 누가 쥐여 주는 것이 아니에요.”
칼 린드버그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당신이 버티는 동안 했던 일들이 당신과 자녀들을 파멸로 몰아넣었잖습니까.”
둘.
“불쌍하지만 동정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지옥에 가서 따져 보세요. 누가 당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하나.
칼이 숨을 쉬고 왕비의 미간에 식칼을 꽂았다.
퍽 소리와 함께 역한 액체가 솟구쳐 올랐다.
손바닥에 소름 끼치는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 린드버그는 뒤돌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악! 칼 린드버그! 이 걸레 같은 새끼! 씹어 먹어도 부족한 새끼!”
천박한 말을 하는 왕비, 혹은 왕비의 얼굴을 한 괴물이 온몸을 비틀어 댔다.
린드버그 성을 조각낼 것처럼 날뛰었다.
그 파편이 달리는 칼 린드버그에게 튀어 자상을 냈다.
딛고 선 땅이 요동치니 뛰는 동안에도 여러 번 발을 접질렸다. 칼 린드버그는 손을 벌벌 떨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너를 죽여 버릴 거야!”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겁니다.
살생을 하다. 살생을 목격하다.
그 충격보다 큰 것은 살아서 나가야 한다였다.
전우영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전재영뿐이었지만 칼 린드버그는 아니다.
애써 다시 만난 루루와 마르코. 엘리자벳도.
툭하면 식음을 전폐하는 애들이니 따라 죽는다고 굶을지 몰랐다.
책임감이 강한 레아는 덤덤히 일상을 살아 나가겠지만 속으로는 앓을 테지.
벨프리도 은근히 정이 많아서, 칼 린드버그의 죽음은 상처로 남겠고.
아드리안은…….
뒤에서 쿵쿵쿵 방아 찧는 소리와 함께 왕비가 갈라진 얼굴로 쫓아왔다. 이마에 식칼을 박은 채였다.
“멈춰!”
칼의 명령에 쫓아오던 괴물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식칼의 손잡이에 어설프게 끼워 둔 마정석이 쨍하니 빛났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콰르릉. 괴물은 다시 그 자리에서 몸부림쳤다.
칼 린드버그의 목적지는 밖으로 이어지는 창문이었다.
복도 끝, 왕성 모서리. 사람들이 없을 만한 곳으로 칼은 달리고 또 달렸다.
아드리안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처럼 지옥까지 쫓아와서 칼 린드버그 내놓으라고 할 것 같아.
그런 일이 생기면 곤란했다.
두루뭉술 어리버리하게 살던 건 지금까지로 족했다.
“하.”
가까스로 창에 도달한 칼은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었다.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제멋대로 솟고 부서진 길로 오느라고 오래도 걸렸다.
칼이 창을 열고 한쪽 다리를 걸치자 아래쪽에 있던 기사들이 난리가 났다.
“제가 받겠습니다!”
“비켜요! 멀리 떨어져요!”
사람들이 지나치게 건물 가까이 있는 모습을 확인한 칼 린드버그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가까운 창문 놔두고 이쪽을 선택한 것은 그나마 출구와 거리가 있어서였는데. 왜 다 여기 모여 있는 거야?
칼 린드버그는 그 와중에 몇 명의 기사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을 말렸다.
“무너질 것 같으니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 비켜요! 명령이니까 저만치 떨어지라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애타는 몸짓과 꿈틀거리는 괴물의 실루엣을 확인한 사람들이 사방팔방 흩어졌다.
“왕자님!”
마르코의 얼굴이 흠뻑 젖어 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마르코의 옆에 루루가 엘리자벳의 목줄을 잡고 서서 손을 흔들었다.
“오빠!”
루루의 외침에 의아해할 새도 없었다. 벨프리 헨드릭과 사용인들까지 눈으로 확인한 칼 린드버그가 훌쩍 뛰어내렸다.
쾅쾅.
벽이 속수무책으로 부서져 내렸다.
“너는 내 아들이잖아! 내 태를 빌려 태어난 내 아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왕비의 절규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건물에서 뛰어내리던 왕자가 흘깃 그녀를 보았다.
마력이 그새 동이 났는지 괴물이 펄쩍 뛰어올랐고 그 손들이 떨어지는 왕자를 움켜쥐려 혈안이 되어 쫓아왔다.
“안 돼!”
병사들도 사용인들도, 모두 발을 굴렀다.
화살도 쏠 수 없었다. 괴물에게서 흐르는 피가 인간의 살점을 녹이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었다.
칼 린드버그는 괜히 뛰어내렸다 했다.
고작해야 3층이라 금방 바닥에 착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층고를 무시한 탓에 한참을 떨어져 내렸다.
마정석이 조금은 더 버텨 줄 줄 알았다.
이러다가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괴물에게 잡히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아니면 둘 다거나.
떨어지는 벽돌 조각에 정수리를 맞은 칼 린드버그가 몽롱해지는 정신을 차리려 일부러 소리 내 중얼거렸다.
“파르만에서 만든 마정석, 진짜 별로네.”
마법 소녀처럼 직접 마법을 구현해 볼까 하고 손을 뻗었을 때, 커다란 손이 먼저 그것을 잡고 바닥과 충돌하려는 칼 린드버그를 낚아챘다.
“그러니까 좋은 마정석 놔두고 왜 그걸 썼어.”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아래서 지켜보기만 하던 병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황태자 전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