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품 안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으니 그가 씩 웃으며 턱을 닫았다.
“어떻게?”
“나중에.”
아드리안 헤네켄은 허공에 반쯤 떠서 몸을 배배 꼬는 괴물을 물끄러미 보고는 성벽을 향해 눈짓을 했다.
황태자에게서 미미한 기운을 감지한 벨프리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부 피해라!”
벨프리의 급박한 음성에 뒤늦게 성벽 위에서 괴물을 향해 포신을 조준했다는 것을 알아챈 병사들이 사용인들을 둘러업고 성벽 가까이로 뛰었다.
“건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왜 성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고 하니 자신을 미끼로 쓰겠다던 왕자의 말 때문이었다. 절대로 괴물이 마을과 선량한 평민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왕자의 의지를 함께 지키기 위해서 성문은 아까부터 단단히 닫혀 있었다.
마르코는 칼 린드버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린 루루를 덥석 안아 들었다.
루루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도 발 있어!”
“알아!”
“알면 내려놔!”
“시끄러워! 잡기나 해.”
결국 마르코의 목에 손을 두른 루루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코는 무릎에 힘을 주고 달렸다.
엘리자벳은 왕자와 마르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마르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칼 린드버그! 얘야! 이러지 말아라!”
이제 왕비는 애원하다시피 했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왕비를 내려다보는 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사 명령을 내렸다.
“아들! 내 아들!”
포신을 떠난 포탄은 곧장 괴물의 몸체로 향했다.
쾅!
칼 린드버그는 괴물의 갈가리 찢어지는 몸뚱이와 흩뿌려지는 액체를 사람들에게 튀지 않게 하려 급히 보호막을 발동하는 병사들의 움직임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았다.
* * *
폐허나 다름없게 된 린드버그 왕성의 본관은 수습이 한창이었다.
괴물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위로 특수 처리된 천이 덮였고 건물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긴급 보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왕성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따로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헤네켄의 사절단 덕분에 작업은 빠르게 진척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각 분야의 노련한 장인들을 모셔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칼.”
아드리안이 한숨처럼 칼을 불렀다.
자신의 품에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한때 어머니였던 사람이 갑자기 괴물이 되어 자신을 공격했을 때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조금이라도 우는소리를 했다면 방아쇠를 당기기 힘들었을 것이라 확신한 아드리안이 일부러 급박히 전개한 것인데. 혹시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침묵하는 칼 린드버그가 갑자기 화를 내거나 아드리안을 원망하더라도 받아 주려고 마음먹은 찰나에 칼이 입을 열었다.
“나,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생겼어.”
아드리안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덤덤한 얼굴과는 반대로 덜덜 떨리는 칼 린드버그의 손을 꼭 잡았을 뿐이었다.
아드리안의 말은 마침내 땅에 네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마르코와 루루, 그리고 엘리자벳이 저만치서 뛰어왔고 벨프리는 사람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느라 바빴다.
칼 린드버그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제니스는 그녀의 수어 선생님과 다른 사용인들 틈에서 이쪽을 걱정스레 건너다보고 있었다.
칼이 먼저 말 등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늘 온화하고 상냥했던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구겨져 있었다.
마르코와 루루가 멈칫하여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지긋지긋하네.”
칼은 왕비의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은 그 뒤에 장승처럼 서서 어깨를 감쌀지 아니면 토닥일지 고민했다.
“왜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야 해?”
“누구? 브루스트 키치너?”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벼락이 내리친 듯, 단 하루 만에 초토화가 된 린드버그 왕성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리고 건물 안에서 줄지어 나오는 병사들의 시신을 보며 칼 린드버그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못 했어. 잠재된 마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 왕비도 못 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못 구했어. 겨우 내 한 몸 끌고 탈출했는데.”
참지 못한 아드리안이 칼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가 여느 때처럼 자기 자신을 탓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잘못 아니잖아. 자책하지 마. 헤네켄 제국에서 파르만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오늘 내일이면 인접 국가들에게 전문이 날아가겠지. 동의가 아니라 선포야.”
네 어머니의 복수는 제국이 대신하겠다고 덧붙이던 아드리안의 입을 칼이 한 손으로 막았다.
“당연히 내 잘못은 아니지. 왕비도 왕비 나름대로 자신의 죗값을 치렀을 뿐 복수할 필요는 없어.”
차가운 말투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마르코와 루루, 그리고 벨프리에게도 그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과연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아이를 둘이나 낳고 스무 해가량 키우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겠냐고. 아마 있었을걸? 그것을 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선택이고 죄야.”
칼 린드버그는 목구멍이 뜨거울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그분이 너를 가지고 싶어 해.〉
왕비의 음성이 자꾸 반복되어 귀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는 거야?
왜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거야.
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냐고.
그가 아드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걸어간 곳은 한 병사의 시신 앞이었다.
살점이 녹아내린 시신 위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 준 칼이 아드리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진짜 개자식들은 뭘 하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애먼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수습하는 게 이상하지 않냐?”
루루는 오빠의 나사가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앞의 유약한 왕자는 전생에 사촌 동생의 코뼈를 부수고 그 집 식탁을 뒤집어엎은 전적이 있었다.
“헤네켄의 도움은 감사히 받을 거야. 린드버그를 구하겠답시고 무모하게 널 불러냈던 그때처럼. 필요하다면 뭐든 달갑게 받을 거라고.”
칼 린드버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사나운 눈빛에 아드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나도 좀 끼워 주라.”
“뭐?”
“안 됩니다.”
아드리안과 벨프리가 동시에 외쳤다가 서로를 쳐다보곤 고개를 팩 돌렸다.
“칼 린드버그, 전쟁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네가 훈련에 돌입해도 후미에서 말을 달리는 것이 고작일 거야.”
아드리안이 칼에게 말했다.
칼이 진지했기 때문에 아드리안도 진지하게 답했다.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칼 린드버그의 마력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지혜롭건 간에 말이다. 일단 그의 위치가 차기 황후라는 점도 한몫했다.
몸을 쓰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아드리안 헤네켄조차 참전이 불허되었다.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우려와 애정이 듬뿍 담긴 아드리안의 눈빛을 마주 본 칼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런 건 나도 알아. 전쟁에 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그럼?”
어떻게 끼워 달라는 말인가.
아드리안의 질문에 칼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최후를 가감 없이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줘. 내가 직접 처단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제국법에 따라 그게 불가하다면. 모든 일을 나도 함께 보고받을 수 있게 해 줘.”
아드리안이 앗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벨프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 몰랐다.
그에게는 부상이나 사망을 포함한 전투의 규모가 따로 보고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칼은 내내 ‘아드리안과 레아가 싸우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은유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벨프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드리안, 네 옷에 피가 이렇게 묻어 있는데.”
씻고 환복할 시간 따위 없어 그대로 왕성으로 향한 아드리안의 제복이 얼룩덜룩했다.
레아 공주라고 뭐가 다를까. 그녀의 검도 피를 잔뜩 머금었을 것이다.
칼 린드버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미소는 웃음이 아니라 울지 못해 지은 표정일 뿐이었다.
“나 혼자 아무것도 모르는 거, 이제 싫어.”
옆에서는 느와르가 한창인데 그만 로맨스의 한복판에 던져져 있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칼의 손을 아드리안이 절박하게 붙들었다.
“따로 보고하지 않은 건 너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었어.”
칼을 지키려고 했던 일이 상처가 되어 돌아왔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드리안은 그가 자신의 손을 빼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양손에 힘을 주었다.
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드리안이 사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이것은 칼 린드버그의 문제였다. 그가 너무 약하고 둥글게만 보인 탓이었다.
“나도 알아, 내가 성격이 이 모양이라서 조심스러웠겠지. 솔직히 말해서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물러 터진 상태였을 거야.”
여전히 갈등은 싫었다. 감정싸움이나 전쟁이나. 살인 같은 것들이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눈앞에서 병사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이나 왕비의 미간을 밀고 들어간 식칼의 감각 따위가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저 대신 짊어지는 짐을 더 이상 외면하기 싫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칼 린드버그도 함께해야 했다.
“너나 폐하께 고맙게 생각해. 나 상처받을까 봐 미리 걱정해 주신 거.”
아드리안은 이 순간에도 칼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아드리안에겐 칼의 온기가 간절했다.
칼 린드버그의 손이 아드리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때 아드리안은 칼이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확신했다.
원래 상냥한 사람이라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실상은 눈과 귀를 의도적으로 가려 놓은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바보 취급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아드리안이 자기의 빈 손바닥을 쓸쓸히 바라볼 때 칼은 불쑥 아드리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 죽어도 싼 놈들이 꼭 있다고. 우리가 가는 길이 피를 보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라면. 함께하자.”
“칼.”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을 느끼며 아드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칼의 등을 끌어안았다.
느닷없는 애정 표현에 벨프리가 눈을 감았고 루루는 입을 가렸다. 당장이라도 주인에게 달려들려는 엘리자벳을 막느라 마르코는 눈을 뜨고 그 꼴을 다 보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아드리안. 그리고, 구해 줘서 고마워.”
주인공은 언제나 타이밍이 기가 막히지. 그것만큼은 여신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칼 린드버그는 탑 위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었다. 지킬 것이 많은 왕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연인이었다.
아드리안은 칼의 몸에서 아직도 자신의 향기가 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달콤한 공기 안에서 칼 린드버그가 이를 갈았다.
“브루스트 키치너든 파르만의 왕이든. 다 짜증 나는 자식들투성이야. 다 때려잡고. 네 동생 태어날 무렵에는 성대한 축하 파티를 하는 게 내 목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