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이 그런 말을 했다니, 아비의 불찰이구나.
“그가 생각보다 강하단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 부탁해 놓고 정작 저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도 해 주지 못했어요. 다행히 미움받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안이 침울한 표정을 지어서 글렌도 덩달아 이마를 짚었다.
마정석 연구라는 허울 좋은 숙제를 내어 주고 그를 왕성에 틀어박히게 한 것은 아드리안 헤네켄 대신 전쟁에 나가도 상관없다고 할 만큼 이타적인 왕자의 성정을 알아서였다.
파르만 왕국을 치기 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했던 건데, 정작 성내부터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은 간과한 글렌의 잘못이었다.
이미 황후에게 잔소리를 실컷 듣고 온 터라 글렌의 표정도 아드리안만큼 좋지 않았다.
- 그 아이의 신변에 문제가 되지 않을 선에서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다 들어주려무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글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동안 인명 피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말미에 글렌이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 이번 사건에 관하여는 조사단을 별도로 보낼 예정이니 그리 알고 있어.
조사 겸 방비를 할 예정이었다.
본관의 보수가 한창이라 본관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별관으로 대대적인 이사에 들어갔다.
이참에 탑은 아예 없애 버리고 지하 통로도 재수색하기로 했다. 달리 할 일이 많은 헤네켄의 사절이 마냥 보수에 착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헤네켄으로부터의 추가 사절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린드버그 왕도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났고, 파르만을 가만두지 않기로 결정 난 마당에 아드리안과 칼, 그리고 벨프리와 레아까지 전부 귀환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레아 린드버그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레아 린드버그는 성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가겠다고 전해 왔다.
- 레아 그 친구도 참 인물이야. 어차피 뜯어고쳐야 하는 나라라면서, 구태의연한 모든 것을 뿌리부터 뽑아야 하는 찰나에 성이 부서졌으니 새 공국에 어울리는 개막이 아니냐고.
“전서에도 그렇게 써 놓기는 했습니다.”
글렌이 후, 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 얼마나 더러운 꼴을 많이 봤는지 눈에 독기가 가득하더구나. 큰일이 있을 때마다 헤네켄으로 소환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홀로 설 수 있겠냐고 아주 완강했어.
그 완고한 표정이 칼 린드버그와 닮아 있다고 글렌은 말했다.
“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된 것이 많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죽어 나간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이마에 열이 나도록 뭔가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사람들 꽁무니에 붙어서 벽돌을 나르거나 깨끗한 물을 챙기는 사소한 일들 뿐 아니라 마도구를 직접 만들어 지하 저장고를 돌아다니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파르만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이 하나같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그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당초에 그 마정석에 무슨 커다란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을까 생각했지만 직접 써 보니 그냥 저급의 마정석이었다고.
파르만에서 생산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좋은 품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것으로 쓸모를 다했다고 했다.
덕분에 변경에는 일이 줄었다. 마정석을 분리하기 전에 전부 부숴 버리면 되었으니까.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황성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랍니다. 그때까지 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으니 염려 마시라 전해 드리라고도 했습니다.”
칼 린드버그는 뭐에 씐 사람 같았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 씌었으니 잠금장치가 풀린 거라고 봐야 하나.
아드리안이 볼을 붉히며 하는 말에 글렌이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 만만치 않은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네가 꽉 틀어 잡히게 생겼구나.
“가능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잡혀 있고 싶습니다.”
혹여 실수로 손을 놓쳐도 서로 잡고 잡히고, 그렇게.
- 그것참 달콤하지.
잡힌 채로 반평생을 보낸 글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 조사단의 선봉은 맥켈런 후작이 갈 거야.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아드리안이 턱에 손을 괬다.
“그분이 귀국하셨습니까?”
- 어제 에버라인 공국에서 출발했으니 오늘은 당도할 거야, 도착 즉시 다시 채비해 내보낼 예정이네. 피 냄새가 징그러울 정도로 날 거라고 하니 신나서 귀국하더군. 하여간 변함없는 작자야. 그녀가 레아 린드버그에게 나쁜 물을 들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실력이 좋아 어쩔 수 없이 써먹고 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라 유배 겸 밖으로 내돌린 지 몇 년이나 된 탕아가 돌아왔다.
글렌은 그녀의 걸걸한 웃음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테레자 황후 다음으로 그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멕켈런 후작을 아드리안은 제법 좋아했다.
“그분의 짝은 어쩌고 계신답니까.”
아마 이름이, 진저에일 후작 부인이던가.
어딜 가나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여기까지 데리고 오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말투의 아드리안에게 글렌이 손을 흔들었다.
-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되어서 말이지. 이번만큼은 헤네켄에 두기로 결정했어.
“그거 경사로군요. 여러 가지 의미로요.”
- 테레자가 고생 좀 했지 뭐야. 후작이 부인을 데려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테레자가 설득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후작이 테레자 말은 잘 듣잖냐.
“비교적 말이지요.”
- 임신 초반의 부인을 전장에 모시고 가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냔 말이야. 맥켈런, 그 기량이 아니었다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그분은 상식이 잘 안 통하는 분이잖습니까. 그분 옆에 서면 발베니 대공도 보통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니까요.”
아드리안은 작게 미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맥켈런 후작의 마법적 역량과 동물적 감각은 인간 이상의 것이었다.
그녀의 독특한 성정만큼이나 대단해서 그녀가 베타 여성과 결혼을 결정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라고 말했다.
매일 차고 다니는 검과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예상했을 때 그 예상을 뒤엎었다는 것이 웃지 못할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한시름 놓았습니다. 폐하. 맥켈런 후작이 와 주신다면 일이 금방 진척될 테지요.”
똑똑.
누군가 아드리안이 있는 임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드리안이 들어오라 명했다.
열린 문 앞에서는 마르코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그것이, 왕자님께서 언제쯤 오시냐 물으셔서.”
아드리안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동안에는 정무에 방해가 된다 어쩐다 하면서 먼저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마르코가 문을 닫고 나가자 글렌이 혀를 끌끌 찼다.
-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얼굴 좀 어떻게 해라. 바보같이 히죽거리지 말고.
그러는 제 아비의 얼굴도 비슷하게 풀려 있었다.
“태후께서도 늘 그렇게 툴툴거리셨죠.”
남 말하지 말라는 아드리안의 대꾸에 글렌은 빙그레 웃었다.
- 집안 내력인가 보지. 어서 가 봐.
아까부터 자신의 엉덩이도 들썩거린다고 덧붙인 글렌은 먼저 영상구를 종료시켰다.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 린드버그가 먼저 자신을 불렀다. 이 야심한 시각에.
몸이 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다 털어놓는다고?”
루루가 제 오빠의 비장한 얼굴을 보며 진짜냐고 몇 번을 물었다.
“응.”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자신의 정체와 루루의 존재에 대해 전부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이 비밀을 간직하고서는 아드리안과 칼의 사이가 누구보다 가까워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친놈 취급받으면 어쩌게?”
“그러진 않을 거야. 아마도.”
자신은 없었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설사 칼 린드버그가 진짜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아드리안이 그의 손을 놓을 리는 없다는 예감이 불안보다 앞섰다.
“미친놈이라고 그러면, 미쳤다고 대답해야지. 하지만 내 세상이 이런 걸 어찌하느냐고.”
루루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소설 속에 빙의한 주인공이 빙의 사실을 밝힌다?
보통 그 시기는 극 초반에 정체를 들켜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사건이 거의 해결된 다음이었다.
말하자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심정으로 사랑도 스토리도 결말에 다가가서 밝히고 나면 상대방도 어쩌겠냐는 거다.
그러나 둘은 각인도 아직 하지 않았고 약혼자 신분이었으니 아드리안 헤네켄이 칼 린드버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특히 루루는 아드리안이 칼에게 이별을 고하기라도 하면 그녀도 별수 없이 오빠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냥 각인 후에 밝히면 안 될까?”
루루의 조심스러운 제안에도 칼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늦을 것 같아. 나는 아드리안에게도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
“무슨 선택권?”
루루는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칼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믿고 믿지 않고의 선택권.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를 계속 사랑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말이야.”
“그런 게 꼭 필요해?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곳이 다른 세계에서는 허구의 세상이고 그 안의 캐릭터로 빙의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했다.
지금의 아드리안 헤네켄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더라도 믿는 척을 할지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 모래성 같은 믿음이 무너져서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칼을 말리고 싶었던 루루는 다시 물었다.
“정말 지금이어야 하느냐고.”
그러나 이상한 부분에서 대쪽 같은 그녀의 오빠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아드리안은 내게 뭐든 주려고 노력해. 내가 지금 이루어 놓은 것들 중에 어느 하나 아드리안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어.”
“설마, 그게 오빠의 마음에 빚으로 남은 거야?”
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실토하는 것은 반대야. 빚을 갚으려고 보답하듯 ‘내가 사실은 빙의자야.’라고 말해도 아드리안은 고마워하지 않을 텐데.”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나는 이제 확언할 수 있어. 내가 아드리안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에 소설 속 전개가 도움을 줬을지언정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 보답이 아니라 내 속에서 우러나와서. 앞으로도 네게 한 점 거짓 없이 온 마음으로 부딪힐 거라고. 그만큼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은 거야.”
루루는 말문이 막혔다.
“다 듣고 어떻게 판단할지는 아드리안에게 달렸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아드리안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감정적인 것까지 밀리고 싶지 않아. 그게 내가 아드리안에게 줄 수 있는 전부니까.”
결국.
“사랑 고백을 하시겠다는 거지? 빙의 사실을 밝힌다는 건 덤이고.”
칼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루는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오빠 선택이니까 마음대로 해.”
고맙다 말하며 돌아 나가는 칼의 뒷모습을 보며 루루는 생각했다.
여차하면 오빠랑 같이 떠나 살아도 되겠지 뭐.
미련은 좀 남을 테지만. 살아서 오빠를 다시 만난 것으로 이번 생은 다 이루었다 여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