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켜고, 꽃잎 깔고. 한껏 분위기를 잡은 칼 린드버그가 심호흡을 했다.
이런 게 왜 필요하냐고 마르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꽃잎을 씹어 먹는 엘리자벳을 말리는 걸 보면서 칼은 웃기만 했다.
칼 린드버그는 이 소설 속에서 새로 태어날 예정이었다. 살기 위해서 착한 칼 린드버그를 연기하는 전우영이 아니라. 전우영의 혼을 지닌 진짜 칼 린드버그로.
시작은 사랑하는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사실을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오메가로서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레아 린드버그의 오메가 속성 과외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으나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한 인물로서 설명하다 보니 군데군데 구멍이 많았다. 그 때문에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루루에게 요즘 어마어마한 것을 주입받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그녀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것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루루가 설명하는 오메가버스는 생각보다 더 무서운 세계관이었다.
칼이 눈을 흐릿하게 떴다.
작가의 창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 세계가 보이즈 러브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는 이미 메이저 급이라는 것에 한번 놀라고, 마킹이나 노팅 같은 무서운 장치를 지나서 각인에 이르렀을 때는 칼 린드버그의 의식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아드리안의 ‘그곳’을 보고 생리적인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 오버 리액션이 아니었다니.
솔직히 말해서.
몸은 제멋대로 촉촉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이대로 플라토닉하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칼 린드버그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휙휙 고개를 젓고 애꿎은 소파 손잡이를 뜯었다.
사실 거짓말이다. 기대와 공포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마음속에 이만큼 남아 있던 정체성이 제멋대로 기대를 외면하라고 종용한 탓이었다.
칼은 분명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드리안에게 끌리고 있다.
아드리안이 그것을 알아주면. 앞으로는 함께 극복할 테니 좀 더 수월할 것만 같았다.
마르코가 아드리안을 부르러 간 지 한 10분 정도 되었으니 별일 없다면 곧 올 테지.
병사들이 차곡차곡 움직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벌써 오나 보다. 하여간 칼의 일에는 양보가 없는 사내다.
칼 린드버그의 입술이 버석하게 말랐다.
아드리안이 믿어 준다면.
느와르도 로맨스도 앞으로 닥칠 여타 다른 장르도 다 잡아 버려야지.
* * *
마르코는 황태자의 걸음걸이를 따라잡기에는 자신의 다리가 아직 짧음을 개탄했다.
왕자님께 황태자 전하께서 곧 납신다고 미리 언질을 드려야 하는데 뒤에서 황태자가 나타나더니 그를 훌쩍 지나쳐 앞서 나갔다.
“발바닥에 바퀴가 달렸나.”
헉헉거리며 뒤쫓아 가도 자꾸 멀어지기만 하는 황태자를 보며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코를 누군가 잡았다.
“야. 어디 가?”
루루였다.
부쩍 친하게 구는 루루에게 마르코가 인상을 팍 썼다.
“왕자님 모시러 간다. 왜.”
“야, 오늘은 가지 마.”
그렇게 말한 루루가 멀어지는 황태자를 흘깃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쳤어? 시중은 누가 들라고?”
안 그래도 그 방이 지금 엉망인데. 왕자와 황태자의 볼일이 끝나면 위험한 촛불부터 치워야 했다.
“저녁 먹고 이 시간에 왕자가 황태자를 부를 일이 뭐가 있겠니. 눈치 못 챙겨?”
그제서야 마르코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오늘은 꼭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말씀만 나누신다고.”
루루가 쯧쯧 혀를 찼다.
“말 나누다가 몸 섞고 그러는 게 요즘 연애 방식이야.”
마르코의 얼굴이 이번엔 희게 질렸다.
“하지만 아직 발정기도 오지 않으셨는데.”
참나, 순수한 척하면서 발정이라는 단어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잘만 쓰네.
하기야 이곳에서는 상식적인 단어니 어쩔 수 없긴 했다.
루루가 작게 웃었다.
“발정이 와야지만 잠을 잔다고 누가 얘기하든? 밥 먹다가도 상 뒤집고 하는 게 신혼부부지.”
“혼인도 아직이신데……?”
“약혼했잖아. 한집에 살고.”
방이 수십 개가 넘는 건물에서 각자 다른 방에 머무는 것은 마르코가 생각하는 한집살이와 거리가 멀었으나 루루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귀랑 꼬리가 축 처진 마르코를 보며 루루는 이게 칼 린드버그 하렘 소설인가 생각했다.
주인 지키는 개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애가 목석같지?
오빠에게 딱 어울리는 시종이긴 한데, 이러다가 주인한테 애먼 마음 품을까 걱정이다.
칼 린드버그, 그 얼굴도 문제인데 오빠가 좀 강박적으로 주변인들을 아끼는 게 문제였다.
벨프리 헨드릭도 그렇고.
루루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연애하라고 고사를 지냈던 최애와 차애. 최애는 한때 싫어했던 악역과 사랑에 빠졌고 차애는 그 악역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악역이 사실 혈육이다, 라는 총체적 난관에 봉착했으니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벨프리가 칼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루루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어쩌면 벨프리 자신보다 먼저였을지도 몰랐다.
뒤늦게 오메가가 된 벨프리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루루의 머릿속에는 비상 깜빡이가 켜졌다.
황태자랑 로맨스의 로, 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그를 좋아하게 됐을 리가 없었다.
벨프리의 침실 근방에서 서성이던 루루는 우연히 마주친 제니스에게 벨프리가 아드리안 헤네켄의 이름을 부르진 않더냐 하고 물었고 제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일단 안심한 뒤 돌아서려던 그녀의 귀에 채 닫히지 않은 침실 문 사이로 ‘왕자님.’ 하고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니스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을 뿐이고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무언의 약속을 한 뒤 흐느적거리며 응접실을 나온 루루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칼 린드버그가 헤네켄의 황성으로 온 뒤 은근히 시선으로 그를 좇던 벨프리를 말이다.
‘처음엔 경계, 호기심, 또 경계, 입덕 부정. 인정인가.’
어쩐지 루루가 왕자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지나치게 화를 내던 벨프리가 떠올랐다.
마르코는 초조한 듯 손장난을 하며 왕자의 방 쪽을 쳐다봤다.
“발정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교합을 하면 무진장 아프다던데.”
하며 울먹거린다.
“그것도 시녀 누나들이 알려 준 거지?”
그 여자들은 애를 데리고 무슨 교육을 한 거야.
“진짜야. 어, 엄청 아프대.”
“원래 사랑은 고통스러운 법이야.”
더 이상 성심성의껏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루루는 대충 대답했다.
“나는 왕자님이 아프신 건 정말 싫은데.”
“황태자가 알아서 잘해 주실 거야. 걱정하지 마. 네 개는 어디 있어?”
루루는 마르코의 손목을 붙들었다.
“내 개?”
생뚱맞은 질문에 마르코가 붙들린 손목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되물었다.
“그래. 그 덩치 크고 사나운데 내 주인에게만 따듯한 개 말이야.”
저만 보면 짖으려고 준비하는 엘리자벳에게 앙금이 있는 루루가 말했다.
“걔는 내 개가 아니라, 왕자님의.”
“씁. 사소한 건 넘어가라고 했지?”
벨프리는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레아 린드버그는 아직도 린드버그의 각지를 돌아다니느라 밖에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각자의 일로 분주할 때. 루루는 마르코, 그리고 엘리자벳을 데리고 갈 곳이 있었다.
오빠는 오빠대로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고 여차하면 으쌰으쌰도 할거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파르만은 여전히 아귀 같은 입을 벌리고 있다.
이때가 아니면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아 루루도 서두르기로 했다.
“지금 정원에서 혼자 산책 중이야.”
루루는 마르코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그 개를 자꾸 혼자 풀어 둬?”
“엘리자벳은 체력이 보통이 아니야.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는 걸 좋아해. 나무 위나 암벽 위, 아니면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갔다가 멀리 오는 것 같은 거.”
루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히 밝았다.
왕비 괴물의 시체는 거의 온전한 형태로 아직도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풀이나 작은 벌레. 새 따위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죽었지만 독기가 더 이상 퍼지지는 않았다.
루루가 울렁이는 속을 달래며 마르코와 함께 엘리자벳을 찾아 나섰다.
망국이어도 한때 제국, 헤네켄에 비하면 작았지만 왕성은 왕성이었다.
본관 외에 별관이 세 채나 되고 중앙 정원 외에 분리되어 있는 정원이나 후원도 다수.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곳이나 왕실 전용 숲도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벳을 찾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갑자기 무슨 일을 하려고 그래?”
“지하에 가 보려고.”
루루의 말에 마르코가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거길 왜?”
“파르만이 이 성에 무슨 장치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 중이거든.”
“뭐라고? 지금, 그, 그러면 당장 성을 비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단시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 거야. 왕비가 이 성에 갇혀 있는 동안 헤네켄의 기사들도 함께 이 성에 있었어. 그 엄중한 감시를 뚫고 왕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방에서 요양만 하던 왕의 시신이 없어진 것도 신경 쓰여.”
괴물의 시신에서 독기가 빠지고 나면 그것을 해체하여 자세한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전문가들이 수십은 달라붙을 테니 왕비가 괴물이 된 기전에 대해 금방 알게 될 테지만 그 전에 파르만의 다른 간계가 등장하면 곤란했다.
“페로몬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것은 페로몬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마력도 함께 주무를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왕비도 왕도 키치너에게 뭔가 지속적으로 주입받았을 거고 그걸 매번 파르만에서 공수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그렇다면 지하 어딘가에 그것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정체불명의 그 약이 방사선 피폭처럼 일정 범위를 넘겼을 때 문제를 만든다면 칼 린드버그도 위험할 수 있었다.
마르코가 망부석처럼 굳었다.
루루가 아무리 잡아끌어도 서서 줄줄 눈물만 흘렸다.
“내 탓이야.”
제 손으로 극약을 가져다 바친 건 마르코였다.
왕비가 준다고 해도 중간에 버려 버릴 것을.
왕자님이 왕비처럼 괴물로 변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갚지.
루루는 마르코의 손을 세게 붙들었다.
“미안하면 움직여. 베타라서 그나마 안전한 너, 그리고 마찬가지로 베타인 나. 그리고 특별한 개 엘리자벳. 이렇게 셋이라면 안전하게 원인까지 접근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눈물을 닦아 낸 마르코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았어.”
“왕자님의 최측근끼리 잘해 보자.”
마르코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자 루루가 씩 웃었다. 제법 귀여운 미소였다.
“네가 언제부터 왕자님의 최측근었냐. 최측근은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마르코가 눈을 흘기며 하는 말을 듣자마자 그 미소에 금이 가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