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했네, 했어.”
루루가 헛웃음을 쳤다. 칼은 소매 아래로 잇자국이 남은 손목을 감추며 눈을 세모꼴로 떴다.
“시끄러워. 너 지금 혼나는 중이거든?”
루루는 팩 고개를 돌렸고 마르코는 왕자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없었다. 둘 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이 더없이 좋은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지하 저장고와 본관 사이의 지하 통로를 밤새 헤매다 병사들에게 발견되었고 지친 몸으로 꿀잠을 자던 칼 린드버그는 그 소식을 듣고 씻지도 못한 채 응접실로 뛰었다.
움직일 때마다 꼬리뼈며 척추가.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술 끄트머리가 다 터서 아팠다.
아드리안이 쩔뚝거리는 칼을 들어다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칼이 앞서 나가는 바람에 그의 한쪽 허리를 잡아 부축하는 것이 다였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끼잉.”
괜히 쫓아갔다가 덩달아 꾸중을 듣게 된 엘리자벳의 귀가 축 처졌다.
“이유가 있어서 들어갔다니까. 소득도 있었다고.”
“미리 어른들한테 말을 하고 움직이든가. 밤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칼이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사방팔방 병사들 천지인데 뭐 어때. 그리고 엘리자벳도 있었고.”
“엘리자벳이 네 경비견이냐? 그리고 괴물은 병사가 없어서 튀어나왔냐? 애가 왜 이렇게 무모해?”
루루는 처음부터 칼 린드버그에게 또박또박 반말을 했기 때문에 칼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뒤에서 듣고 있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무섭도록 차갑게 굳었다.
“건방지군. 어디서 하대를 하는 건지.”
아드리안이 루루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진정한 의미의 첫날밤을 보내고 여유롭게 아침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겁이 많은 마르코가 제 주군의 명이 없이 지하로 숨어 들어갈 리는 없고 마녀가 꼬드긴 것이 분명한데 어디서 적반하장인지.
칼 린드버그 옆에 선 아드리안이 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루루를 쏘아보았다.
“그 소득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내 사람을 걱정시킨 벌은 톡톡히 받아 낼 거다.”
“아드리안.”
칼은 아드리안을 불러 세웠다. 루루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으로 위아래가 없는 자군. 칼이 네게 잘해 주는 것을 내가 묵과한다고 해서 그것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텐데.”
루루는 칼에게 눈썹을 꿈틀거려 보였다.
‘내가 동생인 것도 말한다더니?’
‘아, 실수.’
“내 사람한테 그딴 눈빛 보내지 마.”
아드리안이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루루가 자신의 친동생임을 밝히는 것을 깜빡하다니. 시간이 지나면 밝히기 어려운데.
이렇게 되면 루루와 칼 린드버그, 그리고 레아 린드버그는 삼 남매가 되는 것이다. 아드리안은 어찌 받아들일지.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거렸다.
“저어, 일단 이것을.”
아드리안이 마녀의 방만한 자태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칼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마르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 딴에는 대단한 용기를 낸 거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하 저장고에 자라 있던 풀입니다. 독특한 향이 있고 마력이 감지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지만 돌 틈에 무더기로 자라 있었습니다.”
아드리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독특하다기엔 너무 역한 냄새가 났다.
칼 린드버그의 예민한 코에도 그것은 감지되었다.
“아드리안, 이거.”
잠시 풀에 집중하던 아드리안도 미간을 찡그리며 풀을 내려 두었다.
왕비 괴물의 몸에서 나던 악취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지하 저장고에서는 특별한 냄새를 맡지 못했는데.”
칼 린드버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부추와 쪽파 사이, 많이 봐줘도 난초 이파리 같은 풀에서 스멀스멀 풍기는 더러운 기운에 아드리안과 칼이 동시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거 이거! 린드버그 왕성에선 별것을 다 키우고 계셨군요!”
아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 * *
“인사가 늦었습니다. 테일러 맥켈런 후작. 영광스러운 헤네켄 제국의 후작이며 외무대신직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린드버그에 추가 파견되는 사절의 선봉으로 왔습니다.”
칼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손이 잡혔고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에 아드리안은 화도 못 내고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요.”
설명을 요구하는 칼의 눈빛에 난감한 아드리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내일에나 도착할 줄 알았습니다만.” 하고 덧붙였다.
“헤네켄에다 부인을 둔 뒤 바로 다시 출발했습니다. 아아, 어찌나 궁금한 게 많던지. 사건·사고는 늘 소신을 흥분시키니까요.”
키가 훤칠한 데다 칼로 잘라 낸 듯한 파란 머리가 인상적인 맥켈런 후작은 칼 린드버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의 시선에서 칼을 가렸다.
그 날 선 태도에 후작은 쩌렁쩌렁 응접실이 울릴 정도로 웃었고 칼은 아드리안의 뒤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풀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오오? 인사도 하기 전에 본론부터 꺼내는 것입니까?”
“아, 죄송합니다. 린드버그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또.”
칼 린드버그가 횡설수설해서 후작이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뭐. 본론이 중요하지 인사치레가 중요하답니까?”
칼 린드버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분들은 왜 여기서 벌을 받고 계신 건지?”
그녀가 무릎을 꿇고 줄지어 앉은 루루와 마르코, 그리고 엘리자벳을 보며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눈치 빠른 제니스가 그녀의 앞에 찻잔을 놓았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손님맞이에 칼과 아드리안도 뒤늦게 자리에 앉았고 후작은 제니스의 손을 잡으며 “여기에도 천사가!”라고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루루가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툴툴 털었다.
그녀의 기억에도 있는 인물이었다.
여성 우성 알파에, 마법적 기량이나 육체적 기량이 발베니 헤네켄 대공 다음이고 손속을 두지 않는 잔인한 본성을 장난꾸러기 같은 태도로 숨기고 있다는, 그런데 그녀가 뭘 했더라.
눈만 끔뻑거리던 루루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작을 알면 뭐 하냐, 이거고 저거고 다 빗나가 때려 맞히는 것도 일이었다.
맥켈런 후작은 다리를 휙 꼬고 앉아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 장소에 웃고 있는 사람이 저 혼자뿐이라는 건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린드버그가 대대로 미인이 많다더니 정말이군요. 왕자님의 미모를 보건대 새 공왕의 미모도 뛰어나겠습니다.”
“저는 미모 칭찬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칼 린드버그가 덤덤히 말했다.
토머스 영지에서의 일도 그렇고, 왕비의 저주도 그렇고, 이 얼굴은 자꾸 사건·사고를 불러왔다. 그래서 한껏 노이로제에 시달린 칼은 얼굴만큼은 조금 평범해도 되지 않았나 했다.
‘저 얼굴이 얼마나 축복받은 건데.’
루루가 칼 린드버그의 반응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용서하십시오.”
후작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특별히 사과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칼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왕자님께서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칭찬을 하겠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칼 린드버그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중하십시오. 후작. 그대 눈앞에 있는 사람은 차기 헤네켄의 황후입니다.”
아드리안의 말에 후작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이로는 한참 아래였지만 아드리안의 기백은 여전히 남달랐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신이 나서 그랬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신은 조용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거든요.”
“그렇다면 후작님. 그 신나는 마음으로 이것을 봐 주십시오. 이 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칼 린드버그는 말을 걸면 걸수록 기가 쭉쭉 빨리는 기분에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 풀은 ‘텐지라’라는 풀입니다. 마력 정화나 원기 보존으로 사용하는 풀입니다.”
“예?”
루루가 ‘앗’ 소리를 내었다.
“독초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드리안이 물었다. 맥켈런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극소량을 썼을 때는 영약입니다. 키우는 것도 까다롭고 채취하는 것도 까다롭지요.”
“키우는 것이 까다롭다고요? 하지만 아무렇게나 자라 있던걸요.”
루루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오, 요정 같은 꼬마 숙녀군요. 그대가 이것을 발견했습니까?”
이 아줌마, 보니까 플러팅이 기본 스탯이구나.
루루는 칼 린드버그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아드리안이 눈을 부라렸지만 칼이 저의 손을 붙들었기 때문에 또 참았다.
“숙녀는 맞고 꼬마는 아닙니다. 제가 발견했을 때는 아무렇게나 솟아 있었어요. 그냥 지나치면 잡초나 돌이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요.”
마르코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견은 어떻게 했습니까.”
루루는 엘리자벳을 가리켜 보였다.
“지하 저장고에 공기가 통하는 부분이 따로 있었습니다. 거길 들여다보니 너저분한 물건들 사이로 한 사람 정도 들어갈 틈이 있더군요. 그냥 지나칠까 했는데 엘리자벳이 그곳을 향해 이를 드러냈습니다.”
그냥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고 마르코가 덧붙였다.
“알 만합니다.”
후작이 풀을 흔들어 보이자 엘리자벳이 풀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잔소리를 퍼붓는 칼에게 기가 죽어 아까는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후작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풀을 감싼 뒤 단단히 묶었다.
“텐지라가 주로 자라는 곳은 마정석이 생산되는 광산 주변입니다. 베어 내기 전까지는 그냥 풀에 불과하지만 마력이 있는 자가 섭취하거나 연기를 과다 복용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정수를 가진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텐지라를 꺼리지요.”
“마수요?”
후작은 왕자의 개를 유심히 보았다.
“평범한 개가 아닙니다. 왕자님은 마수를 길들였군요.”
“엘리자벳이 마수라는 말씀입니까?”
칼 린드버그와 마르코가 펄쩍 뛰었다.
덩치가 유별날 뿐 늘 온순하고 사람을 해쳐 본 적 없는 녀석이었다.
후작이 턱에 손등을 받쳤다.
“황태자 전하께옵서는 미리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외모가 독특하여 의심한 적은 있지만 주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근하게 굴었던 터라 그 뒤부터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아드리안 전하. 마법과 이 세상은 긴밀히 엮여 있지만 마법이 반드시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지는 않습니다.”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은 후작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마수를 길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마법이 없이도요.”
후작은 설명했다.
“마수는 애초에 여신의 품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이유 없는 증오를 품어 제어하기 힘들다고들 알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칼 린드버그는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말이 과거에 즐겨 보던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가 자연스레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