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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08)화 (108/150)

“운이 좋았습니다. 린드버그 내부에 있던 텐지라의 씨앗이 어떤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후작은 제법 큰 마도구를 내려놓았다.

해바라기처럼 중앙에 커다란 마정석을 박아 두고 주변을 빙 두른 마정석은 보기에도 퍽 예뻐 보였다.

칼은 맥켈런 후작의 마도구에 사용되는 마정석이 파르만의 마정석처럼 그 자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묶어서 사용한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효율성을 따지자면 마정석 하나에 온전한 수식 하나가 좋지만, 한 종류의 마정석을 같은 금속 위에 엮어 놓는 것도 제법 효과가 좋구나.’

루루는 마정석에 대해서는 잠시 내려놓으라고 했고 후작도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말했지만. 제법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글이라 눈에 쏙쏙 들어왔다.

삼키다, 분석하다, 궤적.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큼직하게 써 놓다니.

주인의 성정이 드러나는 간단명료한 수식이다.

“이렇게 텐지라 한 줌을 놓고, 아 가급적이면 맨손으로는 만지지 마십시오.”

그래 놓고선 후작은 덥석 맨손으로 중앙에 뿌렸다.

마정석은 마치 생물처럼 꾸물거리며 풀을 삼켰다.

잠시 후 꽃잎처럼 빛나는 빛이 말 그대로 궤적을 그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파르만, 참 대단해.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굴을 파 두었다니.”

“수백, 아니 수천은 죽었을 겁니다.”

코와 입을 가린 뒤 지하 저장고로 내려온 벨프리가 말했다.

“식시귀들이 신이 났던 이유도 알겠군요. 시신이 이렇게 많으니 수백, 수천 마일을 이동하면서도 굶지 않았을 겁니다.”

아드리안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갱도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파르만에 당도하겠습니다만. 구태여 그런 무모한 계획을 실행시킬 필요는 없겠습니다.”

맥켈런 후작이 말했다.

아드리안도 칼도 그것은 썩 괜찮은 계획으로 보이지 않았다.

“헤네켄 제국의 파르만을 향한 선전포고가 아직입니다. 갱도가 설마하니 왕성 한 군데만 있지 않겠지요. 제국의 기사들이 파르만에 쳐들어가기에 앞서 갱도의 존재를 알리고 전부 봉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맥켈런은 그녀의 주 무기인 대검을 휘둘러 보였다.

그녀는 몸이 달아 있었다.

피에 유난히 민감한 후각이 열심히 반응하길래 여기서 뭐가 튀어나올지 기대했건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였다.

“폐쇄는 무엇으로 합니까?”

“당연히 마법진입니다. 물리적으로 갱도를 봉쇄하기 전에 진을 놓고 그다음엔 뭐, 바위를 쌓든가 해야지요. 재료는 많습니다. 성의 본관이 부서졌으니 그걸 이용합시다.”

사람들도 많은데 연신 검을 휘둘러 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후작의 행동에 따라 들어온 사용인들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결국 한마디 한 것은 벨프리였다.

“후작님. 조금 자중해 주시지요. 저장고 위쪽 지반이 무너질까 우려됩니다.”

“아, 미안합니다. 몸이 간지러워서 영.”

맥켈런 후작이 눈을 찡긋해 보이자 벨프리는 기분이 팍 상했다.

맥켈런 후작이 각인 전까지 유난스레 난잡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베타 같은 오메가.

베타가 아니라 베타 같은 오메가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만큼도 관심은 없었지만 후작이 싱글이었다면 베타에서 오메가가 된 벨프리도 그녀에게 한 입 거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짜증 나.’

오메가가 된 뒤로는 별게 다 거슬렸다.

아드리안과 칼이 전보다 더 달라붙어 있는 것도 짜증스러웠고 이렇게 왕성이 엉망인데 밖에서 뱅뱅 돌면서 돌아오지 않는 레아 린드버그에게도 짜증이 났다.

물론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말이다.

적어도 레아 린드버그가 있었다면 벨프리가 때마다 아드리안과 칼 사이에서 그들의 애정 행각을 지켜보는 시간은 줄어들었을 테니까.

‘없었으면 할 때는 계속 추근거리더니, 필요할 때는 왜 없는 거야. 알파들이란.’

왕자가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니는 마녀도 거슬렸다.

도대체 저렇게 건방진 언사를 왜 모르는 척하는지 모르겠다.

벨프리는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해 보았다.

칼 린드버그가 그의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안 그래도 왕자님이 수식에는 밝으시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봉인석은 왕자님께 맡기면 될 것 같군요.”

“봉인석에 꼭 들어가야 하는 장치가 있을까요? 이를테면 마수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어떤 것을요.”

왕자의 질문에 맥켈런은 껄껄 웃어 보였다.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벨프리가 귀를 막았다.

좁고 깊은 동굴에서 웃음이 메아리쳐서 돌아왔다.

“최상급의 마정석, 상급 마법사의 인장. 그 안에서는 어떤 수식을 써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다만 범위를 좁힐 필요는 있겠습니다. 구현 범위가 넓으면 엉뚱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칼은 당장 돌아가면 단어를 조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상급의 마정석은 어떤 것이 좋을까. 모추산맥의 마정석이 세계관 내 가장 좋은 마정석이라지만 채굴 작업이 더뎌지고 있어 당장 왕성까지 조달하기는 어려워 보이던데.

상급 마법사야 아드리안 헤네켄이 있으니 괜찮았다.

이미 경험은 한번 해 보았다.

왕비 괴물에게서 도망칠 때였다. 어떤 물건이 마도구로 쓰일지 몰라 날붙이에 홈을 파 놓는 헤네켄 제국의 선견지명에 놀랄 따름이었다. 다만 그 홈에 맞는 마정석이 파르만의 마수에게서 채취한 ‘주인’ 뿐이었고. 그 마정석은 식칼을 매개로 왕비의 행동을 제한했다.

‘두 겹의 담요’, ‘타오르는 장작’처럼 시전자 없이도 바닥을 매개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수가 시전자가 있을 때만 침입한다는 보장은 없으니.

생각에 잠긴 칼 린드버그를 지켜보던 맥켈런은 그가 어쩌면 고대 마법의 비밀도 풀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글렌 황제는 마법의 종말을 예견했지만 맥켈런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마법이 사라진 세상은 어둡고 막막하기만 했다.

앞으로 황제가 될 극우성 알파이자 상급 마법사에게 누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려 준 극우성 오메가이자 수식에 해박한 마법사.

여신께서 순수 마법의 부활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번 일로 칼 린드버그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그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직접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궁금했다.

만약 그가 맥켈런의 바람대로 움직여 준다면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순수마법을 부활시켜 달라 애원할 것이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과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의논하는 뒷모습에 맥켈런 후작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황태자 전하, 지금 올라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종 하나가 입구에서 외쳤다.

“레바 왕국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긴급합니다.”

레바 왕국이라면, 일전에 약혼식에 귀빈으로 왔던 친제국파 왕국 아닌가?

거기서 린드버그로 급보를 보낼 일이 뭐가 있지.

벨프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맥켈란 후작은 볼일 다 보았으니 나가자고 일행을 채근했다.

* * *

전서의 내용은 그러했다.

레바 왕국이 불타고 있다. 정체불명의 마수들이 곳곳에서 날뛰고 있다. 파르만과의 전쟁에 합류할 것이다. 왕국의 공주 아일라 레바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듬성듬성 자세한 내용이 빠진 전서에서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드람뷔 자작은 전서의 내용을 보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교묘하군요. 파르만이 대놓고 날뛸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쪽도 이제 준비가 되었나 봐.”

맥켈런 후작은 느긋하게 분석했다.

“어째서 헤네켄이 아니라 린드버그로 오는 걸까요? 신변 보호라면 헤네켄이 더 확실한데.”

“글쎄요. 이것을 거절하기도 애매한 노릇이니. 공주가 도착하면 물어봐야지요.”

벨프리와 다른 사람이 레바 왕국의 꿍꿍이를 의심한다.

무엇보다 미혼의, 약혼자가 있지만 여전히 미혼의 알파가 둘이나 있는 곳이다.

이때다 싶어 연을 맺으려는 건가.

하지만 헤네켄의 자작 이상의 계급 귀족들 중에도 열성 알파 자제들은 많이 있는데.

모두가 파르만의 의도에 집중한다. 일부는 어떻게 그렇게 깊고 먼 갱도를 팠는지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파르만의 거침없는 행보에 분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급진적인 전쟁을 요구한다.

이 와중에 황성과 연락을 하고 온 아드리안이 레바 왕국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비슷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왁다글거리는 사람들 가운데에 혼자 고요한 칼 린드버그는 눈을 깜빡였다.

글렌 황제는 이미 전쟁을 하겠다 선언했다.

다른 왕국에도 파르만이 손을 뻗었으니 이제 대륙전체가 긴장하고 있다.

미바리숲은 약간 황폐해졌다.

사람도 자원도 부족한 파르만을 헤네켄이 침략할 경우 파르만은 무조건 진다.

그걸 파르만의 왕이 모를까?

칼 린드버그가 손을 움직였다.

깃펜이 서걱거리며 생각의 가지를 쳤다.

오메가버스, 일단 지워 버리고.

마정석과 마법 수식에 세모를 그리고. 파르만의 의도에 별을 표시했다가 잠시 고민한 뒤 다시 세모로 바꾸었다.

파르만의 목적은 단순할 것이다. 좁고 어두운 그곳이 싫었겠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헤네켄 제국이 번성하고 세대를 교체하는 동안 파르만도 세대가 교체됐을 테니. 이제는 답답할 때도 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양지를 바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미바리숲에서 식시귀가 먼저 등장한 이유는?

지도를 펼치고 쭉 살피던 칼은 파르만에서 직선거리로 레바 왕국과 헤네켄 제국, 그리고 린드버그의 왕도와 미바리숲을 연결해 보았다.

개미굴. 무른 지반. 마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약초. 독특한 토양. 물.

사건이 일어나는 다른 나라도 연결한다.

그다음은 도시와 도시다.

가끔 펜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신중히 선을 잇던 칼 린드버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벨프리.”

“예?”

“미바리숲의 마수 규모가 어찌 됩니까?”

“전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어림잡아 짐작해 보면 그것들이 인간을 해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린드버그 왕국을 먹어 치우는 것은 일도 아닐 정도로 많습니다.”

“파르만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것보다 많은 식시귀를 생산하기는 힘들겠지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칼 린드버그가 눈을 깜빡깜빡하고는 말했다.

“파르만이 이렇게 긴 갱도를 팔 때 과연 사람들이 작업을 마치고 다시 돌아 나갈 수 있었을까요?”

순간 벨프리가 숨을 죽였다.

“파르만에서 미바리숲을 먼저 공략한 건 식시귀를 생산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쩌면, 숲에 서식하고 있는 마수들을 뒤흔들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혹은 끌어들이거나.

사람들이 하나둘씩 칼 린드버그의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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