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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09)화 (109/150)

칼의 손가락을 쭉 따라 시선을 옮기던 사람들은 무언가를 조금씩 알아차렸다.

“파르만을 중심으로 각 국가를 연결하였습니다. 일정한 직선거리를 가졌고 전부 번성한 도시의 지하를 지나갑니다.”

린드버그와 레바 같은 내륙에 위치한 왕국의 왕도와 여타 다른 나라들의 주요 도시도 그렇고.

모추산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을 것, 큰 호수나 강을 피할 것.

“지하수.”

벨프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 다른 지도를 겹쳐 올렸다.

“지하 수로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수로를 포함하면 파르만과의 거리는 더욱 짧아진다.

“한두 해가 아니고 수십 해가 걸렸을 거예요. 그동안 사람들이 파르만 왕국을 왔다 갔다 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수로를 통과했다면 적어도 파르만 왕국의 사람들이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는 건데, 거기 국왕이 눈뜨고 그것을 묵과했을까요?”

칼 린드버그는 파르만에서 나온 마정석들을 늘어뜨려 보았다.

“마수를 제어할 때 사용한 마정석들입니다. 질은 나쁘지만 그럭저럭 발동해요. 이걸로 식시귀도 만드는데 인간이라고 제어하지 않았을까요?”

허어……!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튀어나왔다.

“공기 때문에라도 그리 깊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수로에 당도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면서 어째서 각국에서는 몰랐습니까? 이 지하 수로들은 지도에 표시될 만큼 영향력 있는 물길입니다.”

누군가의 의문에 칼 린드버그가 이마를 짚었다.

아드리안은 도시를 유심히 살피고 대신 대답해도 될지를 물었고 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 곳이라면 그렇겠습니다만 아쉽게도 린드버그 왕국을 포함하여 이곳들은 쇠퇴 중입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인력이 줄어들고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지하 수로가 오염이 되든 거기에 누가 살든,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황성에서도 이미 확신하는 부분입니다.”

아드리안의 설명 뒤엔 드람뷔 자작도 한몫 거들었다.

“마수의 이동을 감지할 만큼 예민한 헤네켄의 정보망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갱도를 파던 사람들이 마력이 거의 없는 베타에 불과하기 때문이었고 마정석도 싸구려라 그런 것 같소.”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왕자가 손을 들어 그가 알아낸 공교로운 사실 하나를 짚어 내기 전까지 소란이 지속되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들어 주십시오.”

칼 린드버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좌중이 긴장하며 맥켈런 후작까지 숨을 죽였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파르만이 이 땅을 매개로 거대한 수식을 썼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라고요?”

벨프리가 새된 소리를 냈다.

“마석이 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그렇습니다. 광물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을 살펴보면 특별한 토양, 물, 그리고 마수의 시신입니다. 지금 문제가 일어나는 지역들은 모추산맥에 국경을 대고 있습니다.”

“산맥은 토양이 층을 쌓아 이루어진 것, 순도 높은 마석을 생산할 만큼 거대한 토양의 집합이 주변 지층에도 퍼져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군요.”

벨프리가 중얼거렸다.

거기에다 산맥을 타고 흐르는 물과, 넘쳐나는 시신까지.

압력이 부족하여 광물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 뿐이지 충분히 마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누군가 그 땅에 마력을 주입할 수 있다면.

“실제로 헤네켄과 린드버그를 연결하는 고대 마법진도 바위에 새겨져 있잖아요.”

칼이 벨프리에게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처음에는 바위 자체가 커다란 마정석이 아닌가 했다. 그다음에는 바위에 새겨진 수식이 애들 장난 같은 긴 문장이라는 것에 착안했고. 고대 마법 수식이라는 게 다 그 모양인 것이 이상했다.

‘어디로든 가는 문, 진짜 최종.’ 따위의 농담 따먹기 같은 문장.

그것은 함정이었다.

사람들을 교란하고 수식이 전부 한글일 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여신의, 아니, 아마도 작가의 장난.

그래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식이 언어라는 말씀을 일전에 드렸습니다만.”

칼 린드버그가 손을 벌벌 떨었다.

‘어디로든 가는 문’과 ‘진짜 최종’,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대 한국인뿐이다. 혹은 출처 모를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역사적으로 유구한 나라의 사람이거나.

아드리안이 급히 다가와 칼의 손을 붙들었다.

“언어는 하나가 아닙니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손을 힘주어 잡고 제 입술을 핥으며 긴장을 완화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의 뜻을 인지하고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모두의 머리가 깨어났다.

도감이 중요한 이유는 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 수식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아야 시전이 가능했다. 마법사는 도감을 외운다, 수식에 담긴 의미를 외운다.

“이 지도를 보면 하나의 글자가 나타납니다.”

파르만을 중심으로 어지러이 표시되는 글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림일 뿐인 한자 ‘다스릴 리(理)’였다.

“이것은, ‘다스리다’라는 뜻의 글자입니다. 기존 수식과는 다른 언어이나 이것도 엄연히 의미가 있는 글자입니다. 파르만의 왕이 이 글자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수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드람뷔 자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땅을 마정석 대신 사용하고 갱도로 수식을 그렸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발동시킬 만한 커다란 마력뿐이겠군요.”

“그래서 미바리숲의 마수와 텐지라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 획의, 아. 이런 글자의 선을 획이라 부르는데, 그 획을 유지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커다란 마력이요.”

마법사가 있는 나라, 마수와 싸우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하는 나라. 그리고 증폭 가능한 매개체.

“왕비가 마수가 된 것은 마력이 충분히 모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아드리안의 말에 모두 침묵했다.

드람뷔 자작은 급히 임시 집무실로 달려갔다.

레바 왕국의 공주고 뭐고. 파르만이 이대로 진을 발동시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잠시의 침묵 뒤 칼 린드버그가 말했다.

“획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마력이 있든 없든, 수식이 파괴되면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요.”

“검을 안 쓸 수가 없는 상황이군.”

맥켈란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획 안에 시신이 남거나 다른 마도구가 발동되는 것도 막아야 해요.”

드람뷔 자작과 함께 마정석을 연구하는 수석연구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먼지가 모여 봐야 먼지의 산이겠지만 그것도 일종의 마력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지상으로 꺼내야 하는 거야?”

그런 섬세한 작업은 귀찮다고 맥켈란 후작이 툴툴거렸다.

임시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의논을 시작했다.

잠시 지도를 내려다보던 칼 린드버그는 각 획의 연결부분에 거침없이 빨간 동그라미를 쳤다.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 구역들만 지상에서 제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에서 거기까지 파고들어 가는 인력과 시간 소모를 생각하니 벌써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 지하 수로를 파괴해 버리자니 괜한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그 후의 문제를 염려해야만 했다.

절절 끓기 시작하는 칼 린드버그의 이마를 연신 쓰다듬던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점 하나만 찍어도 의미가 변한다고, 언어는 그런 거라고 네가 전에 말했잖아.”

* * *

깊은 밤. 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주니퍼 헨드릭이 이끄는 기사단을 선두로 대규모의 군대가 파르만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친제국파인 왕국들이 동맹군을 자처한 뒤로는 글렌의 제안에 각 나라로 지원을 보냈다고 했다.

심사숙고 끝에 레아 린드버그는 전쟁 대신 내정에 힘쓰기로 결정해서 아직도 린드버그 내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느라 복귀하지 못했다.

심란하기 그지없는 나날들이라 칼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그 옆에서 아드리안이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많이 피곤하겠지. 칼 린드버그는 책상 앞에서 머리를 쓰지만 아드리안은 다양한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흐트러진 머리, 깨끗한 이마. 또렷한 윤곽.

그리고 입술.

칼은 조심스레 아드리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결에도 혀가 마중 나온다.

살짝 입술만 댔다가 떼려고 했는데 엉겁결에 진하게 키스를 하게 된 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익었다.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

“으응.”

뒤척이며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귀를 가까이해 들어 보니. “더 자. 푹 자. 괜찮아.” 한다.

자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피곤한 모양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일어나서 온몸에 침칠을 할 텐데.

“참나.”

팔을 들어 칼의 허리를 끌어안고 달콤한 숨을 내쉰 아드리안은 습관처럼 이불을 끌어 올려 칼의 몸을 여미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만해도 괴물 같은 체력이다.

엊그제 맥켈란 후작과 함께 변경으로 향했던 아드리안은 꼬박 하루를 그곳에서 보낸 뒤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시 왕성으로 복귀했다.

헤네켄에서 공수한 마정석에는 칼 린드버그가 손수 수식을 새겼다.

발베니 상단에선 사업을 멈추고 보유하고 있던 마정석 전부를 내어놓았다.

밀도 높은 지르콘에 고품질의 마정석을 박아 넣은 마도구가 미바리숲 근교에 수백 개의 진을 쳤다.

이왕이면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문장을 써 보라는 후작에게 칼은 펄쩍 뛰며 안 될 말이라 했다.

〈마정석에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흑마법에 가깝기 때문에 지양하고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 저쪽에서 막 나가면 이쪽에서도 막 나가 줘야 합니다.〉

이런 것까지 써도 되느냐고 칼 린드버그가 물을 때마다 뒤에서 신나게 부채질을 했다.

후작이 부추겨도 칼은 강경했지만 말이다.

‘넘을 수 없는 벽’

‘닿을 수 없는 장소’

두 가지를 겨우 써 놓고 이게 정말 될지 궁금해하는 칼에게 후작은 웃어 보였다.

모자란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교만이지만 차고 넘치는 사람이 그것을 과시하는 것은 절대로 교만이 아니라고 후작이 강조했다.

명백히 칼 린드버그에게 따로 기대하는 바가 있어 보였으나 칼은 묻지 않았다.

잠든 아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칼은 그동안 그를 지나친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린드버그의 사람들을 지나 든든한 황제와 황후. 그리고 헤네켄 제국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칼 린드버그가 소설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현실에서 스러져 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한때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전재영이 죽고 그 절망을 실감하기도 전에 다시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행운을 곱씹었다.

달게 자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살다 보니 같은 것 달린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게 된 운명을 되새겼다.

무엇 하나도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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