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안 와?”
아드리안이 눈을 뜨고 물었다.
“미안, 내가 깨웠지?”
선명한 초록빛의 눈동자가 언제 자기가 잤었냐는 듯 또렷했다.
칼이 미안해하며 손을 거두자 아드리안은 그 손을 움켜잡고 다시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고는 그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아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행복한 꿈을 꿨어.”
“이 와중에 좋은 꿈을 꾸다니. 너도 신경이 쇠심줄이네.”
칼이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스레 황태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드리안이 머리카락을 흔들어 칼의 맨몸에 자신의 체취를 묻히려는 듯 비비적거렸다.
간지러움에 칼 린드버그가 몸을 물리자 아드리안은 다시 잡아당겨 이번에는 가슴팍을 간질였다.
잠시 몸싸움을 하듯 장난을 치다가 칼을 품에 넣고 이불로 푹 감싸는 데 성공한 아드리안이 말했다.
“고통은 잠시, 사랑은 영원. 그런 말 알아?”
“말 그대로 아니야?”
휴게소 화장실 위에 붙어 있는 착한 마음 시리즈에서나 볼 법한 말이다.
“니키타 여신의 신전에서 사제들이 자주 쓰는 말이야.”
아드리안은 칼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기껏 찌워 놓은 살이 자꾸 빠지기만 했다. 칼 린드버그가 제 시종더러 살 빠진다고 뭐라고 하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은 고통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면 쉽게 생의 끈을 놓아 버리잖아. 그런데 그게 끝이 있고 그 후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 생각하면 또 끈질기게 살아남지. 그래서 여신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려고 대충 만든 말이라고 생각했었어.”
칼은 아드리안이 제 뺨을 만지게 놔두는 대신 아드리안의 팔뚝을 조몰락거렸다.
두껍고 힘줄이 돋은 이 손이 얼마나 단단히 자신을 틀어쥐는지 이미 아는 터라 입가에 침이 먼저 고인다.
티 안 나게 입꼬리를 닦은 칼이 괜히 딴생각을 했다.
헤네켄으로 돌아가면 멈췄던 운동부터 시작해야지.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니까 뭘 해도 힘들어.
“그런데.”
아드리안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칼이 되물었다. 아드리안은 칼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요즘은 그 말이 섭리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아.”
아드리안은 칼의 이마에 자신의 콧등을 문질렀다.
뜻 모를 소리에 칼이 눈만 깜빡였다.
‘귀엽다.’
귀엽다고 말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칼을 알아서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입을 헤벌리고 속눈썹을 바르르 떠는 것이 진짜. 아드리안은 이를 세워 눈두덩이를 깨물까 하다가 멈췄다.
“내가 그동안 알파로서 지켜야 하는 많은 구속들이 너를 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 생각하니 그래. 참 감당할 만한 고통이었다고.”
아드리안이 웃었고 칼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왜 이제 와서 벨프리의 다리를 부러뜨린 원작의 아드리안이 생각나는 건지.
“그 구속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글쎄.”
아드리안은 칼의 어깨를 잡아 내리눌렀다. 입은 게 없어 손바닥에 닿는 맨살의 감촉이 실크 같았다.
“한 침대에 누울 때마다 내키는 대로 한다고 가정하면.”
실컷 빨린 피부가 울긋불긋했다. 입술이 지나간 자리가 적나라하게 부풀어 오르고 아직도 성을 내고 있었다.
자국을 더듬던 아드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온전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은데.”
“참아 줘. 제발.”
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드리안의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깨웠어.”
이를 세워 파들파들 떨리는 손목 안쪽을 긁어서 기어이 상처를 낸 아드리안이 세상 천진한 미소로 헐떡거리는 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야. 고통은 잠시, 사랑은 영원. 이 말이 요즘 내 소신이고.”
“헉!”
가슴이 따끔했다. 칼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고통은 잠깐이고 쾌락도 영원하다고. 네게도 내가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어.”
고통이 잠깐. 쾌락이 뭐?
“개소리.”
칼의 허리를 들어 올린 아드리안은 그의 찌푸린 미간에다가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나는 네가 이럴 때 머리가 도는 것 같아.”
“이상한 취향, 아!”
낮은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 때 칼의 머리도 금방 돌았다.
걱정도, 염려도, 고민도 순식간에 증발했다.
잘생기고 귀여운데, 약간 미친 이 남자는 칼 린드버그를 폭풍처럼 집어삼켰다.
고백과 진정한 첫날밤 이후.
아드리안은 짐을 다 싸 들고 칼 린드버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놓고 드리운 파르만의 그림자에 약간 정서불안이 온 칼은 기꺼이 환영했다.
매일 밤 격정이 지나쳐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비명을 지를 때쯤 칼은 천국을 맛보고 아드리안의 품으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며 루루가 놀려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쾌락은 금방 중독성을 띠었다.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에 한해 조심하기를 그쳤다.
아드리안은 느끼한 소리를 잘도 해 대며 칼 린드버그와 완전히 가까워졌다.
낮의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정중한 남자였으나 밤에는 인정사정 보지 않았다.
루루는 하드웨어가 좋으면 소프트웨어는 입력하기 나름이라는 당최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칼은 잠시 그 말을 이해했다가 지금은 철회했다. 하드웨어가 지나치게 좋아도 소프트웨어가 따라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아드리안은 재능이 출중한 신입사원처럼 뭐든 빠르게 습득하고 응용했다.
그러나 완급 조절을 못 해서 칼 린드버그가 쫓아가질 못했다.
지금도 그래.
“나, 타, 탈모 와.”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던 칼이 우는소리를 했다. 아니, 이미 울고 있었다.
“아, 미안.”
칼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 키스하던 아드리안은 손에 힘을 빼고 살짝 떨어졌다.
“하아, 하나도, 안 미안한, 표정인데.”
“미안해. 미안.”
도중에 미안하다고 하는 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못 감춰서 그렇지.
칼이 인상을 찌푸리고 아드리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렇게라도 닿아야 아드리안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나 대머리 된다니까.”
“네 대머리도 사랑할 거야.”
“윽…….”
칼 린드버그가 목구멍으로 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헛구역질을 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알까.
아드리안이 희번덕 눈을 빛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나는 이제 모르겠다고 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땀으로 질척거리는 피부가 다시 마찰하며 열을 낸다.
매일 시트를 가는 시종들이 마르코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칼도 모르지 않았다.
이러다 혼전 임신이라도 할까 봐 잔소리하는 레아도 있었다.
임신, 괜찮은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애초에 내가 제대로 아는 게 뭐가 있었지.
아드리안의 페로몬이 코 안으로 밀려 들어올 때마다 칼은 숨을 멈추고 울먹거렸다.
시선과 시선이 진득하게 얽히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본드처럼 붙어 짓눌린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좋지 않은 곳도 없어서 칼은 경련하고 아드리안은 그런 칼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사랑하는 내 칼 린드버그.”
까무룩 멀어지는 아드리안의 음성에 칼이 엉뚱한 생각을 했다.
네가 나를 만나기 위해 감내한 고통이 있다면 나도 너를 만나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지나온 건가?
전생까지 포함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응, 진짜로 간질거렸다.
아드리안이 또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복슬복슬 귀여운 내.
“아드리안.”
갈라지다 못해 기어들어 가는 칼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수그리며 바짝 몸을 붙였다.
“나는, 네, 민머리까진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어.”
“뭐?”
그러니까 머리숱 관리 잘하라고 말한 칼이 빙긋 웃으며 잠에 빠졌다.
“……진짜?”
충격에 빠진 아드리안은 괜히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 * *
오랜만에 보는 레아의 얼굴은 아주 날카로웠다. 귀족들의 대거 숙청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전쟁까지 신경 써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 미모가 어디 가겠냐마는, 벨프리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대뜸 묻는 벨프리에게 레아는 곧, 이라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한때 누군가가 앉았던 짙은 고동색의 가죽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댄 레아 린드버그의 소매가 검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벨프리도 생생히 보았다.
“성이 말이 아닙니다. 본관에는 이제 멀쩡한 게 없습니다. 보수를 해도 예전의 위용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적당히 하고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작자들이 워낙 많아 나도 적당히 할 수가 없습니다. 벨프리. 이해하세요.
달래는 듯한 레아의 말투에 벨프리가 볼을 부풀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지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에 왕자와 황태자는 관계의 계단을 수십 개나 올라 더욱 단단해졌고 그 안에서 벨프리는 자신의 설 곳이 없어짐을 느끼며 우울해했다.
쉽게 접히지 않는 마음과 그래선 안 된다고 질책하는 벨프리의 이성이 그를 괴롭게만 했다.
레아는 벨프리의 우울감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서론도 없고 본론도 없는 벨프리와의 대화가 그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대변해 주었다.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레아가 벨프리에게 말했다.
- 축하합니다. 소공자.
무엇을 축하하는지 구태여 들을 필요도 없었다.
벨프리는 인상을 팍 썼다.
“축하하지 마세요.”
- 아뇨. 축하받아 마땅할 일이 맞습니다.
“별로 좋지도 않습니다. 매일 끈적거리는 시선이나 받고 감각은 예민해져서 속이 뒤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벨프리는 레아에게 불만을 쏟아 냈다.
냄새가 어쩌고저쩌고, 기사들의 시선이 어쩌고저쩌고.
같이 성에 있는 동안엔 슬금슬금 피하기만 하더니 무슨 영문인지, 오늘은 조잘조잘 잘도 말했다. 아이의 투정을 듣는 것처럼 묵묵히 듣기만 하던 레아는 맥켈런 후작이 자꾸 불쾌한 농을 던진다는 대목에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 제국의 후작이 지금 짝이 없습니까?
“그건 아니신데 원래가 호방한 편이셔서.”
- 어떤 식으로 호방하던가요. 짝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다른 사람에게 추파를 던질 정도입니까?
레아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벨프리는 괜히 후작 이야기를 꺼내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분도 자기 짝은 아주 애지중지하시는데, 그, 기질이라고 할까요. 그게 별로 좋지 않은 편이시라.”
- 흐음.
영상구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던 레아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성은 박살 나고, 저는 이제 오메가 수업을 듣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왕자님께서도 함께 들으셔야 하는데 황태자 전하는 필요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시고.”
생각해 보니 열받는다며 벨프리가 발끈했다.
“오메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왕자님이나 저나 매한가지인데 말입니다. 페로몬 조절이라든가 피임이라든가 저도 모르게 각인하고 마킹되는 것도 막아야 하고요. 노팅도 그렇고 얼마나 아프고 힘든 건지 알아야 하고. 또.”
벨프리는 손가락을 꼽으며 열변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