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11)화 (111/150)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시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거리낌 없이 마킹을 해 대시고 이러다가 아기라도 생기면 큰일…….”

- 그게 왜 큰일이에요? 경사지.

레아는 심드렁히 말했다.

“남성형 오메가의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데요! 왕자님은 안 그래도 골반이 좁아서 더 큰 일이에요. 배가 볼록 나오면 가죽이, 아니, 피부가 다 터지고 거, 거기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 …….

말을 하다 말고 벨프리가 화르륵 얼굴을 불태웠다.

공주 앞에서 별 이야기를 다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잊어 주십시오. 어쨌든 매우,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 그 위험한 일, 그대 아버지인 헨드릭 공작은 세 번이나 해냈어.

레아가 삐뚜름히 웃었고 벨프리는 합죽이가 되었다.

- 그리고 왕자도 언젠가 겪을 일이고.

가만히 듣다 보니 벨프리는 아직도 칼 린드버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저가 왕자를 그렇게 신경 썼다고.

처음에는 싫어하는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더니.

사람 마음 참 알 수 없다.

왠지 불쾌한 기분에 레아가 다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벨프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쿵.

선을 긋는 공주의 말에 벨프리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 왕자의 안위는 이제 그의 반려가 걱정할 것이니 벨프리는 자신의 일이나 잘 챙겨요.

맞는 말이지만 서운했다.

벨프리가 대답을 하지 않고 볼을 부풀리며 눈가를 적셨다.

레아는 한숨을 쉬었다.

- 벨프리.

벨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모양이었다. 영상구를 종료하고 떠나도 상관은 없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는 것은 그가 충신이라서다.

연애나 결혼. 레아 린드버그에게 딱히 달가운 주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당장 린드버그 공국의 재건이라는 커다란 짐이 있었고 그렇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벨프리 헨드릭이 오메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왠지 레아의 장난 같던 마음이 들썩거렸고 자주 벨프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불안하고 서러운 저 표정이.

딱 레아의 상상 속 벨프리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검을 달칵이던 레아가 벨프리에게 말했다.

- 마음 접어요.

“예?”

조각난 마음 가운데에서 뛰던 심장이 이번에는 뚝 떨어져 내렸다.

벨프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 표정이 아까보다 보기 좋다고 레아는 생각했다.

- 칼 린드버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그거 버리라고요. 당신은 그 옆에 설 수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원망스러운 마음에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갔다.

- 쉽지 않아도 어쩌겠어요? 그는 다른 사람의 남자인데. 왜요. 칼을 두고 주군하고 다투기라도 하게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라고 접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라고 이런 마음 품고 싶었겠냐고요!”

결국 벨프리가 소리를 질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저를 비참하게 만드세요? 천천히 접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공주님이 제게 말씀하지 않아도 제 주제는 제가 잘 압니다.”

그녀는 공왕, 벨프리는 작위를 이어받기도 어려운 공작가의 삼남.

그러니 아버지는 눈도 못 뜬 어린 삼남을 황실에 보냈다. 한 유모 아래에서 젖을 먹던 젖형제에서 황태자의 친우로, 그의 측근으로 입지를 다지라고.

지금의 감정적인 행동이 그간 쌓아 왔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지했으면서도 벨프리는 거침이 없었다.

제국 공작가의 자제이면 무얼 하나. 결코 황태자의 우위에 설 수 없었다.

짚어 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아는데.

“저도 싫은데 어떡합니까. 저는 주군하고 다툴 수 없어요. 다퉈도 왕자님은 저한테 오지 않으십니다. 전하를 사랑한다고, 나한테, 대놓고.”

대놓고 말씀하셨는데.

벨프리가 훌쩍훌쩍 울었다.

다 알면서 빈정거리는 레아가 미웠다.

칼 린드버그와 닮은 얼굴로 상처를 후비는 레아가.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우는 자신을 보기만 하는 레아가 너무 미웠다.

소매로 눈가를 부르트도록 닦아 내며 벨프리가 한참을 울었다.

- 다 울었어요?

“……아뇨. 더 울 겁니다. 아쉽지만 보고는 다음에 할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키든지 해야겠다고 벨프리는 코를 훌쩍거렸다.

- 칼 린드버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요.

벨프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압니다. 안다고요.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왕자님과 전하 사이에 제가 끼어들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렇다면 벨프리.

레아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벨프리를 불렀다.

- 지금은 울음을 멈추고 해야 할 일을 하죠. 다행히 짝사랑을 끝내기에 아주 좋은 시기 아닙니까? 바쁘고 정신없고.

맞는 말이긴 한데. 위로인지 뭔지 모르겠다.

벨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 내가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갈게요.

“안 반가울 것 같습니다.”

앙금이 남은 벨프리가 숨을 들이쉬며 대꾸했다.

- 아까는 왜 안 돌아오냐고 했잖아요?

“……아까는 좀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어쩜. 귀엽기도 해라.

뾰로통한 표정에 레아가 후후, 웃었다.

벨프리는 속으로 욕을 한 사발 삼켰다.

저 성격 파탄자 같으니라고. 남은 울고 있는데 그걸 보고 웃다니.

알파들은 다. 다. 거지 같은 것들 뿐이야.

아드리안 헤네켄도 그렇고 레아 린드버그도 그렇고.

-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가서 우는 벨프리의 등을 두드릴 수 있을 때까지요.

“……사람이 좀 운다고 두들겨 패기까지 하는 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

좀 우는 수준이 아니라 공왕에게 언성을 높이고 난리를 쳤다.

그 이유가 그 동생과 주군의 짝사랑을 방해할 수 없어서였으니 사실 아드리안이 알게 되면 태형을 면치 못할지도 몰랐다.

눈물이 쏙 들어간 벨프리가 우물거렸다.

찰그랑.

영상구 너머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벨프리가 우는 걸 지켜보는 동안 반쯤 검집에서 튀어나왔던 레아의 검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두드린다고 말했어요. 벨프리 헨드릭 소공자.

“사과는 드리겠지만 공주님께서도 저한테 상처 많이 주셨잖아요.”

레아의 딱딱한 말투에 벨프리가 가슴을 쭉 폈다. 오메가의 체면이 있지 공주가 협박 좀 했다고 계속 졸아 있을 순 없었다.

- 아, 나 진짜. 미치겠다.

레아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벨프리의 영혼 없는 사과에 레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야말로 구슬처럼 영롱한 웃음소리였다.

벨프리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 벨프리 헨드릭. 나는 당신을 위로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울어도 내 품 안에서 마저 울든가 하라고. 혼자 그렇게 청승 떨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하지 말라고. 오늘처럼 지켜봐 줄 테니까.

뒤늦게 이해한 벨프리가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쥐고 있던 서류들을 팔락팔락 떨어뜨렸다.

- 가망 없는 짝사랑은 빨리 끝내 버려요. 내가 성심성의껏 도울게요.

레아는 눈을 찡긋하더니. 서류를 주우라고명령했다.

어떻게 도와줄 거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레아 린드버그!’

벨프리의 떨리는 손가락이 몇 번이나 서류를 놓쳤다.

* * *

“파르만으로 정예군 10만, 그중 창칼 소지 기마병이 4만, 포병이 2만, 각종 무기 소지 보병이 2만.”

버번 백작의 보고에 글렌이 탁탁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머지 2만은 신전 소속 성기사입니다.”

“하아, 스승님이 결국.”

골치 아파진 글렌이 이마를 짚었다.

백작도 쓰게 웃었다.

참전은 뒤로 미루라고 건의한 게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결국.

“대사제께서는 이번 전쟁을 통해 흑마법을 뿌리부터 뽑아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녹슨 검을 닦던 성기사들도 아주 좋아하고 있고요.”

사람들 앞에서는 고고하고 무해한 티를 내는 대사제가 드물게 흥분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백작은 글렌 헤네켄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마음껏 감상했다.

늘 여유로운 글렌 황제를 당황시키는 것은 배우자인 테레자 황후를 제외하고서는 역시 대사제뿐이었다.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파르만 왕국 안쪽이 악기로 가득할 텐데, 거기에 확실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성력으로 충만한 성기사들뿐이잖습니까.”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다만.”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글렌 황제의 손끝이 열을 내었다.

“스승께서는 형질자가 피를 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신전에서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그만큼 위험하다 여기고 있어.”

성력과 마력은 한 기둥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가지와도 같았다.

근본은 같으나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자란다는 점이 그렇다.

“마력은 쓰기에 따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하지만 반대로 사용하는 인간의 본질에 따라 얼마든지 타락한다는 점에서 그래. 하지만 성력은 다르지 않은가.”

“온전히 여신의 기대에만 부응한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성서에 바탕을 두고 여신이 정한 율법에 철저히 따르지 않으면 성력은 힘을 쓰지 못한다.

니키타는 신의와 정직, 그리고 파멸.

마냥 정직하고 신의를 지키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나. 여신의 율법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기사들은 얼마든지 검을 휘둘러 댈 수 있었다.

게다가, 2만? 잘못하면 파르만 왕국 내의 멀쩡한 인간을 전부 죽여 없앨 수도 있는 인원이다.

“내가 왜 그동안 성기사들을 일반 병사들과 함께 섞지 않았는지 자네는 알지 않느냐.”

“잘 알지요. 그들의 검은 자비가 없으니까요.”

글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사제, 사제, 그리고 신전에서 별도로 육성하는 성기사들.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법은 여신이 내려준 율법뿐이다. 인간의 삶에다 율법의 잣대를 가져다 대면 전부 모자라기만 하니 성서에 따르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거다.

황실이 굳건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이 온전히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인간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대사제를 포함한 신전의 다른 이들은 인간의 법도에도 해박한 유연한 사람들이라 큰 마찰 없이 황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그놈의 성기사들은.

“스승님이 안 계시니 하는 말이지만, 그것들은 전부 머리에 문제가 있는 놈들 뿐이야. 날뛰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감정도 없고 유연하지도 않다.

신의 심판이라는 말로 자행되는 학살을 황제는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적을 혼동하면 안 된다. 파르만의 국왕과 흑마법이 우리의 적이지. 그렇다고 파르만 왕국의 모든 씨를 말려 버리면 곤란한데.”

황제 앞에서 조용히 서 있던 버번 백작은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폐하. 만약 파르만의 사람들이 전부 흑마법에 귀속되어 있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글렌이 끄응, 답답함에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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