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수 없이. 그것이 대륙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버번 백작은 황제의 고뇌를 전부 이해했다.
입으로는 다 죽이고 지도에서 없애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면서도, 올바른 통치자로서 교육받은 신념이 학살만큼은 옳지 않다고 그의 양심을 두드린다.
대륙 전체가 헤네켄 제국의 손에 들어와 있는 작금의 세대에 한번 들여다보지도 못한 파르만 왕국의 백성들까지 마치 자기 백성처럼 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린드버그에 체류하고 있는 드람뷔 자작의 보고에 따르면 칼 린드버그 왕자님께서는 여전히 무언가를 고민 중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겠지. 그 애도 마음이 여려서, 원.”
지금쯤 끙끙 앓으며 어떻게 해야 파르만의 국왕만 쏙 빼내어 처단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테지.
미간을 짚은 글렌에게 버번 백작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 본인도 그다지 잔인한 성정은 못 가졌다.
“아니요. 왕자님께서는 다른 고민을 하고 계신답니다.”
“무슨 고민?”
글렌이 눈을 번쩍 떴다.
요즘 칼 린드버그에겐 모든 보고가 일절 가감 없이 들어갔다.
변경에서 마수를 때려잡다 죽은 병사들의 숫자나 다치는 병사들. 그리고 개중에는 전투의 여파로 사망하게 되는 평민에 관한 보고도 있었다.
왕자는 파르만이 다른 언어의 수식으로 거대한 마법진을 그린 것까지 파악했다.
끊어 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 하는 이유가 지상에서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해서였으니. 왕자의 고민이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왕자님께서 전하셨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무슨 소리야?”
처음 듣는 표현에 글렌이 허리를 바로 세우며 이마를 찌푸렸다.
“어떤 것으로 당했을 때 같은 방법으로 대갚음해 주는 것을 말한답니다.”
“뭐?”
그렇다면.
글렌이 입을 떡 벌렸다.
버번 백작은 황제의 저런 표정을 한 10년쯤 전에 보았다.
현존하는 가장 강한 권력의 사내가 당황하고 침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왠지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맛에 자꾸만 대사제가 황제를 약올리는가 싶기도 하고.
백작이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흑마법에는 흑마법으로 대갚음해 주고 싶은데. 문제는 자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애는 어떤 수식이나 이해하니. 겁내는 마음도 이해는 간다만. 갑자기 무슨 흑마법을 쓴다는 거야?”
“맥켈런 후작이 옆에서 계속 압박을 넣는답니다. 마치 여신을 타락시키러 온 성녀 같더군요.”
벨프리는 왕자님에게서 후작을 떨어뜨려 놔야 한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이런, 내가 이래서 후작을 린드버그에 보내는 게 탐탁지 않았건만.”
키치너와 파르만이 손을 잡았다면 가장 위험할 린드버그에 후작을 보내야 한다고 강권했던 버번 백작을 글렌이 눈에 핏발이 서도록 노려보았다.
“왕자님의 도움으로 미바리숲 근교에 설치한 방어벽이 제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말씀도 전해 드립니다. 왕자님은 자신의 마법이 생각보다 강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또 뭐.
글렌은 이제 불안할 지경이었다.
백작이 말을 이어 나갈 때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이때에도 파르만의 국왕이 자신의 요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 여기며 그가 그 자신으로 흑마법을 완성시키려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그 다스린다, 라는 뜻의 마법진의 꼭짓점에 파르만 왕성이 있다고.”
“그래서 결론은?”
황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위협적인 태도였으나 노장은 꿈적도 하지 않았지만.
“왕자님께서는 마법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이 직접 파르만으로 가는 것이 어떤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전해. 절대로 허가할 수 없다.”
백작의 말이 채 끝맺음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줄 알았어.
흑마법을 흑마법으로 하면서 바닥공사를 할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글렌 황제가 버번 백작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단호한 음색으로 말했다.
“성기사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어차피 파르만의 국왕은 죽는다. 그 안에 진을 효과적으로 파괴할 방법을 찾아 진을 파괴한다. 왕자가 하는 일은 린드버그에 가만히 앉아서 어느 부분을 파괴해야 마력이 끊기는지를 고민하는 거야.”
“하오나, 폐하.”
글렌이 버번 백작을 시선으로 꿰뚫을 것처럼 기세를 부풀렸다.
“나는 그 아이에게 미끼 노릇을 하라 했지. 세상천지 어떤 미끼가 걸어서 쥐 소굴로 들어가나? 자네는 그것이 옳다고 보는가?”
한마디라도 더 보태면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다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황제 때문에 버번 백작은 그저 고개를 수그렸다.
“성기사의 합류를 허가한다고 말해. 신의 심판이든 뭐든 마음대로 하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버번 백작의 입꼬리가 티 안 나게 올라갔다.
“존명하겠습니다.”
“아, 브루스튼가 부루트스인가. 그 인간은 가능한 한 생포해. 린드버그 남매의 개인적인 원한은 파르만의 국왕보다 그에게 더 있을 터. 직접 처단할 기회를 주어야지.”
황제의 각진 턱에 힘줄이 바짝 섰다.
“알겠습니다.”
버번 백작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는 제 얼굴을 정복의 소매로 감췄다.
젊은 시절에는 변경에서 칼만 휘두르던 버번 벡작에게 태평성대가 길어지는 것은 고루하기만 했다.
이건 길고 지루한 인생에 이 정도 소스는 필요하지 않은가.
그에게도 자꾸 거치적거리는 파르만은 검날에 붙은 먼지처럼 짜증스러웠지만 그것도 곧 닦아 낼 테니 괜찮았다.
물렁거리기만 했던 왕자의 단호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버번 백작.”
집무실을 나서던 황제가 백작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자네가 헤네켄 제국에 머무르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던 모양이야.”
“네?”
설마.
버번 백작의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지휘관으로 나서겠나?”
버번 백작이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 서임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바닥에 닿아 본 적 없던 무릎이 그가 진정 바랐던 명령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대를 너무 가두어 놓았나 봐. 가서 실컷 검을 휘두르고 남는 시간엔 성기사단의 목줄도 좀 쥐고 그래.”
“감사드립니다.”
가만히 놔두면 황제 발이라도 핥을 것 같은 백작의 채신머리없는 표정에 황제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맥켈런 후작도 껄끄럽지만 그대도 마찬가지야. 제국의 공신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으로 거침없는지 모르겠어.”
헨드릭 공작이나 벨프리가 알파는 다 이상하다며 구시렁거리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발베니 대공이 혜안이 있었지. 승계권 포기하고 갑자기 공작가의 데릴사위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사랑 때문인 줄만 알았거늘. 쯧. 죄다 육식 짐승들 뿐인 곳에서 황제 해 먹기 힘들군.”
글렌이 혀를 차며 집무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버번 백작은 무릎을 꿇고 배웅했다.
* * *
아일라 레바는 마차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린드버그의 왕성을 내다보고 이를 악물었다.
아비는 어수선한 레바 왕국의 분위기를 마치 기회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린드버그의 왕자가 린드버그에서 일어난 폭동을 빌미로 제국에 몸을 의탁했다가 황태자의 약혼자가 된 것을 내내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헤네켄의 황후가 될 수 없다면 후처라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헤네켄 황실이 한 알파와 각인한 한 오메가만을 부부로 인정하고 그 역사가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황제가 후처를 들이긴 했으나 그것은 황후의 공석을 채우기 위함이지 부부의 연을 맺으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대륙이 다 알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것이 무어라고.’
운이 좋아서 후처로 들어앉게 되더라도 황태자의 마음은 절대로 자신에게 오지 않을 텐데. 마치 거래하는 귀금속처럼 취급당하던 지금까지의 삶과 사랑 없는 혼인으로 귀결되는 그 삶이 아일라에게는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처음으로 대든 딸의 뺨을 때린 아비가 그녀의 뺨에 난 생채기를 보며 당황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일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구나. 나의 소용은 오로지 결혼으로만 완성되는구나.
그때 아일라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숨구멍을 만들어 주겠다던, 알파이자 린드버그의 공주. 차기 공왕.
차라리 린드버그로 가겠다는 아일라의 말이 받아들여진 것은 당연히 그곳에 황태자가 있다는 것을 아비가 알고 난 후였다.
아일라가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누군가는 나라를 지키려 움직이고 자신은 도망을 친다. 그것도 단 한 번 만났던 알파의 말에 기대어.
지독하게 세뇌당한 탓인가. 싫은데도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바깥은 난리가 났는데 여기는 지나치게 평화롭군요.”
따라온 유모가 종알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하얀 외벽과 오렌지색 지붕을 가진 건물들에 못 박혀 있었다.
“린드버그의 왕도에는 처음 와 보지만 전하 말씀을 들어 보면 악취 나는 범죄자 소굴이었다는데. 지금 보니 꽤 번성한 왕국의 괜찮은 도시잖아요? 역시 팔자가 좋아 제국 황태자비 자리를 꿰차니 나라 때깔부터 달라지는군요.”
유모가 의미심장하게 아일라에게 말했고 아일라는 듣지 못한 척했다.
도로는 아직도 정비 중이었고 건물들 사이로 미처 허물지 못한 폐가도 남아 있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상인의 가판대를 보면 알 수 있는 폭정의 흔적이 유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자가 무슨 알랑방귀를 뀌었는진 몰라도 어지간히 이쁨받는 모양이에요. 제국에서 린드버그에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지원했다더군요.”
며칠에 걸친 이동이라 피곤할 법도 한데 유모는 지치지도 않고 떠들었다.
“우성이라도 남성형 오메가라 발정기가 아니면 임신도 하기 어렵잖아요. 곧 차남이 태어나면 당장 승계 구도부터 바뀔 텐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원, 우리 공주님이야 밭이 좋으니 씨만 잘 뿌리면 후계자 걱정도 덜어 주고 말이지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니까요.”
아일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는 헤네켄의 다른 우성 알파라도 물어 오라더니 갑자기 황태자의 후처라도 되라고 태세를 전환한 이유가 여기 있었나 보다.
남성형 오메가의 임신이 어렵다는 말을 또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종잇장처럼 얇은 아비의 귀를 흔들었겠지.
“지금은 재가 되도 모를 정도로 불타겠지만 저쪽도 나이를 먹고 정치 돌아가는 걸 알고 나면 눈을 돌릴 거예요. 공주님은 그때까지 꾸준히 눈도장을 찍고 계세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네. 유모의 말에 아일라는 짜증이 났지만 대꾸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당장 헨드릭 공작만 봐도 남성형 오메가지만 아들을 셋이나 거느렸다. 그리고 헤네켄 황실은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며 출산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보면 알잖아?
제 유모도 그렇고 아비도 그렇고. 다 눈꺼풀에 뭔가 씌워 놓은 것처럼 남들 다 보는 것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아일라도 그 사이에서 주인 잃은 부표처럼 이리저리 떠다니기만 하고 있었다.